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영감에 관한 역사적 논의 개요

 

A. 교부시대 교회

 

교부시대에는 계시와 영감에 관한 특출한 논란이나 논쟁이 없었다. 또한 교부들이 특별하게 집중적으로 다룬 자료가 안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충만한 계시가 주어졌다고 믿었다. 신약성경에 나온 대로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 주인, 선생, , 세상의 빛으로 묘사하였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거룩한 교사로 신봉하였다.

이레내우스(130-200)는 영지주의를 경계하여 창조로부터 성육신, 그리고 사도들의 증거에 이르기까지 로고스를 통하여 계시의 통일성과 발전을 강조하였다. 그는 계시의 역동적이며 역사적인 측면을 주목하였다. 그는 성경을 계시의 좋은 말씀으로 보았다.

2세기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은 신약을 성경으로 수용하였다. Montanism, Gnosticism, Marcionism 사상의 파고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성경으로 옹호, 변증하였고 하나님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전하여 준 계시된 것에 토대를 두고 대응하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성경의 최고 권위에 대한 도전을 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1. 교회의 권위 강화

로마교회의 위상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교회의 사도적 기원을 강조하고 성경은 교회의 권위로 인정된 것이라는 사조가 발전되어 나갔다. 교회가 경전성 여부를 결정하는 권위를 지녔다는 시각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야기시켰다.

 

2. 사도전승의 권위

특히 Basil the Great(330-379)의 영향으로 교회는 기록되지 않은 사도적 전승(Apostolic tradition)을 이어받아 보존하여 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역시 신적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3. 교부들의 저술의 권위

이 모든 요인들은 순식간에 이루어진 현상이 아닌 점진적 발전의 결과였다. 동시에 이런 발전은 교황권 강화를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B. 중세시대 교회

 

1. 스콜라주의

스콜라주의는 계시와 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출하였다.

이 문제를 Thomas Aquinas는 그의 신학대전에서 이성의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로 풀어내 정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성의 진리와 계시의 진리를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그는 성경을 계시된 진리의 기본적인 자료로 보았다.

2. 성경과 전승 관계

어떤 사람은 성경과 전승을 동일한 수준의 권위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 양자 공히 그 원천이 하나님이고 교회 내의 신앙의 통일성을 위하여 보존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계시에는 각기 다른 두 자료가 있다고 보고 그 하나는 성경이라는 기록된 전승과 기록되지 않았으나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전승이라고 하면서 모두가 신적 권위를 가졌다고 한다.

 

C. 종교개혁시대

 

1. Martin Luther(1483-1546)

1) Sola Scriptura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원리를 구축, 확신하였다(LW 34:328). 그들은 성경을 곧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보았다. 루터는 1521418Worms 의회 앞에서 신앙과 교리의 궁극적 판단의 권위를 성경에만 호소하였다. “성경만이 지상의 모든 저술과 교리의 참된 주인과 영주가 된다” (LW 32:11,12; 34:227).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위한 모든 진리와 교리는 말씀 안에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다. 성경은 신뢰할 수 있고 확실하다. 루터는 교회의 전승이나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을 전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으나(LW 34:334-38), 성경과 동등하거나 성경에 능가하는 권위의 원천으로 보지 않았다.

인간은 타락되고 죄 있는 상태에 빠져 있어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자신을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내 보여주셔야 했다. 인간의 자기 지식이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만 도달할 수 있다.

 

성경은 일반계시 이해의 매체가 된다. 천연계와 인간 마음은 죄로 훼손되었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 나타낸 거룩한 진리를 포착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일반계시-특별계시라는 이원론을 배척한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계시(성경)를 통하여 일반계시의 진리를 밝혀낸다.

 

루터의 성경관에 대하여는 학자에 따라 다른 판단을 하는 양상이다. John K.S. Reid에 따르면 루터가 <성경=하나님 말씀> 도식이 아닌 <성경=하나님 말씀에 대한 유일한 증거(only witness to the Word of God)>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Emil Brunner는 루터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을 강조하면서도(LW 15:280),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를 복사한 것 등에는 문제의식을 지녔다(LW 30:203; 54:452).

 

2) 그리스도-하나님의 말씀

루터는 성경을 기독론적으로 접근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기록된 성경 안에 계시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the eternal Word of God)이 되며 성경은 그리스도의 종(LW 26:58)이 된다고 보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관(christological view of Scripture)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정경의 기준이 된다. 야고보서가 "지푸라기 서신(epistle of straw)"(LW 35:362)으로 보인 것은 이런 표준이 그 한 몫을 한 결과이다.

 

3) 교회의 권위 문제

루터는 교회의 권위를 고양한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이 주장한 교회의 성경 유권 해석권을 배척하고 성령의 말씀 조명을 강조하였다.

 

4) 비판:

루터는 피조 천연계 내의 하나님의 계시가 죄로 인하여 훼손되어, 영적으로 어두워진 인간의 마음으로 그 계시를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약하지만 인간 주변에 그리고 인간 안에 아직도 하나님의 계시가 반사되고 있음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루터의 경전관에는 對經(antilegoumena)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구원이 강조된 책들(요한복음, 요한일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베드로전서)을 높이고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비하시킨 경전 등급론적 인식은 문제성을 지녔다.

 

2. John Calvin(1509-1564)

종교개혁의 제2세인 John Calvin의 계시 및 성경 권위관은 루터의 입장과 유사하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절대주권을 강조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 안에서 자기 계시를 하였다고 보았다. 칼뱅 신학 체계의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점에 있다.

죄로 인하여 인간의 영성은 장님이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의 계시에서 등져 있었다. 인간은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영적 장님 상태가 치유될 수 있다. 이 계시를 통하여 인간은 죄된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칼뱅은 성경이 교회의 권위에 매어 있다는 주장을 배격하였다. 오히려 교회는 성경의 권위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 권위는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고 보았다(Institutes, 1.7.1-2). 성경은 최후의 법정이며 진리와 교리의 궁극적인 표준(시금석)이 된다. 그는 성경의 권위성과 신뢰성을 확신하였다. 또한 그는 성령의 내적 증거(The inner testimony of the Holy Spirit, 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로 말씀의 신뢰성을 펼치면서 성경의 자기 확증성(self-authenticating)을 강조하였다(Institutes 1.7.5). 칼뱅은 성경의 신적 감동을 성령의 구수작업으로 해석하였다(Institutes, 4.8.6; 4.8.8; Comm., on 2 Tim 3:16). 성경 기자들은 자동화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Comm., on 2 Pet 1:20-21).

 

칼뱅에 따르면 계시의 핵심은 복음이며 그 복음은 그리스도의 비밀의 명료한 현시이다. 그리스도의 약속과 증거를 담고 있는 구약보다 신약은 더 명료한 그리스도의 은혜의 현시이 며 그리스도의 더욱 분명한 선언이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된다.

 

3. Trent회의(1545-1563)의 반응

트렌트회의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티즘을 비판하였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의 주장을 배격하였다. 사도들의 전승은 기록된 성경과 교회를 통하여 계승되어 온 기록되지 않은 전승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계시의 원천은 기록된 성경과 기록되지 않은 전승-이 두 가지로 본 것이다. 동 회의는 이 입장을 1546년에 경전적 성경에 관한 교령(Decree Concerning the Canonical Scripture)"에 천명하고 외경서(Apocrypha)들도 정경으로 포함시켰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입장을 수용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저주의 선언을 하였다. 트렌트회의는 로마 가톨릭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교회사적 분수령이 되는 결의를 하였다.

 

4. 프로테스탄티즘의 발전

종교개혁자들의 계시관은 개혁신앙(Reformed Theology)이란 16세기 이래 발전되어 온 개신교 신학과 루터주의에서 계승되었다. 개혁신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특히 16 후반-17세기에 프로테스탄트 교조주의자들(Protestant Dogmaticians)은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의 원리를 옹호하며 ACES를 발전시켰으며 인간 이성 척도론을 배격하였다. 그들은 "vox scriptura vox dei (The voice of Scripture is the voice of God)"의 신념을 지녔고, plenary inspirationverbal inspiration을 강조하였다.

이 개혁 신앙은 19세기 이래 Charles Hodge, B.B. Warfield 등 프린스턴 학파와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 등 화란의 신학자들이 이 개혁신앙을 부활시켰다.

 

5. 급진적 개혁자들 (Radical Reformers)

급진적 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의 좌파 또는 제3의 종교개혁으로 일컬어져 왔다. 이들 종교개혁의 제3세력은 보수 온건으로부터 급진 좌경적 입장 등 다양한 입장을 보여 주고 있다. 다수의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신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에 대한 강조가 성경을 압도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다수가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였지만 신약을 편애 내지 우월시하여 구약을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평화론과 정교분리를 강조하여 칼뱅의 제네바의 신정정치나 루터의 제후들과의 밀착을 구약적 모델로 비판하고, 신약적 모델에 초점을 맞추었다. 성령에 대한 강조가 후에 합리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D. 이성과 계몽주의 시대

인문주의는 계시와 영감에 관한 근대적 논쟁을 유발하였다. 이 인문주의 시대에는 인간 이성에 뿌리를 둔 합리주의, 근대 자연과학적 사고가 성서비평주의를 배태하였다. 17세기 이래 발전한 이신론(deism)과 계몽사상이란 지적인 운동으로 말미암아 신적 계시 자체의 존재유무 내지 계시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대두되었다. 이런 시각은 19세기 이래 발전한 자유주의신학의 배경이 되었다.

 

합리주의적 계시관에서는 초자연적인 계시 개념을 배척하고, 자연적 계시를 고양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을 탐색한다. 이성의 최고 통찰력이 곧 신적 계시가 된다. 인간 이성은 오류에서 벗어나게 하여 구원하는 진리를 알 수 있다. 따라서 계시란 심오한 인간의 영적 통찰력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합리주의적인 계시관은 결국 성경의 권위에 직격탄을 날려 성경을 더 이상 영감된 책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J. 케플러(1571-1630) 등의 발견으로 지구 중심 세계관이 태양 중심 세계관으로 변혁이 일어났다. 그동안 무류하다고 여긴 신적 계시로 된 성경에 토대를 둔 지구 중심론적 해석에 심각한 도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 외 뉴턴의 만유인력 사상은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인식을 강화시켜 초자연적인 계시 개념을 신화 같은 것으로 보는 비판이 커 갔다.

합리주의 사상의 대두는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인간 이성은 진리 판단의 유일한 척도 역할을 하였다. Rene Descartes(1596-1650)“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과 방법적 회의론은 참된 지식을 획득하는 기본 원칙이 되었다. 신실한 로마 가톨릭교 신자였던 데카르트는 원래 신적 계시의 필요성을 배척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시각은 이성과 계시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촉발하였다. 당대 그 보다 더 젊었던 Spinoza(1632-1677)Cartesian philosophy를 넘어서서 계시와 이성을 날카롭게 구분하였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성은 성경 진리를 수용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조정자 내지 심판자적 역할을 한다.

 

이들 합리주의의 사상은 근대 성서 비평주의의 길을 열어 놓았다. 프랑스 사제 Richard Simon(1638-1712)1678년에 Histoire critique du Vieux Testament를 출판하여 성서 비평주의의 원조가 되었다. Simon은 성서의 불충분성을 논하고 바른 성서해석의 길잡이로서 교회와 전승의 권위를 비판하였다. 그는 모세5경의 모세 저작성과 성서 연대기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비평적인 주장은 당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조차도 환영하지 않았다. 그는 사제직까지 박탈당하였다. 아르메니안 신학자 Jean LeClerc(d. 1736)1685년 성경 영감에 관한 5 편지에서 Simon의 이론을 비판하므로 성서 영감에 대한 중요 저술을 남겼다. 프랑스 궁중의사 Jean Austruc(d. 1766)추측(Conjecture)"에서 창세기 기록에 나타난 하나님 이름의 차이에 착안하여 창세기를 여러 문서의 합성으로 보았다.

영국에서의 성경관은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있었다. 군주의 태도 변이와 루터나 칼뱅 같은 대 개혁자들의 부재가 빚은 현상이었다. 영국교회는 성경의 최고 권위성을 대륙의 개혁자들처럼 믿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황청을 대항하는 수단이었다는 점이 그 차이점이 되었다. 영국교회가 성경의 권위와 영감성을 수용하면서도 첫 4세기동안의 교부들의 저작을 성경에 보완적인 것으로 수용하였으며 전승에 기초한 여러 관행과 의식들을 성경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사조였다. 16세기 후반 이래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의 비성경적 전승을 배격하면서 영국교회를 정화시키고 제네바 종교개혁에 따라 재구축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왕정복고로 인하여 퓨리턴은 영국교회의 의식과 신앙을 거부하는 비국교도(nonconformists)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Richard Hooker(1554-1600)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퓨리턴 신앙에 대한 최대의 비평가였다. 그는 축자적 기계적 영감론까지도 주장하였다.

16세기 퓨리탄 신학계에 성경을 옹호한 최대의 학자는 William Whitaker(1548-1595)이었다. 그는 칼뱅에 영향을 받아 성경에 관한 경전론, 권위 있는 번역판, 권위성, 명료성, 성경해석론, 완전성 등을 다루었고 구수설을 언급하였지만 성경 영감론은 다루지 않았다.

The Westerminster Confession of Faith(1643-1649)은 개혁신학의 교리신조의 금자탑이었다. 동 신앙 고백 제6-8조에는 성경이 신앙의 규범이며, 또한 신앙과 관행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섭리로 각 시대에 보존되었다고 한다.

 

영국 이신론의 비평주의는 성경, 특히 구약성경의 모순점이나 도덕적 불완전성에 초점을 맞추어 호된 비판을 하였다. 그리고 계시종교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참된 종교는 이성종교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역사적 자료의 과오성을 매거하여 성경 영감 등급론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웨슬리(1703-1791)는 이런 합리주의 운동을 배격하고 성경의 완전영감성과 무류성을 옹호하였다.

18세기의 계몽사조는 신적 계시의 필요성여부 및 그 본질과 성경의 권위 및 영감에 대한 논쟁의 시대였다. 영국 이신론이 지핀 불꽃이 유럽 여러 나라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볼테르(1694-1778) 같은 이는 계시 종교 그 자체와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부인하였다. 독일에서는 고등비평이 일어났다. 요컨대, 이 이성의 시대에는 전반적으로 계시가 이성에 종속된 구도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이런 합리적인 계시관은 진리의 표준과 권위를 인간 이성 중심으로 추구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표준과 권위 대신 인간의 이성적 성취를 높이는 인본주의로 전락한다. 성경을 인간적 오류로 감염된 사상과 체험의 문서로 본다.

 

E. 19-20세기

1. 자유주의 신학

17-18세기는 성서영감과 무류성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이러난 시대였다. 이 회의론은 19세기에 이르러 그 강도가 더 하여 가 그리스도교를 격랑 속으로 몰고 갔다. 19 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성과 신뢰성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렸다. 이 시대에 소위 고등비평이라는 사조가 팽배하였다. 성서비평주의는 영국의 이신론, Spinoza (1631-1677), Richard Simon (1638-1712), 프랑스 궁중의사 Jean Astruc (1684-1776), J. G. Eichhorn(1752-1827) 등에 의하여 발전하였다. 특히 1700년대에 독일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1830-40년대 Charles RyellPrinciples of Geology는 동일과정론에 역점을 두어 특별창조론의 빛이 바래지고,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은 진화론적 사고 성경 비평론에 힘을 주었다.

 

19-20세기는 성서 영감과 계시에 대한 논쟁이 신학적인 대 이슈가 되었다. 그리하여 성경의 영감과 계시, 그 신뢰성과 권위성이 여러 가지 형태로 침식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1768-1834)는 합리주의적 접근방식을 배척하고 하나님에 향한 절대 의존감정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원리로 설정하였다. 그는 계시를 신앙공동체의 바탕에 놓인 사실의 창발성(originality)으로 규정하였지만 그 인식적 작용을 수용하지 않았다. 영감은 종속적 의미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영적 진리와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종교적 체험(Gefűhl)에 두었다. 성경은 제2차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에 불과하였다. 이는 신학적 사고의 큰 흐름을 초월성에서부터 내재성으로 변환되는 코페르니쿠스적 패러다임 천이인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 중심이라는 기조에 두었다. 그래서 교의신학이나 성경신학을 경시하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시 할 수 없었다. 성경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포된 정도로 보았다. 성경은 신 의식의 최고적 현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도덕 교사이었으며 도덕적 모본이었다. 과학의 발전 및 Charle Ryell의 지질학적 동일과정론과 Charles Darwin의 생물학적 진화론은 창세기의 창조기사, 타락 사건, 및 노아 홍수사건의 사실성을 평가 절하시켰다.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 문제로 인하여 성서 영감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국한된다는 논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자유주의 신학 사조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성서 비평주의--고등비평

성서비평주의는 17세기 발원하여 18 세기 독일에서 발전하였다. Johann Gottfried Eichhorn(d. 1827)은 고등비평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성경 각 책의 연대, 역사적 환경, 각 부분별 저자성, 문학 구조 등을 탐구하다 보니 한 책의 전후 맥락에 상충적 기사가 발견되어 전통적인 축어적 영감론이나 완전 영감론에 문제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주장이 영국과 미국 성서학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진보주의적 세계관

과학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 세계 내지 영적 세계에서도 진보 발전할 것이라는 낙관주의가 팽배하였다. 세계와 사회 개량주의, 강단사회주의 등 사회 발전론에 집착하였다.

 

자유주의를 흔히 신 신학이라고 비평하였던바 이 신 신학에서의 계시 영감론은 재해석 되었다. Albrecht Ritschl (1822-1889)은 계시를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을 위한 신적 이상의 현현으로 보았다. 종교사학파 Ernest Troeltsch (1865-1923)은 모든 사건의 역사적 상대성으로 인하여 계시의 절대성을 배제하였다. 그는 성경 자료를 포함한 과거의 역사자료는 현재의 사건에 유추될 수 있는 경우에만 용납하는 유추의 원칙을 적용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부활 등 초자연적 사건은 현재의 사건에서 유추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게 된다.

 

2. 논쟁점들

(1) 성서 영감의 등급론 -완전 영감론 배격, 부분 영감론 강조

Robert Haldane은 영감등급론을 거룩치 못한 발명품으로 비판, 축어적 영감론 강조, Charles Hodge 역시 이 등급론에 대하여 비판

(2) 축자영감론 배척

(3) 외경논쟁--영국 성서공회가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켜 출판하므로 논쟁 유발

(4) 성경의 인적 및 신적 요소론 대두(1940-1880)

(5) 고등비평론 확대--영국 Oxford가 그 본산지

 

스위스 개혁 목사 F. S. L. Gaussen(1790-1863)Haldane의 영향을 받아 성서 영감론에 관한 Theopneustia를 저술하여 당대 구수설적인 축자 영감론을 극복한 온건한 축자영감론을 제창하여 큰 기여를 하였고 그의 사상은 재림교회 선구자들에게까지 미쳤다.

 

PrincetonBen Warfield은 보수주의 시각에서 역사적 문법적 주석, 성서 파괴적이며 반기독교적인 비평론의 문제점 부각. 초자연주의, 성경의 자기 확증을 주장하였으나 편견 없는 종합적 투시가 전제된 비평주의를 용인하였다.

 

3. 신정통주의 계시관

 

신정통주의 신학은 19세기 말 이래 대두된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 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개혁신앙의 중요한 주제들을 강조하는 20세기 신학사조이다. 1-2차 세계대전이래 진보적 낙관주의적 신학 사조의 파산을 배경으로 하고 발전되었다. Karl Barth(1886-1968), E. Brunner(1889-1966), R. Bultmann(1884-1976) 등이 발전 시켰다. 초월적인 하나님, 말씀의 신학, 그리스도 중심 신학 등 바르트 신학의 기여는 컸다.

 

신정통주의 신학에서는 계시를 신학의 중심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계시는 진리의 교류나 명제적, 객관적 진리의 전달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만남의 체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부룬너는 계시는 나와 너의 만남이다. , 계시는 인격적인 만남(personal encounter)이다.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개인적, 주관적인 체험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타자성(otherness)을 강조한다.

 

하나님과 교류하는 매체로서 자연계시를 배척한다. 성경 그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매체가 된다. 성경은 계시를 지적하는 포인터(pointer)역할을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기에 신뢰할 수 있지만 인간적인 오류가 잠재된 문서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계시를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다른 계시의 통로도 모두 배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도 부분적인 구원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비평:

주관적 경험이란 진리를 결정하는 표준에 부적합하며 위태롭다. 성경은 신앙과 실천에 관한 규범이 된다. 계시를 오로지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으로 구성되고 영감된 명제적 진 리의 전달을 배척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2: 22, 47 등 참조).

 

4. 복음주의

Carl Henry 등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초자연주의, 완전영감론, 축자영감론, 성경 무오론 등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그러나 Clark Pinnock 등 여러 신학자들은 성경무오론에 대하여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5. 로마 가톨릭

19세기까지는 보수적인 계시 영감관을 견지하여 성서비평주의와 진화론을 배척하였다. 교황은 회칙을 통하여 근대주의적 사상의 침입을 경계하고 트렌트회의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43Pius 12세에 이르러서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대거 성서비평적 방법에 몰두하므로 계시 영감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혼재하였다. Avery DullesModels of Revelation(1983)는 이에 대한 증거가 된다. Vatican II 회의 이후 성경과 전승 모두 각 완전한 신적 계시의 소산물임을 확인하였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