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노래

단상 : 2019. 10. 19. 21:12

           농부의 노래

 

나는 해마다 어설픈 농부가 되어

봄에는 상치, 오이, 가지, 오크라, 비트를

늦여름에는 주로 배추와 무를 기른다.

8월 중순 인근 새 밭을 얻어

뙤약볕 아래에서 며칠에 걸쳐 숨을 헐떡이며 땅을 파고

퇴비를 온 밭에 뿌리고 다시 흙을 뒤집고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고...

 

정성스럽게 배추 모종을 심고

무씨 파종도 하고, 제 때 발아가 안 되어 또 뿌리고

먼 거리이지만 자주 들려 잡초를 뽑고

물도 하루건너 한 번씩 주며 자식처럼 품에 안고

생명의 탄생과 자람을 보는 일은 기쁨이고 환희다.

외국 여행 시 오이와 채소는 돌보는 분의 몫

화학비료도 농약도 멀리 한 유기농 작품!

 

어느 듯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작물들과 소곤거리는 농부는 행복하다.

그 환희도, 행복도 잠시

늦가을 멧돼지들이 옛 밭 고구마를 먼저 강탈해 가

반타작도 안 되는 곳에서 이삭 얼마라도 캔 것이

허망하게 끝난 고구마 농사인가

멧돼지들의 소박한 꿈을 앗아 간 것인가

 

그러나 탐스럽게 부쩍 자란 배추들을 내버려 두고

바로 옆 밭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찾아 파헤친

멧돼지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작물이 자라는 것을 보는 농부의 마음은 흐뭇하다.

자주 내린 비에 무럭무럭 자라

속이 겹겹이 차가는 배추!

기쁨을 나눌 수 있는 하늘의 선물!

 

피치 못할 일에 이끌려 다니고

이런 저런 일들로 바쁘기도 하여

배추밭을 돌보아야 하는 때를 놓쳤다.

이제는 배추벌레를 잡아야지 할 때

그 탐스런 배추들 몰골에 소스라치게 놀란 가슴

배추벌레가 그렇게 많을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가장 맛있는 연한 속을 먹어치운

엄청난 초록 똥 무더기들

숭숭 구멍 뚫린 앙상한 속 이파리들

싱싱하고 멀쩡한 겉치장에 처참한 속살

누구를 닮았을까

뒤틀린 인간 속사람 실존을 빼 닮았나

어설픈 농부의 꿈도 날아가 버렸나

 

,

죄가 이 세상에 스며들어와

이름다운 창조세계를 흉하게 만들어 버린 현상과

다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드냐고

실물교훈으로 나를 일깨운 배추벌레여

그대는 나를 깨우치는 이 사명을 위해 태어나

아볼루온처럼 잠입해 왔느냐?

 

그래도

늦가을 아작 낸 배추벌레들 횡포 너머

나는 머리를 들어 가을 하늘을 볼 테다.

울며 울리는 사람들 속에서

내 집 밑 둥을 파먹고 자르는데도

위로의 눈물이 안 보이는 욥이 될지라도

추위가 몰려와도 농부는 파란 꿈을 또 꿀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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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