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하는 일

구원 : 2020. 3. 21. 22:08

빛이 하는 일

빛이 있으라!”

창조 이전 상황은 혼돈과 공허(tohu wabohu)이었다. 이 표현은 없음과 텅 빔을 묘사한 표현이다. 그것은 어둠과 깊음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졌고 장엄한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성경 서두에 나오는 메시지이다. 여기에서 은 창조 이전에 지구 밖에서 온 빛이다. 그러나 깊은 어둠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캄캄한 데 계신다. 그 이유는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라!”는 음성이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오늘 온 세계는 중국 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 재난으로 초토화되고 있는 칠흑 같은 어둠의 시대이다. 아직 백신도 치료약도 나오지 않았다. 이 중국제 바이러스가 선진 유럽을 혼돈 속으로 몰아 간 듯하다. 식자들은 특히 중국공산당과 밀착된 이탈리아, 이란 한국에 이 전염병이 처음부터 창궐하기 시작 했다고 주장한다. 미국도 비상정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영어 재난(disaster)’이란 단어는 헬라어 없는이나 나쁜(bad)’을 뜻하는 부정적 접두사 δυσ-(dus-) '을 뜻하는 아스테르(ἀστήρ, aster)‘의 합성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재난은 별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 재난은 온 세계를 빛이 안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둠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인간은 빛을 그리워하는 존재이다. 요즘은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인 메모리엄(In Memoriam)> 시 끝자락이 새삼스럽게 와 닿는다.

 

그리고 모든 겨울이 봄이 되리라는 것을.

내 꿈은 바로 이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는 밤에 우는 아이,

빛 그리워 우는 아이,

울기만 할뿐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And every winter change to spring,

So runs my dream: but what am I?

An infant crying in the night:

An infant crying for the light:

And with no language but a cry.

 

그 안에 生命(ζωη, 조에 zoe)이 있었으니 이 生命은 사람들의 빛(φως, 포스 phos)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4, 5).

조에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조에는 생물학(biology)에서 말하는 생명 bios’란 말과 대비된다. ‘비오스는 죄로 타락한 인간 생명이지만, ‘조에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함께 하는 생명이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포스로 묘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구원의 빛이시다. 요한은 복음서의 서언에서 빛과 생명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 본래 어둠에 처한 인간들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 빛이 되신다. 이 빛이 어둠 속에 내려와서 비치기로 작정하시고이 땅에 오셨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여기서 깨닫지 못하더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katalambano (καταλαμβάνω)’이다. 이 말은 붙잡다, 깨닫다, 이기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새번역은 이 구절을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빛과 어둠은 어울릴 수 없다.

어느 해 속초 해수욕장 해변에는 야간 축구장에서 사용하는 대형 조명시설 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본래 그 설치 취지는 야간에도 해수욕장을 개장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지만, 의외의 결과도 얻었다. , 밤을 밝히는 환한 조명 때문에 모래밭에서 조명등이 없었던 이전보다 훨씬 음주, 고성방가, 흡연자들이 줄었다는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밤이 없는가 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빛은 창조와 재창조의 일을 한다. 생명과 빛은 직결되어 있다. 빛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 빛은 직진성과 파동, 반사, 굴절, 회절, 산란, 분산, 스펙트럼, 색깔 등 아주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빛의 본질은 신비하여 다 알 수 없다. 육체적 생명이나 영적 생명은 모두 빛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빛이 없다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 빛은 무한히 퍼진다. 빛이 빠른 속도로 내리 쏟게 한 이유는 그만큼 신속하게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광합성작용이 바로 이 점을 말해 주고 있다. 녹색식물의 엽록체에서 이산화탄소, , 빛에너지가 작용하여 포도당이 만들어지는 반응을 광합성이라고 한다. 녹색식물은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포도당을 그대로 또는 이당류의 설탕/엿당으로 일부 저장하고 대부분은 다당류의 녹말로 바꾸어 저장한다. 이렇게 저장된 녹말 덩어리들이 인간과 동물들이 먹고 살아가는 쌀, ,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이다. 햇볕은 인간에게 절대로 필요로 한 비타민 D를 체내에서 생성시킨다.

 

인간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대에 살고 있다. 어둠을 뚫고 비치는 빛이 있다. 재난의 시대에 빛이 있으라는 음성이 들려야 한다.

 

에너지를 주는 빛

그 용도를 다 망라할 수 없으리만큼 빛이 하는 일은 다양하다. 이 시대는 태양광 시대이다. 미 연방 에너지부에서는 1981년 캘리포니아 주 바르스토우(Barstow) 근처 불볕 사막지대에 태양광 발전 탑을 설치하였다. 이 태양광 발전 탑은 마치 바다의 등대처럼 보인다. 단지 황막한 사막 가운데 세워졌고 대양의 물결대신 엄청난 수의 반사 거울로 에워 쌓여 있다는 점이 다른 점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태양광 발전 탑은 태양광을 이용하여 전력을 생산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중앙 발전 탑 주변에 에워 쌓여 있는 평면형 반사경 헬리오스타트 (heliostats: 태양에너지를 반사시키는 장치) 1,818개가 모두 태양 광선을 하루 종일 수집 반사하여 수집기 발전 타워 꼭대기 타깃에 그 초점들을 공동 집중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다. 본래 설계상으로는 꼭대기 초점에 600개의 태양이 비치는 것에 맞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그 설계에서는 이러한 집중 광선을 사용하여 물을 가열하고 그 결과 발생하는 증기로 터빈을 가동, 매일 10 메가와트 전력을 공급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스템이 '중앙 탑'발전소 또는 '헬리오스타트'발전소로도 알려져 있다.

미 연방 에너지부에서는 2007년에 네바다 주 불더(Boulder)에 훨씬 큰 용량의 헬리오 스타트 발전소를 건립하였다. 지난 해 여름 온타리오 공항에서 이곳 상공을 지나 애틀랜타로 가는 비행기 위에서 그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생산되는 전력은 매일 64 메가와트 전력, 또는 매해 134 백만 킬로와트의 전력이 된다. 20142월 현재를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태양광 발전소는 라스베가스 남서쪽으로 약 64km 떨어진 캘리포니아 주와 네바다 주 경계의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위에 건설된 이반파 태양열 발전 시스템(Ivanpah Solar Electric Generating System)으로 여의도 면적보다 더 큰 3500 에이커 (14.2 ) 의 면적위에 총 173,500 개의 헬리오스타트가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시대 화두인 태양광 발전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형 원자력발전소는 그 안전성이 세계적으로 뛰어나다고 한다. 그들은 영화 한편 보고 한국의 안전한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겠다는 정책 발상을 했다고 가시 돋친 비판의 칼날을 세우지만 당국은 마이동풍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대안이 된다는 태양광 발전소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태양광을 잘 이용한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늘날 같은 고도 산업화 시대에 지속적인 주 에너지원이 되기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는 획기적으로 저렴하고 안정성이 있는 거대 용량의 지속적 전력 확보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태양광 전력을 통하여서는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원전 대책의 돌파구를 태양광 발전소와 석탄 또는 LNG를 이용한 화력 발전소 확장에서 찾는데, 그 값이 원전에 비하여 너무 비싸 높은 생산비 때문에 세계 경쟁국들에게 아주 불리할 뿐만 아니라, 대기오염이라는 엄청난 부산물을 발생시켜 날마다의 삶에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이 명약관화하다. 우리는 현재 이런 고통을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억지로 묶어둔 전기료가 눈 덩이처럼 커지는 한전의 부채가 국민의 부담으로 곧 돌아 올 것이다.

 

적을 무찌르는 빛

그리스 역사학자 카시우스의 `로마사`에 보면 아르키메데스가 만든 `죽음의 광선` 이야기가 나온다. 현대 학자들이 그 가능성 여부를 놓고 비평적 논의도 했었다. 212 BC에 시라쿠스(Syracuse) 포위 기간 중 고대 그리스 발명가 아르키메데스(Archimedes)가 정교한 화경(火鏡) 무기를 개발했다. 그는 반사 된 햇빛이 거울로부터 초점거리 내에 위치한 지점에 맞출 수 있도록 일련의 반사경들을 정확하게 잘 배열하여 태양의 뜨거운 빛을 침공 로마 선박에 조준, 초점에 들게 하여 로마 함대를 한 척씩 화염에 휩싸이게 하여 승리를 거두게 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카시우스가 기록에 남긴 진술이다."놀랍게도 아르키메데스는 로마 함대 전체를 한 줌의 재로 만들었다. 특수하고 거대한 거울을 태양 쪽으로 기울여 배를 향해 광선을 모아 거대한 화염을 만들었다." 로마함대를 불태운 `죽음의 광선`은 일종의 火鏡 형 광선총인 셈이다. 더구나 당대 배들에는 역청 같은 것이나 콜타르 같은 인화물질로 방수처리를 하여 곧 불꽃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아르키메데스 죽음의 광선 이론에 대한 논의가 근래에 들어 시험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1973년 그리스의 과학자 로아니스 사카스(Loanis Sakas)는 실제 실험을 통하여 아르키메데스 거울을 재현하였고, 50미터 거리에서 모형 로마 범선에 초점을 모아서 수 초 만에 불꽃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200510MIT 팀도 반사경을 정밀하게 배열하여 23 미터 거리의 배에 불꽃이 일게 하는데 성공,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입증하였다.

아무튼 빛이 적을 진멸시킨다는 점은 신학적 의미, 특히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녔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죄의 바이러스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사탄도, 죄악도, 오염도 찌꺼기도 모두 소멸시키는 불이 된다(12:29). 하나님께서는 지난날의 고뇌와 방황도 소멸하시고, 지난날의 허물과 죄도 소멸하신다. 그는 이 땅의 불의도 소멸시고 불의한 권력도 소멸하신다.

 

빛의 갑옷을 입고

내 이름을 敬畏하는 너희에게는 公義로운(צְדָקָה, tsedaqah) 해가 떠올라서 治療하는 光線을 비추리니(카나프 kanaph 날개, 말단, ) 너희가 나가서 외양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4:2).

의로운 해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19:4-6)을 가리킨다. 의로운 해에서 발하는 치료하는 광선’(מַרְפֵּא,marpe)비추리니는 원어 상으로 그의 날개 안에서 치료하다’(with healing in its wings, KJV, NIV, LB, RSV)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날개가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상징한다는 점(32:11, 2:12, 91:4)에 비추어 의로운 해가 되신 그리스도의 치유의 은혜와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신 그의 구속 사역을 전달하고 있다. 빛은 또 다른 빛을 만들어 낸다. 영생의 구원을 입은 의인들은 하나님의 의 의를 반사하여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며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어둠이 덮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성품의 의를 반사한 결과 악인들이 재가 될 것이다. “너희가 惡人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4:3).

하나님의 백성은 빛의 자녀들이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빛의 자녀는 밤의 자녀가 아닌 낮의 자녀로 그들의 삶은 으로 특징져진다. 그들은 주의 파루시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빛의 자녀들은 어둠을 밝히는 반사경들이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옷을 입자”(13;12).

성도들은 여전히 악한 세대에 살고 있다(16:8). 그러나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이다. 진실을 위한 투쟁의 불꽃은 지금 온 세상의 껍질을 불태우고 있다. 지금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죄의 세력에 대한 전투적인 삶이다. 빛의 갑옷은 성도의 전투복이다. 성도들은 비록 어두움의 세상과 접하며 살지만, 성도의 실체는 낮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둠과의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한다. 빛의 갑옷을 입은 성도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것이므로 주의 강림으로 드러날 영광과 변화될 삶을 기대하며 살아간다(고후 3:18, 4:14).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