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는 길
수난주일
진리와 참 빛의 도성 예루살렘에 악의 피바람이 불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살인과 배신의 도시로 전락되었다. 그 가운데서 믿는 자들은 모든 것이 혼란한 상황으로 빠져 들었다. 진리와 불의가 가장 치열하게 대립되던 한 주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대제사장들이 뒤를 봐주는 동전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고, 성전에서 내 쫓았다. 화요일까지만 해도 유대 종교적 귀족층들을 향해 날카롭게 질책하시었다. 목요일 저녁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내가 너희 선생으로서 이렇게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신 말씀하셨다. 그런 분이 폭도들에게 붙잡혀 밤새도록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받으셨다. 이른 아침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형이 확정되었다. 이른 아침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내 몰리셨다. 그리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까지 그 위에서 피를 흘리시다가 숨을 거두셨다. 모든 일들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죽음은 절망이다.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강은 건너갈 수는 있어도 건너올 수는 없다. 특히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 뭔가의 기대를 불러일으키신 분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진리의 화신으로 추앙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뭔가 대사를 이루실 것 같은 기대를 뒤로 하고 힘없이 십자가 위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을 때 그 분을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숨었다.
글로바 일행의 정체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클레오파스’이다 클레오파스는 클레오파트로스의 축약형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그 이름을 글로바로 음역했다. 이 두 사람은 ‘제자들’이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그분을 따르며 당신의 중요한 순간들을 직접 확인한 목격 증인이자,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듣고 체험한 이들이다.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요 19:25에 언급된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견해(Alford, Gilmour 등)
(2)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시몬의 아버지와 동일한 인물이자 예수의 삼촌이라는 설(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말, Origen, Zahn 등)
그러나 이들 가설들의 정확한 근거는 없다. 두 견해에 나오는 인물들이 동일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이거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가족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3) 따라서 동행한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아들보다는 아내일 확률이 높은 것은 가족의 구성상 남편과 아내가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실의와 낙담의 길
믿는 자들의 삶에도 꿈과 소망이 무너지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그들에게도 아침이 오지만, 밤도 온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는 절망과 희망이 늘 교차한다. 십자가 사건은 초기교회의 대 실망사건이었다. 1844년 대 재림신도들만 실망에 빠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지 신도들이 낙심 속에 허우적거리다가 부활의 놀라운 소망이 되는 빛과 하늘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 활동이라는 새 빛을 각각 만나 다시 일어섰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모두가 말씀의 조명에서 온 결과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진리와 불의가 혼화된 예루살렘을 등지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걷는 존재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뜨는 해를 바라보고 걷는 자이어야 하는데 이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고 걷고 있었다. 옛 이스라엘은 가나안 진입 직전 해 돋는 쪽 광야에 진을 쳤다(민 21:11). 그리스도인은 어두워오는 밤을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동터오는 새벽을 향해 나아간다.
황혼녘 지중해 쪽 하늘이 아름다운 낙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눈부신 낙조를 바라보면서 정신이 팔릴만한 여유도 없었다. 너무 슬퍼서 그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들은 한 낯선 나그네가 함께 다가 와 걷는데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슬픔과 실의와 낙담에 빠져 해지는 방향, 어둠이 몰아오는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 방향으로 25리(약 11km) 정도 되는 거리에 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60스타디온 거리이다. 1 스타디온이 약 185미터이니,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자기들의 주와 지도자로 신봉한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자 낙심, 그런데 그의 무덤이 비었다고도 하고 부활했다고도 하는 소식을 듣고 설명할 수 없는 난제에 봉착하였다. 사실 “그들은 매우 열렬한 신자들이었다.”(DA 795). 그러나 희망도 믿음도 없이 십자가 그늘 속을 걷고 있었다. 이제 정말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집으로 가고 있었다.”(DA 795).
다른 한편 이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 마을로 간다는 것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기에 그들 속마음 한 쪽에는 예전의 생업 터전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심정도 일어남직도 하다.
예수님을 메시아라 여기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최후는 그들의 모든 희망을 앗아 간 참혹한 사건이었고, 앞으로 어떠한 기대나 계획조차 세울 수 없는 무력감과 허탈감을 안긴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낯선 동행자
이 피곤한 발걸음을 옮기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낯선 동행자로 가까이 오셔서 함께 걸으셨다.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가장 어렵고 괴로운 순간에도 함께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글로바 일행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라고 전하지만(16:12), 누가는 이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다고 밝힌다(16절). 눈이 가려진 것을 두고 화잇 여사는 몹시 울적하고 깊은 좌절감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DA 795). 그들은 슬픔에 잠겨 울면서 걷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자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어떠한 충격적인 사건에 놓이게 되면 다른 것들은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크나큰 슬픔이나 상실감에 빠지면 이러한 모습은 더욱 심해진다.
그들 눈에는 십자가 처형이 참담한 실패로 보인다. 예수의 종교는 풍지 박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절망의 골짜기를 승리의 순간으로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예수께서 무덤을 터뜨리고 부활하신 구속사의 대 사건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부활의 약속을 신뢰하는 신앙도 빅나가 있었다. 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들은 신앙의 근본 뿌리가 된다. 그런데 그 뿌리가 약했다. 교회는 출석하여 왔지만 신앙관, 인생관, 역사관이 확고부동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수를 따라다니며 지냈던 일들이 모두 허깨비가 되고 만다. 그러나 허깨비 신앙을 지닌 자들을 찾아오신 분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1. 질문과 대답1
예수께서는 실의에 빠져 걷고 있는 그들에게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물으신다”(19 절).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사건 이해에 대한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바로 잡아주기 위해 그들의 이해 수준을 직접 듣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의 질문 의도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해명(解明)하기 위한 문제 제기였다. 믿음을 올바로 잡아주고자 찾아오신다. 글로바는 대답 대신 반문한다. 낯선자의 질문을 받고 오히려 두 제자 측은 최근 빅뉴스도 모르느냐는 식이다. 질문자를 책망하는 듯한 음조이다.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예수의 질문에 대한 글로바(Cleopas)의 대답은 핀잔 섞인 어투로 시작되고 있다.
글로바는 부활한 예수를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자신들과 같은 나그네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같은 곳에 머물렀으면서도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왜 혼자만 모르느냐는 반문(反問)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에 관한 사건이 예루살렘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큰 사건이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근일(近日)’은 여러 날 동안 예루살렘 안에 머물렀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유월절 축제에 참여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현재 사건에 압도되어 그들 눈이 기려져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구약 성경이 그토록 많은 예언을 하였는데 예수님의 본질을 알지 못한 것이다. 메시아의 죽으심 예언을 잘 모르고 있었다.
2. 질문과 응답2
예수께서 재차 물으신다. “무슨 일이냐?”(1) 나사렛 예수의 일 때문이다. 당시 예수님을 멸시하기 위해 표현할 때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는 응답 속에 그들의 신앙관이 함축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를 ‘능력있는 선지자’(프로페테스 뒤나토스)로 말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견해는 당시 일반 대중들의 의견과도 일치되는 보편적인 견해였다(9:19). 그들 두 사람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로 보인 것은 그의 말과 행동에 권능(權能)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민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2) 당대 불의한 정치와 종교의 지도층인 권력층이 선지자를 죽였다. “우리 대제사장과 관원들이 …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20절). 여기에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예수를 처형한 책임이 전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누가의 의도와 일치된다.
(3)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21절), 즉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들의 이 표현에는 예수에게 걸었던 기대가 배어있다. 그들은 예수가 악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예수가 선언하였던 것처럼 하늘나라(The Kingdom of God)가 이루어지기를(막 1:150 기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된 다른 세계를 기대하며 예수를 따랐다. 그들이 17절에 언급된 바처럼 얼굴에 슬픈 빛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걸었던 기대가 예수의 사형으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3)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이 대답 속에는 그들의 실망이 담겨있다. 또한 예수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났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를 죽였던 그들이 여전히 세상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점이 풍기는 대답이다. 반면에 이러한 그들의 대답 어투 속에는 어렴풋하게나마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점도 풍긴다. 즉 그들은 예수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적어도 사흘 째 되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사흘 째까지 희망을 갖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희망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하소연하고 있다.
(4)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의 보고”(22절)
여기서 글로바 일행은 ‘우리들 중’이라는 말로써 그 여인들과 자기들의 관계를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10절에서 언급된 여인들과 동향(同鄕), 즉 갈릴리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친분이 있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우리’라는 의미로 볼 때 열두 제자들 외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어느 정도 고정된 숫자를 유지하며 공동의식(共同意識)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23절). 그들을 놀라게 하고 ‘경악케 한’ 일은 24:1-8절에 언급된 내용이었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나고 그 천사로부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믿어지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11절 주석 참조).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24절). 본문의 ‘두어 사람’(some of our companions, NIV)은 요 20:3-8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여기서의 화자(話者)가 열 두 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우리들 중’이란 9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열 한 사도와 그 외의 사람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2절에 언급된 베드로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무덤을 찾아 갔으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은 12절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진술을 통해 예수의 무덤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자들만의 증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재확인 증언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빈 무덤 사건을 점한 이들의 관심은 부활 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같은 부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안목(眼目)이나 믿음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예고했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9:22, 18:32,33) 예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했다는 결론을 얻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빈 무덤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더디 믿는 제자들
1. 책망
이들 두 사람의 대답을 들으신 후 예수께서는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신다(25절). 예수의 책망은 ‘오’라는 감탄사로 시작되면서 자신의 감정이 강하게 주입된다. 첫 마디는 ‘미련하다’(How foolish you are!, NIV)라는 책망인데 그들의 생각이 ‘바보스럽고 무지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진술했던 두 사람의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선언한 셈이 된다. 두 번째는 선지자의 말을 ‘더디게’(브라데이스) 신뢰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는데 그들이 신뢰하는 선지자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생전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 성취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왔지만(18:31, 22:37 주석 참조),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구약 시대의 예언까지 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음을 탄식(歎息)하신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사건을 접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의 활동이 끝장나고 그 추종자들에게 실망과 절망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꾸짖는 것이다. 즉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예수가 활동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30,31절).
2. 구약성경 예언 설명
(1) 고난 선행-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26절). 이제까지 유대인들의 생각해 왔던 그리스도에 대한 고정 관념을 앞 절에서 일축(一蹴)한 후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반문 형식으로 설명한다. 특히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반문의 대답은 그 자명성을 전제로 한 질문이다. 27절의 장면처럼 구약성경에 그 답이 분명하게 제시되었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시 22:6-8, 18, 27:12, 41:9, 사 50:6, 53:3-9, 슥 11:13).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관심하지 않고 영광만을 생각하는 오류(誤謬)를 범하였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만 참여하려는 그릇된 선입관념에 기초한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영광 이전에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2)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반드시 겪고 나서 얻게 되는 영광은 칭송받고 높임을 받는 인자(人子)의 영광이다(9:26, 21:27, 빌 2:5-11, 딤전 3:16, 벧전 1:11,21). 약한 사람들로부터 힘없이 처형당해 죽었지만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받게 된다는 암시이다.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절)-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가 고난 받아야 하는 필연성에 관련된 예언들을 하나하나 인용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용된 자료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이라고 누가는 밝히고 있다. 여기서 ‘모세의 글’이란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이고 ‘선지자의 글’이란 ‘예언서’를 지칭한다. 그리고 ‘모든 성경’은 그 율법과 예언서 외의 구약성경 일반을 가리킨다 하겠다.
유숙 간청과 부활의 주 만남
우리는 지금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두 제자와 같다. 예수에 대한 희망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다시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나타난 예수를 말해야 한다.
(1)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28절). 엠마오가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왜냐하면 그들은 갈릴리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8절 주석 참조). 그들이 도착하려고 했던 장소에 거의 다 왔음을 말하고 있다. ‘가까이 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기조’는 ‘도착 했다’와 ‘거의 다달았다’의 두 가지 뜻을 포함한다. 이처럼 도착 시간에 대한 언급은 출발 시각처럼 자세히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29절의 내용을 보면 날이 거의 저물고 있는 때임을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요일 즉 안식 후 첫날이 거의 끝나는 시각쯤인 것으로 추정된다.
(2)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13절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의 목적지 엠마오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머물고자 하였을 것이고 예수는 목적지가 엠마오가 아니어서 더 걸어가려 했을 것이라는 이해는 쉽게 가능하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가 계속 길을 가려고 했다는데 있기 보다는 29절에 나오는 내용, 즉 예수가 그들 두 사람과 함께 머물게 된 동기가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데 있다. 본래 예수는 엠마오에서 유숙(留宿)하려는 계획이 없었음을 암시하여 두 사람의 강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3) 저희가 강권하여 … 유하사이다(29절)- ‘강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비아조마이’은 ‘압력을 넣어 강제로 하게 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이나 여기서는 절박한 간청(懇請)으로 봄이 적절하다. 예수가 글로바의 일행과 엠마오에서 머물게 된 동기는 그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임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권이 있었다’는 것은 사양하는 말도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들이 이와 같이 예수를 붙잡고 머물기를 간청한 이유는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여행이 어렵다는 점뿐만 아니라 길을 함께 걸어오면서 나눈 대화 속에서 그들은 어떤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고(32절)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겨났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유숙하면서 더 많은 가르침을 듣고자 하여 예수를 강권하였을 것이다.
(4)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30절)- 저녁 식사 때인 것으로 보이는데 앞절에서 날이 저물고 기울었다는 언급이 있었다는 점을 보아 점심 식사라는 주장은(Bornhauser) 적절하지 못하다. 이 저녁 식사는 글로바 일행이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집인지 아니면 여관이나 민박하는 집에서 만찬을 베푼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여관이나 민박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 저녁 식사는 일상적인 평범한 식사이었음에 틀림없다.(5)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 주시매“- 이 같은 식사 장면은 오병 이어의 기적(9:10-17)과 유월절 식사를 연상케 한다(22:14). 글로바 일행은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열두 제자들과 예수가 함께한 만찬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식사를 주제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들판에서 오병 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던 그 때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31절에서와 같이 이 두 사람이 예수를 알아보게 된 요인(要因) 중의 하나가 이 식사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뜨거운 믿음 회복
1. 밝아진 눈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31절)- 글로바 일행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16절). 예수와의 저녁 만찬 도중 눈이 열려지게 되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다. 개역 성경에서 ‘밝아졌다’(their eyes were opened, NIV)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디에노이크데산’(디아노이고)의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이 타자(他者)에게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은 앞 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떡을 떼어 주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알지 못하는 신비적 능력이 작용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 모두가 하나님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I. H. Marshall). 이와 같이 글로바 일행이 부활한 예수를 낯선 여행자로 보지 않고 생전의 예수의 모습으로 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 식사 이전까지는 예수가 낯선 타인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훌륭한 선생으로도 생각하였을 것이다(29절 참조). 이는 이제까지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해했던 바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제 떡 곧 예수의 몸을 진정으로 나눔으로써 그들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떡을 떼는 만찬(晩餐)을 친교하고 할 수 있다면 친교 속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2) 갑자기 눈이 열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32절에서 그들이 고백하는 바와 같이 길을 걸으면서 그의 가르침을 들을 때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낯선 길손을 애써 대접하려고 했다는 것이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게 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마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한 동인(動因)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여기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서 당신에 관해 언급되는 기록들을 통해서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해 주셨을 때 모든 의문이 풀렸다. 2. 시공을 초월하신 예수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이 단계에서 예수께서는 사라지셨다.
(1) 부활한 예수는 시.공(時空)에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도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었다. 부활한 예수는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으로 만나되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로 만나게 된다.
(2) 우리가 예수를 만날 때 고유한 일정한 모습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모양으로 만난다는 점이다. 글로바 일행이 경험한 바처럼 낯선 길손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 있고(창 18:1-15) 헐벗고 굶주린 이웃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도 있다(마 25:31-46). 따라서 이제 예수와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의 구분없이 무한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초월적 사건인 동시에 어느 대상에 국한됨이 없이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경험되고 찾을 수 있는 내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3. 마음을 뜨겁게 하는 연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24:32). 말씀이 속에서 타오르는 놀라운 체험을 겪은 두 제자는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확신에 차서 실의에 빠진 동료들을 일으키고자 위로와 평안, 기쁨이 되는 말씀을 지니고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이젠 흑암도 무섭지 않았다.
32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카이오 kaio-불켜다, 불타다, 불태우다.) 아니하더냐. 낯선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예수는 사라지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가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해’ 주었을 때(27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카이오)는 것을 회상한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적인 충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으로부터의 어떤 이끌림을 감지하고 감격적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는 초월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이다. 27절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설명하다’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텍스트를 향해 가까이 찌르다’라는 뜻이다. 즉 말씀의 내용을 피상적으로 알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나하나 찌르듯이 이해하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말씀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느 면 말씀과 친숙한 제자들이었다. 문제는 말씀이 그들의 가슴에 꽂히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를 만나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주의 말씀을 탐구하는 일에서 일어났다. 한편 이와 같은 체험은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했음을 ‘우리 속에’라는 말로 확인된다. 말씀을 듣고 체험하는 뜨거움은 신앙의 활력이 된다.
할 일이 남아 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수살렘에 돌아가”(24:33).
두 제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예루살렘으로 부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겼다. 말씀이 타오르는 마음에는 할 일이 있다. 두 사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놀라운 체험을 한 순간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이 그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 시각에 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밤이 깊어감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이 같은 즉각적인 행동은 회개하는 자세의 모범이 되기도 하고 성령받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참된 회개는 깨닫는 즉시 돌이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말씀으로 전격적인 변혁을 체험한 그들은 발길을 달려 예루살렘으로 달린다. 피곤도 잊었다. 배고픈 것도 잊었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으나 그들에겐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부활하신 의의 태양이 그들을 엄호하시면서 동행하고 계셨다.
혼란과 좌절 속에 신음하는 세상에서 말씀으로 그 혼란, 그 좌절, 그 신음의 이유를 풀어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는 낯선 동행자를 부르고 있다. 하나님은 소망의 메신저를 찾고 있다.
맺는 말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은 두 제자들이 처음에 가지게 된 것처럼 단순히 비참하고 참혹한 죽음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만인을 위한 속죄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다.
예언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샛별 되신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심오한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힘이 된다. 말씀이 의미 없는 단순한 소리가 아닌, 나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이 되고, 마음을 타오르게 하고 생명의 힘을 주는 말씀이 된다.
어둠이 깊을수록 작은 빛도 훨씬 더 크게 빛나는 것처럼, 상실감과 절망감이 컸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한 줄기 빛을 넘어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신앙의 기초는 말씀이다.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터득하는 날 환희를 체험한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 진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간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오로지 말씀뿐이다.
오늘 우리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이 능력과 소망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삶에 지치고 낙심한 우리 마음 안에 주님께서 주시는 이 부활의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삶에 지친 우리의 심신에 부활의 능력을 덧입는 것은 우리의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부활의 능력은 말씀을 들을 때 회복된다. 초기 교회가 선교의 기적을 일으킨 것은 이 능력에 토대를 둔 믿음으로 마음이 뜨거워져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만나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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