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웜브란트 책을 중심으로 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리처드 웜브란트(Richard Wurmbrand, 109-2001) 목사는 루마니아 공산주의 치하에서 14년간 투옥되어 인간이 고안한 온갖 고문과 구타, 세뇌, 약물주입 등을 당한 ‘살이 있는 순교자’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지옥 같은 고난을 당한 분이다. 그는 공산정부 박해 아래 구속되어 폐결핵 사경 속에서도 지하교회 조직망을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다. 그가 고난을 당한 이유는 그가 유대인이었고, 그리스도교인이었다는 두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수난 중에도 지하교회를 이끌었던 핵심 지도자 중 한 분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는 상호공존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그 점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웜브란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젊은 날 한 때 공산당 코민테른 활동에 몸을 담아 수감생활도 하였다. 젊은 날 방탕도 생활도 했다. 그는 폐결핵으로 요양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 루마니아 벽촌에 살고 있던 독일 크리스천 뵐프케스(Wolfkes)라는 목수를 만났다. 이는 1938년 사건이다. 이 목수는 몇 년 동안 유대인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해왔었는데, 그 응답으로 1938년 웜브란트를 만났던 것이다. 뵐프케스는 그에게 성경을 주어 읽게 하고 정성 컷 돌보며 기도하였다. 드디어 웜브란트는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촌락의 한 목수는 유대인들에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설파하였고, 메시아의 강림 목적이 정죄에 있지 않고 구원에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목수의 기도의 불꽃이 그와 그의 아내까지 사랑의 불꽃 속으로 인도한 것이다.
웜브란트는 먼저 영국교회로부터 안수를 받고 활동하다가, 제2차 대전 후에는 루터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에서 유대인 고아들을 몰래 빼내고, 방공호에서 설교하고, 헝가리 집시들을 위한 구제 봉사활동 등을 하였다. 그는 1944년 소련군 점령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된 루마니아 정권 하의 동족들을 위하여 사역을 계속해나갔다. 공산주의자들이 루마니아의 종교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을 때, 웜브란트 목사는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와 공산주의의 관계에 대한 진리를 고백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제일 먼저 충성해야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그는 14년의 투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948년 지하교회 예배 참석하러 가는 길에 체포되어 긴 영어의 혹독한 생활을 하며 신앙을 지켜갔다. 8년 반 옥중생활을 하다가 1956년에 석방 되었다. 물론 복음전도를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명을 받았지만, 그는 지하교회 활동을 하다가, 1959년에 다시 체포되어 25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 때 앞에서 소개한 그토록 필설로 형언키 어려운 모진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모로스 부호 같이 벽을 두드리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였다. 이 기간 중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통보도 받았으나 이를 믿지 않았다. 아내도 1950년 체포되어 3년간을 옥중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두 부부가 옥중생활 할 때 9살짜리 아들을 데려다가 양육해 주었다. 웜브란트 목사는 “하나님은 항상 핍박받는 자들의 편이십니다” 메시지를 전했다.
그를 위하여 기도하던 노르웨이 선교회 및 히브리 그리스도교 연맹의 동료들 즉, 서방 국가의 그리스도인들은 루마니아공산당 정권과 협상하여 1964년에 몸값 1만 달러 거금을 속전(贖錢)으로 지불한 후에 ‘철의 장막 세계의 바울’ 같은 그를 외국으로 피신시켰다. 당시 정치범 1인 당 1,900달러 몸값에 비하면, 속전 1만 달러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미워하지만, 자본(돈)을 무척 좋아해서 자국의 국민까지 팔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웜브란트 목사 내외는 노르웨이, 영국을 거쳐 마침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안락하고 즐거운 여생을 보내는 대신, 핍박받는 교회들의 목소리가 되는 일에 전념했다.
필자는 40여 년 전 그의 책 Tortured for Christ(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를 읽고 감동을 받아 그 내용을 교회 저녁 예배 시간에 소개한 일도 있었다. 그는 1966년 미국 상원에서도 자기의 경험을 증언하면서 TV앞에서 허리까지 상의를 벗어 제키고 19군데의 자기 몸에 남겨진 고문 흔적(예수의 흔적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1967년 <순교자의 소리>의 전신이 될 ‘Jesus to the Communist world(공산주의 세계에 예수를)’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1990년 웜브란트 목사 내외가 25년 만에 루마니아에 귀국하였을 때는 <순교자의 소리>가 발간한 그의 저술들이 수도 부쿠레슈티 서점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모든 교단의 목회자들 앞에서 설교도 하였다.
웜브란트 목사의 생애는 고난 중에 믿음으로 꿋꿋하게 버티어나간 기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1976년 11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원동지회 행정위원회에 참석하여 감옥에서 자기와 함께 생활하면서 지켜 본 6명의 재림신자들의 신앙적 삶을 증언하였다. 물론 그는 6명 뿐 만 아니라, 재림교회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 상당수가 옥고를 치렀다고 회고했다. 그는 특히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들 앞에서 크나큰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웜브란트 목사의 증언에 따른 재림신자들의 옥중 생활 묘사는 다음 내용을 담고 있다.
15,000명의 죄수들이 수감된 강제노동 수용소에서는 부활절도 일요일도 지킬 수 없었다. 하루 15-16시간을 허기진 배를 안고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로공사장에서 신자 죄수들도 일요일에 강제 동원되는 판에 “우리는 안식일에 일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재림신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안식일 마다 모질게 매를 맞았다. 다른 죄수들은 그 참상을 목격했다. 날마다 지내다 보면 요일이 구분 안 되는 수용소생활에서 어느 요일인지 헷갈리기도 하였는데 그들이 매 맞는 비명과 신음소리를 듣고서는 그 날이 토요일인 것을 알기도 했다.
옥중생활을 하는 죄수들에게 나오는 식단에는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 재림신자들은 그 고기가 돼지고기인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어서 고기 자체를 먹지 않았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은 식사를 대부분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약간의 잼을 바른 빵만을 먹는 것이 일수였다. 죄수들은 때때로 빵 한 조각으로 한 주일을 버티어 나가기도 하고, 하루에 빵 한 조각만으로 살기도 해야 했다. 그런 중에도 재림신자들은 감옥에서 십일조를 엄격하게 드렸다. 몇 주에 한 차례씩 그 빵 한 조각을 십일조로 성별하여 약하거나 병든 자에게 바쳤다.
교육 수준이 낮은 한 농부 재림신자가 있었다. 그와는 같은 감방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의 속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네 명의 자녀들을 두었던 그 농부는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가담하면 석방하겠다고 회유한 것에 마음이 연약하여져 변절 진술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 농부는 곧 양심의 가책을 받고 즉시 뒤 좆아 가 그 진술서에 더 쓸 것이 있으니 돌려달라고 간청하였다. 제출한 진술서로 충분하고 더 이상 기록할 필요가 없다고 한 공산당 간부에게 농부는 “제가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서는 꼭 몇 마디 더 첨가할 것이 있다”고 고집하여 돌려받은 진술서에 이렇게 추가하였다. “나는 연약해진 순간에 위의 말을 진술한 것에 대하여 뉘우칩니다. 나는 내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그 분의 계명에 순종할 것입니다.” 농부에게 석방의 기회는 지나가버렸다. 그러나 “나는 농부가 그처럼 행복해 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본적이 없다.”
웜브란트 목사는 플로리아라는 재림신자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는 안식일 준수 때문에 너무 혹독하게 구타를 당하여 그의 양손, 두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목만을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간호사나 도우미가 있을 까닭이 없는 그 곳에서 마비된 신자의 운명은 처참하게 보였다. 아무도 그를 씻어줄 수도 없었다. 자기들도 몸을 씻은 지 3년이나 되기 때문이다. 홋 이불도 없어 덮어 줄 수도 없었다. 식사 시간에 음식을 먹일 숟가락이 없어서 나무 조각을 구해 가운데를 파내어 숟가락으로 사용할 정도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방에 누워 있는 동안 내가 일찍이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기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우리는 변화산 위에서 변화된 사람과도 같은 변화를 목격했다.” 오히려 마비된 그 재림신자가 우리 모두를 격려해 주었다.
어느 날 수감자들이 각각 근심 걱정에 빠져 신세타령을 하며 절망에 빠진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플로리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형제들의 전망이 그렇게 암담하다면 위를 쳐다보라고 했다. 그러면 스데반처럼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리라고 격려한 것이다.
수용소 감방 신자들이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 성찬을 차릴 테이블이 없다고 하자, 다른 누군가가 “우리가 성찬을 나눌 수 있는 아주 좋고 훌륭한 장소가 있다”고 하며 플로리나의 가슴을 테이블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당시 죄수들은 굶주리고 있는 마당에 공산당 권력은 그들에게 마취제까지 몰래 음식이나 음료수에 속에 넣어 먹게 하므로 정신이 병들어 가고 있는 판이었다. 죄수들은 먹어야 살기 때문에 타의적으로 약물까지 섭취하므로 기억 상실증 환자로 전락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에 나온 성찬예식에 관한 신학을 모두 말끔히 잊어야 했다. 그 근본정신을 살리는 의식이면 족한 것이었다.
플로리나의 믿음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형제들이여, 하늘을 잃지 마십시오. 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웜브란트 목사가 출옥하여 플로리나의 유족을 방문하였다. 아내와 9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그는 그 가족에게 감옥에서 일어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아빠처럼 그렇게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자 9살짜리 아들이 대답했다. “목사님, 제 소원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상인걸요. 저는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사람(a sufferer for Christ)이 되려고 해요.” 이 엄청난 대답을 듣고 플로리나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루마니아에는 아직도(1976년 당시 기준) 14명의 재림신자들이 옥중에서 고생하고 있다. 러시아에는 더 많은 재림신자들이 감옥에 있으며 그 중 한 사람은 26년간이나 감옥에 복역 중에 있다. 그 긴 세월을 견디어 내면서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기적에 속할 것이다. 웜브란트는 후에 재림교회가 스탈린이 수백만의 동방 정교도들, 개신교인들, 재림교인들및 유대인들을 죽인 사실을 귀 교단은 알고 있단 말입니까? 러시아의 재림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교회 건물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요?라고 하며 공산 정권에 협력하는 재림신도를 칭찬하고 있으니 이게 맞느냐고 경책을 하였다. 그는 이어서 질문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그의 공산주의 선언에서 이 사상의 목적이 모든 종교와 도덕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협력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순교자의 소리> 창립자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는 1976년에 ‘마르크스와 사탄(Marx and Satan)’을 출판했다. 한국 <순교자의 소리>가 이 저술을 번역 출간했다. 웜브란트 목사는 1982년부터 2001년 캘리포니아 토랜스에서 잠들 때까지 세계 곳곳을 다니며 공산국가에 성경 보급,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 돕기 운동에 매진하였다. 그의 마르크스와 사탄(Marx and Satan)’은 공산주의 운동 배후 핵을 이루고 있는 사상을 들추어내고 있다. (다음 글에서 계속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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