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성경영감에 대한 역사적 개요
재림교회 성경영감에 대한 역사적 개요
책의 백성 재림교회는 성경연구를 통하여 요한계시록 14:6-12의 영원한 복음에 대한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부름 받은 종말론적 남은 백성이다. 재림교회 초기 선구자들은 성경이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규범으로 보았고 성경에 대한 강한 신뢰도를 지녔다. 재림교회 신도들은 책의 백성이다. 그러나 재림교회 안에서 성경 영감론에 대한 이해가 엇갈리기도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축자영감론 사상이 교단 선구자들 사회에 풍미였다. 때로는 완전영감(plenary inspiration)을 축자영감론으로 보는 언어의 혼란도 있어왔다.
A. 밀러 운동의 유산
12년 동안(1803-1816) 이신론자였던 Wm. Miller가 성경을 2년 동안(1816-1818) 집중적으로 연구한 후, 이전에 지녔던 모순투성이의 성경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그는 이제 성경의 명료성, 권위성, 일관성 등을 확신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인간에게 주신 것으로 신봉하였다. 성경에 난점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번역의 과정을 통하여 오는 현상에 불과하였다. 밀러의 성경을 높이 치켜세운 입장은 재림교회의 초기 선구자들의 신앙 유산이 되었다.
B. 초기(1844-1883년) 견해
이 기간 동안 안식일 준수 재림 메시지의 선구자들은 계시 영감관의 진상을 탐구하기 보다는 밀러의 성경관과 그 궤를 같이하여 원론적인 입장에서 성경관을 완전한 계시로 천명하였다. 제임스 화잇은 1847년 A Word to the "little Flock"에서 “성경은 완전하고, 완비된 계시(a perfect and complete revelation)"이며 ”우리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천명하였다. Moses Hull은 무신론에 대한 변박과 성경이 모순된다는 자유주의적 성서관에 대항하여 변증적으로, 성경의 권위성, 완전성, 및 신뢰성을 옹호하였다. F. L. Gaussen의 영향을 받아 성경은 무류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글들이 나타났다.
1. James White: 성경은 완전한 계시로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규범이다.
2. 1872년 기본신조 제 3조: Uriah Smith가 기본신조에 관한 초안을 마련하였다. 즉,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계시를 포함하고 있으며 신앙과 실천의 오직 무류한 규범“이 된다.
3. 1867년 RH는 당대 무신론자들이 모순되거나 불일치하게 보인다는 22개의 성구에 대한 일련의 변증적 해설을 게재하였다.
4. A. T. Jones는 1880년 Review지에 Paine의 ‘이성의 시대’에 대한 평가를 하며 성경을 옹호하였다.
5. 이 시대에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무신론자들의 비판을 의식하여 무오하고 무류한 성경관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계시-영감의 본성에 관한 신학적 논쟁 같은 현상은 없었다. 엘렌 화잇의 계시-영감성을 옹호하는 기류가 강하였다.
C. 1883-1915 영감 본질 논의 시대
이 기간 동안 논의 초점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성경을 영감성에 따라 상하 계층 구분을 하는 등급(degree)을 매길 수 있는가 하는 이슈와, 다음으로 성령께서 영감된 저술들의 단어들을 축어적으로 구수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런 논의 주로 엘렌 화잇의 영감성과 계시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1. 영감의 등급론 문제
(1) Uriah Smith: 교회 행정문제와 개성문제로 엘렌 화잇의 견책을 받은 이후 스미스는 1883년 3월 22일 자로 D.M. Canright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저작을 영감된 것과 비 영감된 것 둘로 나누었다.
a. Visions--영감적인 것.
b. Testimonies--비 영감적인 것.
(2) George Butler: 1884년 1월부터 6월에 이르기까지 Review and Herald 지에 기고한 일련의 글에서 영감 등급론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성경에 인간적인 요소가 있듯이 엘렌 화잇의 글에도 인간적인 요소가 있어 완전하지 않다고 보았다. 재림교회의 공식적인 간행물에 이런 등급론이 게제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계시-영감의 등급론에 기초하여 성경에 대한 피라미드 계층 구조론을 펼쳤다.
최상급--모세의 책들, 그리스도의 말씀들
제2급--예언자의 글들, 사도들의 글들, 시편 일부
제3급--역대서
제4급--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성경에 영감 안 된 부분 사례들("Inspiration," RH 1884. 6. 4.)
롬 15:24 스페인 선교여행 계획
고전 1:16 스데바나 집 사람들에게 시침
고전 4:19 주께서 허락하시면 여행할 것
고전 7:7-40 독신 권고, 혼인 문제
고전 16:5-9 마게도냐 여행과 과동 계획
고후 11:21 약하다는 고백
빌 2:19-23 디모데 파송
딤후 4:9-16 현재적 배신 상황과 물건 지참 당부
이러한 영감 등급론 및 비영감적인 부분 혼재론은 당대 개신교 신학의 영향으로 보인다. 1880년대 이 영감 등급론은 재림교회 내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3) 엘렌 화잇의 영감등급론 대응
엘렌 화잇은 주께서 Butler 등이 RH 지에 기고한 글들에 대하여 영감을 주지 않았고, 이상과 증언을 구분하여 영감 등급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고 하였다(R. A. Underwood에게 보낸 서한 1889. 1. 18.).
“영감으로 기록된 부분과 영감으로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인간의 한정된 표준으로 측정하므로 명백한 성경의 말씀을 가상적(假想的)인 난해 거리로 만들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마치 엘리야가 세미한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의 목전에서 얼굴을 가리워야 할 것이다(왕상 19:12)”(1기별, 16-17).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집중하고 있는 위기들을 증거하셨으나 어떤 유한한 인간을 지정하여 숨은 신비들을 해명 시키거나 한 사람 혹은 어떤 분야의 사람들에게 영감으로 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자격을 아무에게도 주시지 않으셨다. 인간이 저들의 한정된 판단력으로 영감으로 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기 위하여 성경을 시험해 보는 단계에 이를 필요가 있다면 저들은 이미 예수님보다 앞장서서 과거에 예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신 것보다 더 훌륭한 길을 예수님께 보여 주는 격이 되는 것이다.
나는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으로서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한 나는 성경 전체가 영감으로 된 말씀임을 믿는다. ”(1기별, 17).
(4) 1893년 제1기 안식일학교 교과(1월 7일)--영감 등급론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배척하였다.
2. 축자적 영감론 혼선과 사상영감론 확인
이 기간 동안(1883-1915) 또 하나의 이슈는 성령께서 사실상 말씀을 구수 하였는가 이었다. 이 이슈는 엘렌 화잇의 저술의 문법적 교정문제와 연계되었다. 1883년 대총회 회기에 엘렌 화잇의 교회증언에 대한 문법적 교정 감독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위원: W.C. White-의장, Uriah Smith, J.H. Waggoner, S.N. Haskell, George Butler).
대부분의 화잇의 증언들은 여러 가지 일로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분주한 중에 기록된 관계로 문법적으로 불완전한 표기를 방치한 채로 출판에 넘겼다. 동 위원회는 이 사실을 회의록에 남기면서 하나님께서 엘렌 화잇에게 주신 빛은 그의 마음을 계몽시키고 사상을 주입한 것이므로 표기된 단어를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동 위원회는 증언의 사상의 수정이나 사실 내용 표기의 개정이 아닌 문법적 과오에 국한된 것으로 못 박았다. 이리하여 축어적 기계적 영감론이 지배하던 보수 신학계에서 예언자의 영감을 사상 영감 차원으로 보고 자구수정을 하는 일로 인하여 교단 내 축자영감론자들의 당혹감과 비판 또는 문제의식을 유발하였다..
George W. Morse는 1888년 3월 6일 자 RH에 기고한 글(“Scripture Questions")에서 단어나 구절의 영감이 아닌 일반적인 목적영감론을 제기하였다.
Uriah Smith는 주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경우 낱말이 영감되었지만 사상, 사실, 및 진리를 전한 것이면 그 사상, 사실, 및 진리가 영감된 것이라는 2분법적 접근방식을 사용하였다.
D. M. Canright는 1887년 초에 재림교회를 등진 후에 엘렌 화잇의 저술의 영감성에 대한 비판을 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출간된 Seventh-day Adventistism Renounced에서 그는 엘렌 화잇의 비영감론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제시하였다.
(1) 엘렌 화잇이 기록한 원본의 단어 표기를 후에 변경, 정정하였다.
(2) 남편과 문필 서기가 교정과정에서 한 문법 및 문체 교정 제안을 엘렌 화잇이 수용 병 합시켰다.
(3) 엘렌 화잇이 저술 중에 원 저자들을 표기 내지 그 공적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 인용, 내지 轉寫하였다(pp. 44-45).
1890년 10월 27일 Signs of Times 지는 사설에서 신약성경에는 인간 영감론 언급이 없으며 영감 받은 것은 기록된 말씀이라고 보았다. 1905년에 간행된 Robert Hare의 The Beacon Light은 장로교 학자 James Hamilton의 글을 인용하여 성경의 각 문장은 사실상 인간의 글이지만,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
1909년11월 17일 Signs of Times 지는 번역된 성경의 축자영감론이 아닌, 히브리어, 아람어, 및 희랍어 원문 성경의 축자영감론을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하였다. 이는 개신교 보수신학의 축자영감론과 그 궤를 같이 한 것이다. Hinsdale 위생병원 창설자이며 원장인 David Paulsen은 1906년 엘렌 화잇에게 보낸 서한에서 공중석상이나 사적으로 더욱 강화된 기계적 영감론 입장을 천명하여 왔음을 진술하였다.
“저는 화잇 여사께서 공중 앞에서나 개인적으로 하신 모든 말씀과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 쓰셨든지 여사께서 쓰신 모든 서신은 마치 십계명처럼 영감으로 기록된 것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으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1기별, 24).
엘렌 화잇은 이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 반박 서한을 보냈다.
“나의 형제여, 그대는 제가 쓴 글들을 열심히 연구하였으므로 제 글 가운데서 저 자신이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을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과거에 우리 사업을 이끌어 나가신 선구자들도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1기별, 24).(1906년 6월 14일 자 서한).
엘렌 화잇은 원고의 문법적 교정을 이미 마친 각 시대의 대쟁투 1911년 개정판 준비를 위하여, 1910년에 W. W. Prescott에게 동 서의 역사 부분에 대한 점검을 의뢰하였다. 개혁파 학자 Gaussen의 축자영감론에 지지자인 Prescott는 영감 받은 저술을 수정하여 달라는 요청에 불편해 하였다. 프레스코트는 결국 성경은 축자 영감 되었고, 엘렌 화잇의 저술은 그렇지 않다는 시각을 가졌다.
“1911년 10월 30일 대총회에서 W. C. 화잇이 행한 진술”(3기별, 433-65)에는 엘렌 화잇이 역사적 자료를 대폭 활용한 점을 두고 역사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점과 프레스코트의 축자영감론 입장을 배척하였다는 해설이 나와 있다.
“어머님은 결코 역사에 있어서 권위자라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써낸 것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 그에게 주어진 섬광과 같은 장면이나 다른 예증들, 그리고 이 행동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미친 영향을 이 사역과 관련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적 장면과 함께 기술한 것입니다. 이 장면들을 기록해 내는 일과 관련하여 그는 그가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들을 독자들에게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분명하고 좋은 역사적 진술을 사용하셨습니다”(3기별, 437).
“당신은 축자 영감에 대하여 제가 당신에게 보낸 짧은 진술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1883년 대총회가 한 이 진술은 이 사업의 선구자들의 믿음과 입장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다른 견해, 즉 가우센 교수에 의해 신봉되고 제시된 견해가 배틀크릭 대학의 학장인 (W. W.) 프레스코트 교수에 의해 매우 강력한 방법으로 제시되기 전까지 우리 목사들과 교사들이 취해 온 유일한 입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배틀크릭 대학의 학생들과 해스켈 목사를 포함한 많은 다른 사람들이 이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사업에 끊임없이 계속 증폭되는 의문과 당혹감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화잇 자매는 축자영감에 관한 가우센 이론을 결코 그 자신의 사업이나 성경에 적용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3기별, 454-455).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1911년 Signs of Times의 편집인 Milton C. Wilcox는 프레스코트의 성서 원본 문자의 축자 영감론에 동조하였다. 그는 성경 기자가 영감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문자가 영감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축자 영감론을 지지하는 선구자들이 엘렌 화잇의 다음 진술을 인용하여 그 뒤 바침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엘렌 화잇의 진술 내용을 오해한 소치이다. 화잇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기록하였고 기록 시 성령을 전적으로 의존하였다는 점에 그 역점이 있다.
“영감 받은 기록자들은 인간의 약점과 결함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거룩한 역사의 페이지들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거짓되게 증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서기관들은 자신의 의도대로 기록하지 아니하고, 성령에 의해 지시되는(dictated) 대로 기록하였다. 그들은 실제 그대로의 진리를 기록하였으며, 이 엄격하고 말하기 힘든 사실들은 우리의 유한한 마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계시되었다 ”(4증언, 9).
“나는 계시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계시에 대하여 말할 때나 글을 쓸 때에도 전적으로 주의 영을 의지하게 된다. 주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나로 계시에 대하여 말하고 글을 쓰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친히 나에게 계시의 내용을 보여 주시지 않는 한 나에게 보여진 것들을 기억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Spiritual Gift 2권, 292, 293, 1860년)”(1기별, 36-37).
축어영감론자들은 전술한바와 같이 엘렌 화잇의 진술 내용을 오해하여 성령의 지시에 따라 기록하였고 기록 시 성령을 전적으로 의존하였다는 점에 그 역점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3. 엘렌 화잇의 성서 영감론 실상-성육신 모델 (Incarnational Model)
1883-1915년 사이의 영감 논의 과정에서 엘렌 화잇의 입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성경 영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처럼 신적 요인과 인적 요인이 연합된 신비에 속한다.
(2) 인간의 진술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3) 어느 누구도 영감된 부분과 비영감된 부분을 나누는 시도해서는 안 된다.
(4) 영감 등급론을 배척한다.
(5) 성경 기자는 하나님의 필자(penman)이지 필촉(pen)이 아니다. 영감 받은 것은 사람이 지 성경의 낱말이 아니다.
(6) 성경 기자는 사상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胚子 상태의 사상영감(seminal thought inspiration) 즉, 일반적 사상만이 영감 받았다는 입장을 반대하였다.
(7) 성경 전사과정에서의 과오가 있는 점과 난해구절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8) 인간 언어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무류하다(infallible).
(9) 성경 안에 이스라엘 역사는 정확한 신빙성을 지닌 영감의 무오한 필촉(“unerring pen of inspiration")으로 투사 기록되었다(Testimony to the Church, no. 28: 171).
D. 근대주의자와 근본주의자들의 논쟁의 시대와 재림교회 (1915-1950)
1. 1919년 성경연구회와 성경 및 역사 교사회
1919년 여름 개신교 신학계에서 있었던 근대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 논쟁은 재림교회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진화론에 토대를 둔 근대주의자들은 창세기 창조 기사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 사건들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도전에 대하여 성경의 무류성과 무오성을 옹호하는 기치를 높혔다.
재림교회 내에서는 엘렌 화잇 사후 1880년대의 교회증언 수정판 및 1910년대의 각 시대의 대쟁투의 수정판 등을 근거로 하여 엘렌 화잇의 저술의 본질 및 권위성에 대한 해묵은 이슈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1919년 중반에 재림교회 내 영감에 관한 논의에서 세 가지 두드러진 일이 있었다.
(1) Review 지의 편집인 Francis M. Wilcox가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기독교 근본 주의 회합 참석 보고기를 6월 19일자 동지에 게재하였다.
(2) 1919년 7월 1-21일까지 성경연구회(Bible Conference)가 개최 되었다. 동 모임에 재림교회 내 편집인들, 대학의 성경과 역사 교수들, 대총회 위원회 회원들이 참석하였다.
(3) D.M. Canright이 동년 6월에 Life of Mrs. E. G. White을 출판하였다. 그는 동 서에 서 엘렌 화잇의 저작을 비판하였다.
1919년 7월 성경연구회(Bible Conference)가 끝난 직후 성경과 역사교사들 협의회(Bible and History Teachers' Council)가 7월 30일-8월1일에 이어졌다. 여기서 다룬 주제들은 “성경과 역사를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예언의 신 활용,” “성경의 영감성에 관련된 예언의 신 영감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총회장 A. G. Daniells 목사가 의장을 맡았으며 회의 진행은 일반적으로 질문 응답식 토의 방식이었다. 이 모임에서 핵심 초점은 축자영감론과 예언적 저술들의 무류성에 관한 이슈였다.
Daniells는 엘렌 화잇의 증언의 축자영감론의 주제에 관하여, 화잇 자신도 그 무류성을 주장하지 않았고, 예언의 신이 성경에 대한 유일한 안전한 해석도 아니며, 엘렌 화잇은 역사에 관한 권위성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엘렌 화잇 주변에서 그와 함께한 제임스 화잇, W.C. 화잇, 및 증언 출판에 조력한 자들이 증언의 축자 영감성을 신봉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W.W. Wilcox는 성경의 축자영감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성경을 신봉하겠느냐고 W.W. Prescott에게 질문하였다. C. L. Benson, C. L. Tayler 등은 역사적 입장의 불확실성이 성경 본문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미치는 파장, 엘렌 화잇의 역사 해석의 신빙성을 제켜두는 결과 미치는 파장을 우려하였다. 재림교회 지도층 대부분은 다니엘즈의 영감 사상을 추종하지 않았다.
2. 근본주의 영향
1920-30년대 근대주의와 근본주의 논쟁의 와중에서 지도층은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경의 축자영감론에의 경도가 강화되어 가는 분위였다. S. N. Haskell은 영감을 예언자의 성대를 사용하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보았다(Bible Handbook, 1919). W.W. Wilcox는 재림교회는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못 박기까지 하였다(RH 1929. 11. 28). 그는 인간 어느 선지자가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1920년 7월 15일 제2차 근본주의자들의 회의가 시카고에서 개최되었다. 재림교회 지도층에도 이를 지지하는 자들이 점고하였다. 재림교회 내에서 축자-완전 영감론을 지지하는 상황이 고양되어 갔다. 1931년 6월호 Ministry 지는 개신교 근본주의자의 글을 게재하여 모든 사상과 단어가 다 영감 받았다는 주장을 내 세웠다. 대학 강단에서 축자영감론을 가르치는 일도 일어났다. 1931년 기본신조는 성경을 “신앙과 실천에 관하여 유일한 무류한 규범”으로 보았던 종전의 입장을 강화시켜 “신앙과 실천에 관한 유일한 무오한 규범”으로 보았다(1931 Year Book). 1933년 4월 8일 자 안식일학교 교과도 성서 영감은 인간이 자기 말을 하도록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수용 배경에는 근본주의자들의 성경고양을 동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축자영감론에 이런 경도된 분위가 반전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1934년 F. M Wilcox의 “Testimony of Jesus"라는 일련의 글이 RH에 기고되었던바 여기서 그는 종전의 경직된 입장을 바꾸어 10월 5일 자 기사에서 “영감 받은 기자는 자기의 무류성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피력하였다. 그리고 엘렌 화잇은 축어적으로 영감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1935년 미시간합회장 C. B. Haynes는 God's Book을 출판하였는바 거기서 그는 계시를 알리는 과정(the informing process)으로, 영감을 나누어 주는 과정(the imparting process)으로 각각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영감 받은 기자가 기록한 정보는 반드시 초자연적인 계시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성경은 기계적 영감으로 된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영감의 형태와 실체를 언급하면서 완전영감론적 시각에서 사상과 단어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성경을 그 역사적 설명뿐만 아니라 미래 예고까지 무류하고 정확한 기록으로 보았다. 그의 입장은 기계적 영감론을 배척하면서도 표기된 단어를 모르고 어떻게 사상을 알 수 있겠느냐 하면서 단어의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 특징이 있었다. 비록 그가 재림신도들을 성경이해와 그 해석에 있어서 근본주의자들이라고 하였지만 그 역점은 성경 존중에 있었다. 그의 논지는 근본주의적 기류에서 탈피하는 틈을 보이는 진일보한 관점으로 보인다.
1944년에는 F. M. Wilcox의 Testimony of Jesus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 엘렌 화잇의 원고 “하나님 말씀의 영감성”(MS 16, 1888)과 “성경에 대한 반대”(MS 24, 1886)이 제2장에 게재되었다. 이 글들은 향후 재림교회 내에서 성서 영감론 논의의 자료로 자주 활용되었다.
3. 성경 신뢰성과 엘렌 화잇의 예언적 선물의 진정성을 강화시키는 연구들
전술 한바와 같이 이 기간 동안(1915-1950) 성경의 영감성 논의는 성경 무류론과 축어적 영감론을 주축으로 하는 것이 주된 특징이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일반에서 일었던 것처럼 재림교회에서도 근대주의자들을 의식하여 성경의 신뢰성을 높이는 일에 역점을 둔 학문적 활동들이 돋보이는 기간이었다. 그 현저한 현상 중 하나는 지질학, 성서고고학, 성경연대기 등 분야에서 연구를 강화하여 성경의 신뢰성이 부각되는 기간이었다. Harold W. Clark는 지질학적 자료가 성서의 창조와 홍수 사건을 지지한다는 발표를 하였으며 W.W. Prescott, Lynn H. Wood 등 성경학자들이 성서고고학 자료로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을 조명하였다. Edwin R. Thiele는 1943년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기”라는 논문으로 시카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히브리 왕들의 연대기에 모순 되어 보이는 것들을 잘 해명하였다.
1930년대에 Ludwig R. Conradi 가 유럽에서 엘렌 화잇의 예언적 봉사활동을 불신하는 씨앗을 뿌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 화잇의 예언적 선물의 진정성을 옹호하는 몇 저술들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런 저술들은 영감성 본질에 관한 논의를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E. 새로운 사조의 등장(1950-1970)
1950-1970년 기간동안 재림교회 내 계시-영감론의 동향은 신정통주의 신학 사조라는 개신교 신학의 흐름에 따라 그에 영합하는 기류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때로는 엘렌 화잇의 계시-영감론에 대한 변증적 입장에서, 때로는 시대적 사조에 응답하는 등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축자영감론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사상영감론이 자리매김을 하여 갔다.
1. 축자영감론 배척과 사상영감론 천명
Francis D. Nichol은 Ellen G White and Her Critics (1951)을 출판하였다. 700쪽이 넘는 분량의 Nichol의 책은 캔라이트 이래 제기 되어온 엘렌 화잇에 대한 비평들을 변증적 해명 내지 반증을 집대성하고 있다. 1953-1957 사이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원되고 성서연대기 위원회와 성서번역 상의 문제점들에 관한 위원회가 수반된 결과 7권의 방대한 재림교회 성경주석이 발행되었다. 이는 재림교회 선경연구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재림교회성경 주석은 성경이 성령의 구수라는 축자영감론을 배척하고 성서 기자의 개성과 특질에 따라 다양한 문체로 기록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진행되었다.
1966년에 출간된 Seventh-day Adventist Encyclopedia는 “Inspiration of Scripture" 항목에서 재림교회가 축자영감론을 신봉하지 않고 사상 영감론을 신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66년 화잇재단의 총무 Arthur L. White은 Andrews University에서 영감론에 대한 강의를 하였던바 동 강의 내용은 1973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향후 재림교회 여러 신학대학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는 엘렌 화잇의 영감성은 성서 시대의 예언자들의 영감성과 동일하다고 보았고, 성서 기자나 엘렌 화잇의 축자 영감성을 배척하였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무류한 계시를 제공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사용된 언어는 무류한 것이 아니며 사소한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George Burnside는 1970년 Ministry 지에서 성경무류론과 무오론을 개진하였다(p. 6).
2. 근본주의와의 차별화 작업
1955년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 Carl W. Daggy는 재림교회와 근본주의의 비교 연구에서 양자 사이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다루는 석사논문을 작성하였다. 성경이 그리스도인 신앙과 실천에 관한 유일한 무오한 규범이라는 점에서는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으나, 축자영감관에 있어서는 재림교회는 전적으로 근본주의에 동조하는 입장이 아닌 차이점이 있다고 보았다. 즉 성경 기자는 성경을 기록할 때 자기가 선택한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 기자가 임의로 단어를 선택할 때 과오를 범하지 못하도록 보호를 받았다고 본다.
1955년에 Roy F. Cottrell은 영감이 표현과 기억의 정확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개진하였다.
3. 신정통주의적 계시 개념에 대한 반응
1957년에 출판된 Questions on Doctrine 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는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을 의식하여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피력하였다. 신정통주의는 명제적 계시관을 배척하고 계시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보았다.
1958년에는 가려 뽑은 기별 제1권이 출판되었다. 동 서 첫 부분(pp. 13-76)에는 엘렌 화잇의 영감 문제에 대한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F.E.J. Harder는 1960년 뉴욕대학교에서 받은 PhD. 학위논문 “Revelation, a Source of Knowledge, As Conceived by Ellen G. White"에서 엘렌 화잇의 계시 개념을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슐라이에르마허, Augustus Strong 및 Emil Brunner의 빛에서 연구하였다. 그는 엘렌 화잇이 사상영감 차원에서 구체적인 진리를 계시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명제적 계시 교류와 부여라는 점에 역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부룬너의 만남의 신학 I-Thou관계 개념에 동조한다는 점을 부각하였다.
비재림교인 학자 Walter R. Martin은 엘렌 화잇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도구로 저술, 설교, 권면을 하였지만, 사적인 판단에 있어서 인간적으로 무류하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총회 Field Secretary H.W. Lowe는 비판하였다.
Jack Provonsha 는 AUSS 2(1964)에 기고한 “Revelation and Inspiration"에서 재림교회는 만남의 신학에 더욱 친근하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그는 명제적 계시 개념과 만남의 신학 사이의 중도노선을 추구하는 입장에 역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Edward Heppenstall은 1970년 Ministry 지에서 만남의 계시 개념을 비평하면서 축어적 명제 계시 개념을 옹호하면서 진리 이해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사실들이 무류하게 보여진 것이지만, 반드시 단어의 정확한 표현을 본질적인 것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F. 영감된 저술들의 역사화에 대한 도전(1970-1990년대)
이 기간 동안에는 영감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보수시각을 비판하는 투쟁이 치열하였으며 수정주의적 의견 등이 제기 되는 등 다양한 현상을 보여주어 왔다.
1. 역사비평방법의 도입 시도
1969년에 창간된 교단 내 비공식 잡지인 Spectrum 지는 역사 비평주의를 토대로 한 계시-영감에 대한 논문들을 게재하므로 전통적 계시-영감관을 비판하였다. 동 잡지는 수정주의 적 계시-영감관을 선도하였다. 특히 신정통주의의 Encounter 신학적 연구 논문을 의도적으로 반복 게재하여 상당한 파장을 일으켜 왔다.
성경해석과 계시-영감 이슈에 대한 역사비평방법을 도입하고자 하는 유형에는 2가지가 있었다. 즉, 역사비평방법을 그대로 수용하는 그룹과 역사비평방법을 수정하여 수용하는 그룹이다. 엘렌 화잇의 저술을 역사 비평 방법에 따라 보는 그룹은 엘렌 화잇의 저술은 당대 환경의 소산물로 보았고, 엘렌 화잇의 역사적 과오를 상정하였다.
2. 건실한 계시 영감관 제고
(1) Raoul Dederen -- 1974년 성경연구회에서 발표한 "Toward a Seventh-day Theology of Revelation-Inspiration"에서 계시란 만남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지식, 주님과 그의 뜻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엘렌 화잇이 축자영감론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기록된 본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2) G. Hasel -- Understanding the Living Word of God에서 역사비평방법을 배척하고 성경의 초자연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3) “Method of Bible Study" -- 1986년 재림교회 학자들이 Rio de Janeiro에서 채택한 문건으로 온건한 역사비평방법까지도 배척하였다.
(4) Roger Coon -- 예언적 진술은 과오 유발이 예방된다는 구속복이론(The straight-jacket theory)과 선지자가 인간성의 불완전으로 과오를 범하는 때에 성령께서 과오를 교정케 하여 신앙공동체의 신앙과 교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한다는 개입조정이론(the intervention theory)을 전개하였다.
(5) George Rice -- 계시 모델을 예언적 모델과 연구 모델(research model)로 구분하여 누가의 모델(Lucan model)을 강조하므로 예언자가 다른 자료를 활용하는 것은 표절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6) Issues in Revelation and Inspiration -- Alden Thompson가 역사비평방법을 활용하여 성경을 사례집으로 보고 성육신 모델에서 인간적 요인에 역점을 둔 것 등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7) Fernando Canale의 AUSS (1993)에 5회의 연재 논문 -- 성경을 희랍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하나님의 무시간성 본질에 집착한 결과 성경의 역사적 측면을 신적 요인으로 보지 않고 인간상황으로 보는 문제성을 갈파하고 성경의 역자적부분의 계시성과 영감성을 전개하고 있다.
(8) ATS (Spring, 1994)는 계시-영감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9) 1995년 당시 대총회장 Robert S. Folkenberg는 Adventist Review 지(8월 3일)에 신적 영감과 성경의 신뢰성이 재림교회를 강화시킨다고 하고 부분영감론 사상을 배척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3. Samuel Koranteng Pipim이 Receiving the Word (1996)에서 보수적 시각에서 역사비평방법에 대한 비평을 하고 성경의 신뢰성 고양하였다. 그의 책에 대하여 George Knight는 Pipim이 극우파적으로 성경무오론과 축자영감론에 사로 잡혔다고 비판하였다.
4. Juan Carlos Viera는 1996년에 영감의 모델 6가지를 발표하였다.
G. 요약
재림교회의 지나간 150년의 역사에 있어서 여러 계시-영감론이 교회 내에 제기되었다. 첫 40년간은 밀러의 성경관에 토대를 두고 무신론적, 자유주의적 성경관을 비판하였다. 1880-1915년에는 전통적인 영감론에 거스리는 부분 영감론 내지 영감등급론이 대두되었다. 엘렌 화잇의 원문 수정이 교계에 충격을 끼쳤다. 그의 영감론이 소개되고 성경을 무류하고 신뢰성 있는 하나님 말씀으로 보는 일에 역점을 두는 입장이 지탱하여 왔다.
엘렌 화잇 사후 그의 영감성에 관한 이의가 제기되어 1919년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근본주의 성경관에 경도된 재림교회 지도층의 선도로 축어적 영감관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에 편승한 결과였다. 1950년대 이후 신정통주의 계시개념의 목소리가 컸다. 1970년 대 이후 교계 내 지식 계층의 수정주의 운동과 역사비평방법의 도입으로 인하여 자못 우려되는 분위기를 유발하였지만 교단 지도부와 건실한 신학 운동은 이를 견제하면서 사상영감론-완전영감론-인간영감론-전체론적 영감론-성육신모델 강조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래 발간된 Handbook of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에 게재된 Peter M. van Bemmelen의 “Revelation and Inspriration"은 이런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참조, p. 34에서 Inspiration: Word or Con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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