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71
들어가는 말
오늘 같은 자유분방한 사회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한 평생을 사랑과 신뢰를 지키며 산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평생토록 가정을 지키며 신뢰를 지키며 사는 일은 보석과도 같이 번쩍인다. 신뢰! 이 말은 사람을 살리는 단어이다.
한 사람(Andrew)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극심한 갈증으로 탈수증에 걸렸다. 안간힘을 다하여 여기 저기 찾아보았다. 저 멀리 오두막 같은 것이 보였다. 사막의 신기루가 아닌가하면서도 가까이 가 보았다. 신기루가 아닌 진짜 오두막이었다. 정신없이 물을 찾았다. 한쪽 코너에 물병이 있었다. 그런대 그 물병에는 종이쪽지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 쪽지에는 이 물을 마시지 말고 펌프에 넣고 물을 퍼 올린 후 반드시 이 병에 물을 채워 농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여행자는 쪽지의 메시지를 믿어야 할지 망설였다. 펌프는 제대로 작동할까? 등등 여러 생각이 떠 올랐으나 그는 쪽지를 신뢰하고 마중물로 사용하여 펌프질을 하였다. 신선한 물이 쾰 콸 쏟아져 나왔다. 그 병 옆에 연필과 근처 마을로 향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약도가 있었다. 그렇다. Have Faith. It Works.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감지된다.
I. 요한복음 6장의 콘택스트
A. 5000명 먹이신 사건과 기대감
요 5장과 6장은 이적으로 시작한다. 6장은 갈릴리 호수가 가까운 벳세다 언덕에서 5000명을 먹이신 사건과 물위로 걸으신 사건으로 이어진다(6:16-21). 이른바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장이라는 요한복음 6장에는 비극적 분위가 감도는 예수의 강론 장이다. 대중은 그리스도의 정체를 단지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는 정도다(6:14). 대중은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원하여 그를 왕으로 삼고자 했다(6:15).
B. 가버나움 강론 사건 여파
요 6장에는 대중의 불신과 대결하는 장면이 짙게 깔려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가버나움으로 보냈다. 대중은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다음날 예수께서는 대중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따르고 있다고 하는 물질주의적, 이기적 추종을 질책하셨다(6;26). 6:30-40에는 생명의 떡에 관한 강론이 이어진다. 대중은 이 생명의 떡 설교를 들으면서 떠나간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다른 세 복음서인 공관복음과 다른 점은) The "I AM(ego eimi)" Saying.이라는 말씀이 자주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등은 “나는 나다‘는 출 3:1-20에 나오는 히브리 표현의 헬라어적 표현이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인성보다는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신, 태초부터 게신 신성에 역점을 둔 표현이다.
C. 전환점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의 설교가 6:52-59에 이어지는 생명의 떡이 되는 자신의 희생 곧 죽음이라는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셔야 하는 영적 생명(DA 660)으로 이어지자 대중은 썰물 때처럼 빠져나간다. 회당엔 소수 제자들만 덩그렁 남았다. 제자들은 한 때 높은 산꼭대기에 오른 듯 하는 흥분과 희망을 품게 되었다가 이제 급전직하 시련과 걱정의 골짜기로 추락하는 이중주를 겪고 있는 심정이었다.
D. 상황의 돌변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불신, 배척, 대결이라는 적대현상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이어진다. 가버나움 회당의 대중들이 배신의 길을 택하였다.
1. 대중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오해와 증오가 넘쳤다.
2.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의 길로 몰렸다.
II. 추종자들의 세 가지 유형
변절하여 떠나가는 대중, 배신하는 가롯 유다, 베드로 고백에 따라 충성하는 제자들이라는 세 유형을 보여 준다.
A. 변절하여 떠나가는 대중
1. 대중이 예수께 몰려든 상황
민중의 마음은 늘 변한다. 따라서 대중에 대한 여론조사는 늘 변한다. 현실 정치가들은 이 여론조사에 신경을 쓰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죽 끓 듯 하는 대중에 연연하지 않으셨다. 강론 하는 곳에 민물처럼 몰려왔다가 순식간에 등을 돌려 떠나는 대중은 늘 근시적이다.
(1) 대중이 그의 이적을 보고 그를 믿었다(2:23)
(2) 대중이 제자들에게 침례 받으려고 쇄도하는 것이 요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4:1).
(3) 사마리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4:39)
(4) 갈릴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4:45).
(5) 갈릴리에서 바로 전날까지 무리가 그를 따랐다.
2. 변절하여 떠나는 대중
대중이란 민물을 타고 왔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썰물처럼 떠나는 무리들이다.
대중이 예수께 등을 돌렸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를 떠났다.
(1) 신앙생활에 따라오는 고난을 싫어한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요 6:53)한다는 메시지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 대중들 중에는 예수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파멸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그들은 만사가 잘 되어 갈 때는 그 분을 따랐다. 떠나가는 자들은 예수의 인기가 고조되어 갈 때 충성하였다. 신앙생활에 따르는 고난과 시련이 몰려올 때 그들은 떠났다. 그들은 상록수가 아닌 낙엽수 신앙을 하던 사람들이다.
(2) 이기적 동기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도전과 명령을 회피하고자 떠난 이기주의적인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 동기로 따랐다. 그들은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은 놀라운 이적을 보고 예수를 따랐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분에게 무엇을 드려야 할 때가 되니 그들은 꽁무니를 뺐다. 그들은 낭만적이고 매력적일 때는 그 분을 따랐으나 따르는 길에 시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등을 돌린 것이다.
(3) 예수의 가르치심에 순종하기가 어려웠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요 6:60)
얼마 전 떡을 먹은 자들이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을 강론할 때 어렵다고 불평했다. 사실상 순종하기가 어려운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그것이 어려운 문제란 뜻이다. 십자가의 가르침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희생의 제물이 되는 십자가를 앞두고 결단을 해야 한다.
B. 변절한 제자/배신의 아이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0-71)
본문에서 타락의 태도를 보인 극치는 가롯 유다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를 따랐다. 그러나 그는 장차 신앙의 큰 인물 곧 성자가 될 가능성을 팽개쳤다. 그는 수치와 배신의 아이콘으로 전락해 버렸다.
“유다는 처음으로 떡덩이의 이적으로 일어난 군중들의 열광적인 흥분을 이용하려 하였다. 유다는 강제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희망이 몹시 컸기에 그의 실망 역시 그만큼 쓰라렸다.
한 회당에서 하신 생명의 떡에 관한 그리스도의 강론은 유다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유다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세속적 유익보다 오히려 영적 유익을 제공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스스로 선견지명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명예도 갖지 못할 것이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높은 지위도 주지 못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였다. 유다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너무 가까이 밀착되지 않게 해서 원할 때는 언제든지 떨어져 나올 수 있게 하기로 결심하였다.”(DA 718-719)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린 한 화가가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그 그림을 그리는데 여러 해가 걸렸다. 이 화가는 예수의 모델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뛰어나고 순결한 용모를 지닌 한 젊은이를 만났다. 그래서 그를 예수의 모델로 그렸다. 드디어 마지막 까지 남겨 둔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아 나섰다. 화가는 도시의 빈민굴을 뒤졌고 사악한 무리들을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너무나도 타락하고 사악한 얼굴을 지닌 사람을 찾아 내 그를 유다의 모델로 그렸다. 모델 그림을 다 그렸을 때 그 모델이 된 사람은 ‘당신이 여러 해 전 나를 그린 일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화가는 ‘천만에 그럴 리가 없는 데요’라고 응답했다. 그 모델은 다시 말하기를 ‘당신은 전에 나를 그리스도의 모델로 그렸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그 모델은 처음 지녔던 순결한 모습이 세월이 주는 죄악에 감염되어 무서운 타락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위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세월의 잔인성이란 바로 이런 일이다. 세월은 우리의 젊은 날의 꿈, 헌신, 충성심을 모두 빼앗아 갈 수 있다. 세월이 점점 나를 시들게 하며 축소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를 더 아름답게 성장시키고 있는가?
재림교회 역사를 통하여 여러 배도와 변절자들이 있어 왔다.
끝 날에 우리 교회를 배반하고 나갈 < 오메가 > 배도에 대해서 화잇은 예언을 하였다(1SM 247,248, 251). 이 메시지는 알파 배도를 전제로 한 메시지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알파는 처음에 일어나는 켈록 배교다. 오메가는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배도이다. 켈록은 화잇의 예언의신과 기타 본 교회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범신론을 도입하고 하늘 성소를 부인하며, 위생 병원 기타 우리 기관을 탈취하려고 세력을 구축하여 따르는 무리의 수는 점점 커져서 마치 이 교회를 압도하는 듯이 보였다. 그는 별처럼 빛난 분이었으나 결국 별똥별로 사라졌다.
재림교회 역사상 배도와 변절자들에는 몇 유형이 있다. 교리적 변절자들(메신저 파, 모시스 헐, D. 캔라이트, 거룩한 육체운동, 발렌저 집단, 로웬 부인, 목자의 지팡이, 로버트 브린스미드, 미래주의 해석 도입 파, 시기파 등등)과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바로잡은 교정된 진리를 배척하는 자(완전주의, 1888 Movement, 삼위일체 배척자들, 앤드리어슨 추종자들, 존스와 웨고너 후기 사상 추종자들)이 있었고 앞으로 미래의 오메가 배도자들이 있을 것이다. 오메가 배도란 최후적 흔들림을 통하여 선명하게 들어날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이 같은 배도와 변절하는 일들이 재림교회에 종말론적으로 반복할 것을 지적하였다. 이 반복 개념은 문자적 반복보다는 종말론적인 배도의 전형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 최후적 흔들림을 예견하여 그에 대비하도록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각 사람의 영적 토대를 극한까지 비틀어 시험할 폭풍이 몰아쳐 오고 있다. 그러므로 모래 바닥을 피하라. 반석을 붙잡으라. 깊이 파 내려가라. 그대의 토대를 확고히 하라. 건축하라 오, 영원을 위하여 건축하라. 눈물과 마음을 다한 기도로 건축하라.(5T 129).
배도의 원인은 외적 박해, 내적 거짓 이론 발호, 및 세속화 조류에 감염되는 일 등이다.
C. 베드로 고백에 따라 충성하는 제자
1. 열두 제자들에게 결심 촉구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6-69)
2. 예수께서 하신 “너희도 가려느냐” 질문 의도
“너희도 가려느냐”는 말씀은 헬라어로 Μὴ καὶ ὑμεῖς θέλετε ὑπάγειν;로 나온다. 헬라어에서 통상적으로 주어 대명사 없이도 문장이 되기 때문에 동사만 가지고도 의사전달이 된다. “가려느냐”의 ‘가다 ὑπάγω’(휘파고 hupago-)는 ‘떠나가다,’ 또는 ‘가다’ 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동사 변화 자체가 주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너희’라는 대명사 주어를 사용하셨다. 이런 용법은 강조 용법이다. 더구나 θέλω(바라다, 하고자 하다, 기뻐하다)를 사용하시어 말씀하시므로 의도적으로 떠나겠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문장 맨 앞에 부정어 Μὴ(아니, 하지 않도록)를 사용하여 ‘너희는 떠나지 않겠지’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Meyer는 이 질문을 두고 부정적 대답 “Ye cannot wish, can you?"을 기대하신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참고: Vincent's Word Studies - The interrogative particle μὴ shows that a negative answer is expected. Surely ye will not. Will ye go is not the future tense of the verb to go, but is expressed by two words, do ye will (θέλετε), to go away (ὑπάγειν). Rev., would ye. On the verb to go away, see on they went (John 6:21).
3. 베드로의 응답 -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그리스도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이에서 나온 대화이다.
고백 내용 초점은 “영생의 말씀”과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에 있다.
a.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 서기관인가? 바리새인인가? 철학자들인가? 석가인가?
우리가 갈 방향은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뿐이다. 그리스도를 떠나는 길은 어 둠의 길, 슬픔의 길, 바보스런 길이다.
b. 영생의 말씀 - 생명의 말씀(행 5;20) -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복음은 믿는 자에게 생명 을 공급 시여한다. 영광스러운 생명, 선악과에서 상실한 그 생명에 관한 완전한 지식과 거 룩함, 죄인을 소생시키는 생명
c.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요한복음에 나오는 오늘의 장면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한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으로 그 정점을 이룬다(막 8:27; 마 16:1; 눅 9:18).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상록수 신앙의 비결은 바로 이 영생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베드로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그리스도의 강론을 듣고 그도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가롯 유다처럼 배신의 아이콘의 길을 걷지 않았다.
체험적이고 살아있는 지식은 영생으로 인도한다. 지식만으로는 구원이 없지만, 지식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롬 10:13~15). 여기서 구원하는 지식은 거짓 신들과 대조되는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고 정의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유대인들은 이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체험적 지식이 결여되어 었다.
“영생(ἡ αἰώνιος ζωὴ )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요 17:3).
요한복음 6장에 “영생”이라는 말이 6회, “생명”이라는 단어가 6회 나온다. 그 모두에 ‘조에( ζωὴ)’ 라는 헬렁로 나온다.
‘조에(ζωή)의 안티테제는 타나토스(θάνατος) 곧 완전한 죽음이다(cf. 롬 8:38; 고후 5:4; 렘 8:3; 전 30:17; 플라톤의 Legg. xii. 944 c). 즉, ζωή는 죽음과 반대되는 생명 내지 존재, 보다 완전한, 보다 근원적인, 보다 영원한 생명의 호흡과 연결되어 있는 생명이다. 그러나 ’bios(βίος)‘는 생물학적 생명이다. 생물학(biology)는 (βίος + λόγος)의 합성어인 βιολογία 이다. 비오스는 삶의 방식이나 생활방식, 생명이 유지되는 어떤 수단이기에, 삶이 소비되는 방식을 표명하는 용어다.
성경은 영생/생명을 주기 위한 책이다.
남은 제자들은 영적 생명을 지닌 백성들이다.
육신의 생명은 있으나 영적 생명은 죽은 자들이 있다.
영생은 질적 생명으로 하나님과 친교(교제)하며 하나가 된 생명이다.
영적 생명은 죄 용서를 받아 죄책이 제거된 생명이다.
영적 생명은 의, 평화, 기쁨의 생명이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의와 평 화와 기쁨이 있는 생명이다. 영적 생명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선언된 생명이다.
영적 생명은 성령 안에서의 생명이다. 성령 안에서의 생명은 더욱 풍요한 생명이다.
영적 생명은 다윗이 말한 것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을 하는 생명이다.
영적 생명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벅찬 영광으로 충만한 생명이다.
요 6:40에 나오는 ‘영생’에서 ‘조에’는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리리라”로 하여 문자 그대로 영생이다.
III. 결론- 호소
1. 너희도 가려느냐?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 제자들에게 헌신의 응답을 요청하신 그리스도의 간곡한 메시지다.
그리스도교란 우리가 받아드려야 할 철학적 이론이 아니다.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에 향한 개인적 관계, 마음의 응답이다. 그것은 거룩하신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마음의 충성과 사람이다.
하나님 백성들은 변절과 배도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가장 크게 모독을 당하고, 그분의 율법이 가장 크게 멸시를 받을 바로 그 때 우리의 열성은 가장 뜨겁고 우리의 용기와 확고함은 가장 불굴의 것이 되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를 버릴 때 진리와 의를 옹호하여 굳게 서고, 투사가 적을 때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것 이것이 우리의 시험이 될 것이다. 이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냉(冷)에서 열(熱)을, 그들의 비겁에서 용기를, 그들의 반역에서 충성을 취해야 한다(At this time we must gather warmth from coldness of others, courage from their cowardice, and loyalty from their tr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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