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저 여우에게 말하라”
“가서 저 여우에게 말하라”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누가복음 13:31-32)
늑대와 여우
필자는 어렸을 때 밤이 되면 으레 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공포 속에서 잠이 들 곤하였다. 밤은 어둠이 지배한다. 한국전쟁의 북새통에서는 밤은 재난과 죽음이 일어나는 시간대이었다. 그런대 어린 시절 여우 울음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한 번은 친구가 개를 데리고 뒷산에 갔다가 여우를 멀찌감치 보았다. 개가 좆아 가자 여우가 도망치다가 바위를 한 바퀴 삥 돌고서는 줄행랑을 쳤다. 개가 냄새를 따라 바위를 킁킁거리며 한 바퀴 도는 사이에 늦어져 여우를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서 영리하고, 나쁘게 말해서 교활한 여우의 꾀에 개가 넘어간 것이다.
전래동서양의 동화나 우화에는 인간의 형상이나 성질을 본 딴 동물들이 종종 등장한다. 어떤 남자를 두고 늑대, 어떤 여자를 여우같다고 한다. 어린 시절 여우와 까마귀 우화가 재미있었다. 까마귀가 치즈 한 덩어리를 훔쳤다. 나무 위에서 먹으려고 하는데, 지나가던 배고픈 여우가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까마귀는 거절했다. 그러자 여우는 까마귀를 칭찬한다. 용감하고 지혜롭고 검고 빛나는 깃털을 가졌지만, 다른 새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여우의 말을 들은 까마귀는 자기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입을 벌리자 입에 물었던 치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우는 냉큼 치즈를 낚아채고 말했다. "이게 허영의 대가야. 칭찬을 조심하라고." 이 이야기는 교활한 욕심쟁이 여우가 오히려 훈계하는 인상을 풍긴다.
살해 음모를 귀띔하는 바리새인들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십자가 처형 몇 달 전 AD 30/31 겨울쯤에 갈릴리와 페래아 지역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통치 지역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때에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헤롯 안티파스의 음모(陰謀)를 알려주면서 헤롯의 영역을 떠나라고 권고하고 있다.
바클레이는 바리새인들 유형을 재미있게 묘사하였다.
(1) 늘 선행을 과시하는 어께 바리새인
(2) 언제나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선행을 다음날로 미루어 기다리게 하는 바리새인
(3) 길에서 여자를 쳐다보지 않기 위하여 눈을 가리고 다니다가 무엇에 부딪쳐 상처 를 내든가 피 흘리는 바리새인
(4) 짐짓 겸손을 나타내고자 등을 굽히고 다니는 절구공이나 곱사등이 바리새인
(5) 매사에 언제나 선행을 계산하는 타산적인 바리새인.
(6) 하나님의 진노를 항시 두려워하는 겁쟁이 바리새인.
(7) 아브라함을 견본으로 삼아 믿음과 자비로 살아가고자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바 리새인.
바클레이는 나쁜 바리새인과 선한 바리새인의 비율은 6대 1이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권력과 결탁한 위선과 외식의 어용 종교가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일곱 번씩이나 ‘화있을 진저“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다(마 23장). 그들은 ”지옥의 자식들“이고 ’독사의 새끼들”이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어떤 유형이었는가? 전에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인들도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7:36, 11:37), 이 바리새인들을 두고 예수의 생명의 안전성을 염려하여 선의를 품고 헤롯의 살해 흉계를 귀띔해 주어 피신을 종용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에서는 본문의 바리새인을 내심 예수를 칭찬하고, 존경하는 좋은 바리새인들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헤롯 안티파스가 정욕의 노예가 되어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다. 그는 거의 1년 전 침례자 요한을 참수하고 의인을 죽인 양심의 고통 속에서 두려워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대 세 차례에 걸쳐 갈릴리 전역에서의 체계적인 선교 봉사 활동을 한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들에 대한 민중들의 관심은 지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헤롯은 예수를, 죽었다가 살아난 요한이라고 두려워하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가고 있는 현상을 두고 요한의 회생이 아닐까하여 정치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며 두려워하고 있었다(마 14;1-2). 심지어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를 만나고 싶은 호기심도 나타냈다(눅 23:8). 이는 그만큼 그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하여 무지하였다(DA 737)는 점을 반증한다. 그는 고매하고 하나님 닮은꼴인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떨었다(EW 172; SR 217). 이런 사실에 비추어 양심의 고투를 겪은 그였지만, 예수께서 이적을 보기 원하는 그의 호기심 충족이나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자 안티파스는 그를 협잡꾼으로 매도하였다(DA 731). 그는 급기야 폭도로 변하 민중들과 한 패거리로 전락하였다.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간 것이 바리새인들의 이면의 목적이 아니었을까하는 의구심을 불러온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 취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그물을 쳐 놓고 고기떼를 모는 식의 부정적인 동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여 베레아를 떠나 유대로 가기를 바랐다는 점은 분명하게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거의 2년 동안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요 11:47, 53, 54, 57; DA 213, 401). 최근에도 두 차례씩이나 예수를 돌로 치고자 했다(요 8:59; 10:31; 11:8).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에 대한 적극적인 악의를 가지고 헤롯과 합세하여 예수를 쫓아내려는 의도에서 정보를 제공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헤롯 안티파스 평가이다. 예수께서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로 부르신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당신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 한 헤롯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간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헤롯 가문에는 헤롯대왕처럼 잔혹한 유형을 원조로 하여 그 아들로 오늘의 본문에 헤롯 안티파스 (Herord Antipas) 같은 간교한 유형, 그 손자 헤롯 아그립파 1세 같은 아첨받기를 좋아하며 사도들을 박해한 유형(행 12:30)으로 얼룩져 있다. 헤롯 가문은 정치적 유형들로 꼴 지어진 가문이다. 오늘의 권력자들은 또 다른 헤롯 가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우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 간교하고 교활하여 랍비 문헌에서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나온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활동을 간교하게 훼방하는 왕이었다. 한편 여우는 사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짐승이었다. 쥐 같은 것이나 잡아먹는 동물이 여우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또 다른 의미는 그의 교활함과 간교함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며, 예수께서는 결코 그의 협박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으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여우가 세 가지의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첫째, 여우는 동물들 중에서 가장 간교한 짐승
둘째로, 여우는 동물 중에서 가장 해로운 짐승
세 째로 여우는 무가치하고 아무 쓸모없는 인간의 상징
안티파스가 당대에 로마의 봉신 왕이기는 하지만 국민의 생살여탈의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여간 용감한 자가 아니고는 이런 통치권자를 향하여 여우라고 비평적으로 매도하여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대 예수께서는 이 분봉왕을 두고 여우라고 비평한 것이다. 이 코멘트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눈에 보이는 간교한 정책을 펼치는 통치자가 궁극적인 통치자가 아니라는 점을 넌지시 드러내신 것이다. 권력자가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구사하여 또는 어용 언론을 동원, 이른바 “~ 빠”를 만들어 자기가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민의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권위를 지닌 것처럼 행세를 한다할지라도, 그 뒤에는 모든 것을 섭리의 손길로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계시어 역사를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선지자적 시각으로 이 세상 권력들을 보는 눈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재작년 헌법개정안에서 ‘자유’를 빼버린 교활성을 보았다.
레닌이나 모택동은 반신론자이며 폭력혁명 주창자인 마르크스의 제자들이다. 중국 몽을 추구하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 폐렴 바이러스 유입 원천을 막지 않고 온갖 말을 구사하여 동족을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로 내 몰고 있는 이 나라 권력 행태는 저 여우의 교활성을 비쳐주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의 화신이나 원리에 속하는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권력자들과 그것을 지지 옹호하는 자들은 자기파멸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제3일의 완전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이 말씀은 “갈릴리를 떠나라”고 한 바리새인들이 권고에 대한 예수님의 반향이다. ‘완전하여 지리라’(apoteleo)는 ‘이행하다,’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teleioo’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는 본문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첫째, 갈릴리를 즉시 떠나라는 헤롯의 경고를 받고 한 말인 만큼 문자적으로 보는 견해이다. 즉 오늘과 내일은 헤롯의 관할 구역 내에서 할 일이 있으니 안 되고 제3일에나 떠나겠다는 말이다(Bleek, Meyer, Bruce)는 시각이다. 이것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라고 한 예수의 말씀치고는 싱겁기 짝이 없게 들려 그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둘째, 예수의 공생애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말씀이라는 해석이다. 즉,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완료하신다는 것이다(Manson).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예수께서 오늘과 내일 즉 공생애 기간 중 내내 해왔던 일이고, 제3일에 완전하여지리라는 말씀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셋째, 만일 제삼일이 완전하게 되는 종말적 단어라면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남아 있는 미래요, 완전케 되는 제3일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신다(Chrysostom, Bengel, Farrar, Marshall, Gilmour). 다시 말하면 예수의 죽음[완전]은 헤롯 안디파스의 시간표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따라서만 정해진다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강하게 드러내신 것이다. 지금은 교활한 헤롯 안티파스나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치밀한 책략을 구사하여 예수의 목숨을 찾아도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수행해야 할 지상 과업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시간 즉 제3일에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로 모든 것을 이루고 완전케 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된다(히 2:10).위의 견해 중 세 번째 견해가 가장 성경적으로 비쳐진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 즉 하나님의 시간이 이르러 죽기 전까지 예수께서는 그의 지상 봉사를 수행해야 했다. 아무도, 비록 절대 권력을 가진 헤롯 안티파스라 할지라도 그 구속의 진행을 방해할 수 없다. 현실적인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선지자들처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다(눅 13:33). 갈릴리에서는 어누 누구도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었다. 여우는 어린양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 나라의 자유 민주주의는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사의 궤도처럼 오늘과 내일과 모레 동안 계속적으로 반드시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급기야는 제3일의 완성되는 방향으로 나아 갈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自由롭게 하려고 自由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헤겔이 말했듯이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확대의 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서 저 여우에게 말하라” -이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귀에 들려야 한다. 그리고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말이(아 2:15) 사랑하는 남녀 사이를 뛰어 넘어 살고 있는 포도원 같은 나라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 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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