농부의 노래
나는 해마다 어설픈 농부가 되어
봄에는 상치, 오이, 가지, 오크라, 비트를
늦여름에는 주로 배추와 무를 기른다.
8월 중순 인근 새 밭을 얻어
뙤약볕 아래에서 며칠에 걸쳐 숨을 헐떡이며 땅을 파고
퇴비를 온 밭에 뿌리고 다시 흙을 뒤집고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고...
정성스럽게 배추 모종을 심고
무씨 파종도 하고, 제 때 발아가 안 되어 또 뿌리고
먼 거리이지만 자주 들려 잡초를 뽑고
물도 하루건너 한 번씩 주며 자식처럼 품에 안고
생명의 탄생과 자람을 보는 일은 기쁨이고 환희다.
외국 여행 시 오이와 채소는 돌보는 분의 몫
화학비료도 농약도 멀리 한 유기농 작품!
어느 듯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작물들과 소곤거리는 농부는 행복하다.
그 환희도, 행복도 잠시
늦가을 멧돼지들이 옛 밭 고구마를 먼저 강탈해 가
반타작도 안 되는 곳에서 이삭 얼마라도 캔 것이
허망하게 끝난 고구마 농사인가
멧돼지들의 소박한 꿈을 앗아 간 것인가
그러나 탐스럽게 부쩍 자란 배추들을 내버려 두고
바로 옆 밭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찾아 파헤친
멧돼지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작물이 자라는 것을 보는 농부의 마음은 흐뭇하다.
자주 내린 비에 무럭무럭 자라
속이 겹겹이 차가는 배추!
기쁨을 나눌 수 있는 하늘의 선물!
피치 못할 일에 이끌려 다니고
이런 저런 일들로 바쁘기도 하여
배추밭을 돌보아야 하는 때를 놓쳤다.
이제는 배추벌레를 잡아야지 할 때
그 탐스런 배추들 몰골에 소스라치게 놀란 가슴
배추벌레가 그렇게 많을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가장 맛있는 연한 속을 먹어치운
엄청난 초록 똥 무더기들
숭숭 구멍 뚫린 앙상한 속 이파리들
싱싱하고 멀쩡한 겉치장에 처참한 속살
누구를 닮았을까
뒤틀린 인간 속사람 실존을 빼 닮았나
어설픈 농부의 꿈도 날아가 버렸나
아,
죄가 이 세상에 스며들어와
이름다운 창조세계를 흉하게 만들어 버린 현상과
다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드냐고
실물교훈으로 나를 일깨운 배추벌레여
그대는 나를 깨우치는 이 사명을 위해 태어나
아볼루온처럼 잠입해 왔느냐?
그래도
늦가을 아작 낸 배추벌레들 횡포 너머
나는 머리를 들어 가을 하늘을 볼 테다.
울며 울리는 사람들 속에서
내 집 밑 둥을 파먹고 자르는데도
위로의 눈물이 안 보이는 욥이 될지라도
추위가 몰려와도 농부는 파란 꿈을 또 꿀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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