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론적 진화론이 성경의 권위와 기본적 교리에 끼치는 영향

 

I. 유신론적 진화론

성경의 권위를 제한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수용하면 어떤 결과가 야기될 것인가?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들, 예컨대, 창조, 구속, 재림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 자연주의적 및 유신론적 접목을 하는 입장, , 진화론과 신학을 혼합시킨 것이다. 이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조의 異蹟성을 거부하면서 그리스도교 진리를 옹호하는 자기 모순적 이론이다. 인본주의적 또는 완전히 세속적 진화론에서는 사물과 생명이 단지 우연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한다. 이런 세속적 진화론과는 달리 유신론적 진화론에서는 하나님께서 수백만 년이나 수십억 년 전에 최초의 생명의 형태를 창조하신 후, 광대한 기간 동안에 걸친 진화 과정을 통하여 이 작은 생명의 형태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서 마침내 그것이 인간 존재가 되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성경의 창조론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혹자는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이라는 표현을 내 걸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적 창조론은 성경의 생명 창조사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에서 문자적인 24시간으로 된 연속적인 6일간의 창조주일 동안에 생명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다. 6일 동안의 창조는 창세기 1장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20장과 31장이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홍수를 언급하실 때에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해석의 타당성을 배서하셨다(24:37-39). 또한 이혼 문제에 답하실 때에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10:6-8)라고 하여 창세기 2:25을 인용하시므로 문자적 창조를 옹호하셨다.

심지어 극단적인 신학자 불트만(R. Bultmann) 조차도 성경의 저자들은 누가 되었던지 간에 창조에 관하여 기록할 때에 문자적 해석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문자적이며 눈에 보이게 오시는 재림, 혹은 성경의 권위 등 성경에 분명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의 저자들이 엿새 동안의 창조를 믿었고, 그렇게 기록했다고 시인했다. 이것은 불트만이 6일간의 창조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과학과 역사, 심리학, 사회학과 같은 영역에 있어서는 성경의 저자들보다 더 잘 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트만은 그 자신이 유신론적 진화론을 선택했지만, 성경 저자들이 엿새 동안의 창조를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은 유의할 가치가 있다..

 

II. 유신론적 진화론 신봉 결과

6일 창조론을 제시한 성경의 권위를 믿지 않으면 신학적으로 어떤 파장을 유발하는가?

 

1. 성경 권위 제한

만약 우리가 성경적 6일간의 창조론 대신에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본질에 대한 개념에 대하여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첫째, 성경은 도무지 어떤 권위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단지 우리가 과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혹은 인간 경험으로 확인하거나 거부해야 할 견해들을 표현하는 인간적 분야가 될 뿐이다.

둘째, 성경은 단지 영적인 어떤 영역에서만 권위가 있고, 인간 학문과 관계된 영역에서는 권위가 없다고 할 것이다.

셋째, 성경은 정경 내에 정경이 있다는 식의 주장이 등장할 것이다. 단지 정경의 일부분만이 권위가 있게 될 것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성경의 권위 있는 부분으로 되지 못할 것이다.

넷째, 성경의 권위성에 대한 의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성경해석에 있어서 의문이 일게 될 것이다. 어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창세기의 저자들이 창조 역사를 전할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시적으로나 혹은 우화적으로 말하고 있어 문장 전달 형식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기대하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문자성에 관한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의 그리스도와 다른 분들의 확증을 오늘날을 위한 진리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성경 기원의 진화론적 시각

성경은 자신의 사고 형식과 언어로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달했던 선지자들을 통해 성령의 감동 아래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 받은 말씀이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의 개념은 어떻게 성경이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개념까지도 수정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개념은 또한 성경에 대한 진화론적 기원을 암시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으로 그것은 어떤 고대 근동 사회들의 진화된 영적 문학서라는 것이다. 여러 세대들 동안 많은 다른 사회적 문맥에어 다양한 편집자들과 사상가들이 문학 문서들을 오늘날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형식으로 수집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로 오늘날 영적 진화의 최첨단을 분별하고 전하는 신학자들이 선지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3. 천연계에 종속되는 성경 권위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과 천연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에 다음 두 가지 영향을 미친다.

첫째, 성경을 천연계의 연구로부터 얻은 통찰에 종속되는 것으로 전락시킨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현대적 인본주의 학문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된다.

둘째, 성경, 과학, 역사, 전통, 교회 회의, 교황, 철학, 및 이성을 모두 동일한 수준에 놓게 된다. 이런 모든 것들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것들로 간주된다. 그래서 신학자의 과제는 그것들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그 결과들을 일관성 있는 통일체로 종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인간 이성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며, 성경은 다른 모든 권위들을 측정 평가하는 유일한 권위(sola scriptura)을 지닌 것이라고 주창하였다. 재림교회는 그 신조들을 이런 오직성경의 관점 위에 두고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이 성경과 과학 사이에 통합을 시도하고 있지만, 오직 성경 원칙은 그러한 접근을 배제한다.

 

4. 하나님 말씀의 권능 제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가 일어났음을 선포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성령의 지도하에 읽을 때에, 성경을 수용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하게 해 준다고 가르쳤다. 그 권능은 세상을 존재하게 했던 동일한 창조 권능이며, 귀머거리들에게 치료를 가져왔고, 눈먼 자들이 보게 했던 권능-회심의 권능이며 변화의 권능이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에 대한 의미를 수정하여 그러한 권능을 부인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따르면 창조의 권능이 변화를 가져오기 위하여서는 수백만 년의 기간 동안이 걸려서 물질과 생명을 점진적으로 조작 지도하는 영 정도로 보는 것이 고작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기독교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종교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 자체가 진화의 과정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따르면 기독교는 현재 진화의 정점에 있다고 하겠지만, 다른 어떤 것이 장차 기독교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기원에 관한 이론을 과학의 힘에 두려고 시도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하에(고전 1:18, 24),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이르러 오는(10:17) 하나님의 선물인(2:8)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11;3), 곧 창조를 받아들인다고 진술하고 있다.

 

5. 인간 영혼의 진화적 기원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33:9). 유신론적 진화론은 이 가르침을 의혹을 품고 하나님께서 수백만 년 동안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된 물질을 인간을 창조하신 동일한 방식으로 즉각적인 명령으로 창조하셨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한다. 물질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독립해 존재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구조는 이원론 내지 이중 구조론을 지니게 된다.

재림교회는 인간을 두고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매, 생령이 되었다고 하는 통전적 인간관을 신봉한다. 죽을 때는 하나님의 숨, 즉 생기는 하나님께 돌아가, 생령은 부활 때 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본질 개념을 수정한다. 그들은 인간을 피조된 살아 있는 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진화의 과정 중 어떤 시점에 인간이 영혼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영혼은 단지 인간 생명에 추가된 어떤 혼합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하나의 통일체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기원적으로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영혼의 자연적 불멸설과 그것의 선재성의 개념을 허용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인간관의 모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거나, 기적이 실제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의심한다. 그러나 시간의 어떤 시점에서 영혼의 주입은 역사적이고 기적적 사건이 아니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성경적 설명을 단순히 받아들이지 않는가?

 

둘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인간이 부활할 수 있다는 성경의 약속을 의심한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 창조론을 불신하는 결과에 불과하다.

 

셋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진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사건인지 밝히기가 곤란할 것이다. 또한 인간이 죄가 들어옴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타락된 존재로 전락하였다는 성경 기사를 진화의 어느 과정에 넣을 것인가? 진화론은 낙관적 특성을 지녀 죄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6. 신적 속성 제한과 변형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도전한다.

 

첫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의 지성, 권능, 그리고 사랑을 의심한다. 만약 하나님이 전지하고 전능하다면, 그분은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인가?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을 진화의 긴 과정을 통해 - 적자생존을 통해 인간이 되도록 질질 끌고 가겠는가? 만약 하나님이 진실로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유신론적 진화론에 의해 제안된 창조의 신적 방법은 하나님의 지성이나 권세를 의심하게 할 것이다. 그분께서는 지적이지만 매우 권세가 없든지, 혹은 권세는 있지만 지적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께서 더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고전적 세 가지 특성들, 즉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지성 그리고 권능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인다. 불행하게도 세 가지 특성들 중 두 가지 것만이 유신론적 진화론과 일치한다. 생존경쟁의 방법과 하나님의 사랑과는 대립 개념이다.

 

둘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의 인격적 본성을 의심한다. 하나님이 인격적인가? 혹은 그분이 단지 스며드는 영향력, , 혹은 우리에게 도무지 관련 없는 비인격적 에너지인가? 만약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관계를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어떤 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적합하게 되었으며, 왜 그분께서 그렇게 하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해 했을까?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창조하셨고, 구속 계획은 그 원래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왜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시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어떤 직접적인 접촉이 없이 수백만 년 혹은 수십억 년 동안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유신론적 진화론이 또한 성경을 하나님과의 대화의 교류를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수백만 년 혹은 수십억 년 후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현장에 갑자기 나타나셨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넷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의 특성을 경시한다. 하나님은 역사에서 직접적으로 행하시는가 혹은 그분은 그분 스스로 사건 현장에 실제 개입하시지 않는 단지 그것의 어떤 배경에 불과한가? 하나님에 관한 후자의 견해를 가지고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성경적 창조관을 거절하거나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단지 성경이 묘사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행하시거나 그렇게 하실 수 없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따르면 현대인간들은 성경시대 사람들 보다 더 잘 안다는 것이다.

 

다섯째, 만약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시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사에 개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참으로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여 살려고 오셨는가 혹은 그분은 참으로 그분의 때를 위해 최고의 정점이 되는 진화의 과정에서 단지 한 인간에 불과하였는가? 혹은 그분은 시간의 시초부터 창조를 추진하는 힘이나 혹은 영의 화신이었는가?

 

여섯째, 만약 유신론적 진화론이 창조의 기적에 대하여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성경에 기록된 다른 기적들, 즉 홍수, 홍해 도하, 신구약에 기록된 부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체적 부활, 그리고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재림관한 미래적 기적과 지구의 재창조에 대하여도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일곱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과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씨름할 것이다. 하나님이 진화의 과정을 조절하고 있는가, 혹은 그분 스스로가 진화과정에 예속되어 스스로 진화하고 있는가? 비슷하게 하나님은 창조주와 자유의 수여자인가 혹은 그분 스스로가 자유의 법들에 묶여 있는가? 만약 하나님이 우주의 법칙들에 의해 조절된다면 그래서 그것들과 조화되게 작동하신다면,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인가? 그러면 그분을 제어하는 법들이 그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여덟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이 지식의 근본이 되는 것에 대하여도 의심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기원에 대한 지식과 우주의 특성에 대한 것에 대하여도 관찰, 자연적 수단만으로 유추한다. 성경적 관점은 말씀으로 세상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자기신과 그분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우주의 기원을 계시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만약 우리 인간의 지적 훈련을 적합하게 수행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계시를 의지하게 된다. 성경적 접근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창조주요 지식의 수여자이며, 진화론적 접근으로 본다면 인간들이 지식을 조절하게 된다. 만약 인간이 지식을 통제하게 된다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존재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마침내 놓을 것인가?

아홉째, 진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단지 무수한 다른 실체들 중 하나의 실체에 불과하여 그분 스스로 역사의 조류에 빠져 있는가? 인간들이 스스로 창조주인가 그리고 낮은 수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비슷한가? 성경적 창조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의 경계를 지켜준다.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인간은 피조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분은 유지하신 분이요, 인간은 유지를 받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한 구분이 인간을 하나님으로 둔갑시키는 유혹을 피하게 해 준다.

 

7. 죄 개념의 모호성과 구원의 필요성 제한

그리스도와 사탄 사의 대쟁투와 구속의 경륜의 주제는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재림교회 신학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은 그것들을 재해석한다. 그들은 대쟁투를 그리스도와 사탄 간으로 보기 보다는 진화 과정에서 연출된 것으로 본다. 구속의 경륜은 하나님의 교통, 임재,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성소봉사, 재림, 지구의 재창조 등이라기보다는 진화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유신론적 진화론이 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수용한다면, 그것은 진화의 과정에서 죄된 상태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죄 있는 인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유신론적 진화론은 그리스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위협한다. 만약 인간이 점진적 진화의 과정에 있다면, 죄라는 사건이 없었을 것이고, 만약 죄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죄로부터의 인간을 구속할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예수께서는 비전을 지닌 지도자나 혹은 도덕적 영향을 끼치며, 점진적 진화의 과정을 추진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면 그분은 인간을 위한 대속물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러한 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영원한 복음을 가르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교회는 사회복음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는 계속되는 진화의 촉진자인 도덕적 클럽이 될 것이다.

 

8. 여호와의 율법 기원과 규범성 제한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의 율법관을 훼손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창조 등 인간 역사에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으로부터 십계명 같은 신적인 선포를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율법 자체가 진화 발달의 과정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외적으로 자연법칙들을 준수하고, 내적으로 인간성의 법칙들을 준수함으로 자기들의 법칙들을 결정한다. 어떤 신적 절대적인 법이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신적 절대적인 법이 없다는 것은 결혼과 안식일 같은 하나님의 법에 관계되는 다른 교리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두 제도들은 창조에 기원을 둔 것으로 하나님의 율법에서 성문화된 제도들이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은 결혼이 하나님의 제도라는 것을 부인한다. 결혼은 문화가 만들어 온 한 한도에서만 구속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선물이라기보다는 진화의 사회적 관습의 결과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도 하나님의 제도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분하는 표가 아니라, 단지 대중 종교의 진화 발달이며 그래서 신에 대한 다른 종교적 반응으로 분류된다.

 

9. 그리스도의 천적 봉사 무용론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늘 성소에서, 그분의 교회에서 그리고 새로운 지구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를 무효화시킨다.

 

첫째, 만약 하나님이 말씀으로 즉각적인 명령 창조를 하지 않으시고, 만약 그분이 직접적으로 인간과 교통하시지 않으시고, 만약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의 타락이 없었다면, 그래서 화해를 가져올 대속물에 대한 필요가 없다면, 확실히 하나님은 하늘 성소에서 우리들을 위한 봉사자로서 그러한 일들을 행하실 이유도 없게 된다.

 

둘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그분의 교회에 보내신 영적 선물들을 훼손시킨다. 예컨대, 예언의 선물의 역할을 숙고하여 보자. 엘렌 화잇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한 6일간의 창조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강하게 지지하셨다. 만약 그분의 강한 강조가 이 점에 있어 잘못 인도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인가?

 

셋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재림교회 종말론의 재해석의 필요성을 야기시킬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 역사에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분명히 그분께서는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재림으로 개입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입의 말씀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는데, 그분께서 부활에서 재창조하실 것인가? 만약 그분께서 에덴동산을 원래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는 새 땅을 창조하실 이유가 있는가? 종말론은 역사 속으로 하나님의 결정적 개입이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종말론이란 반란, 반역, 부의 재분배, 교육 그리고 다른 수단들을 통해 인간이 도덕적이고 의로운 사회를 촉진시키는 더 나은 생활을 위한 어떤 것, 즉 진화의 계속적인 과정이 될 것이다.

 

III. 나가면서

유신론적 진화론과 성경의 창조교리와는 배치된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용어 그 자체가 상호 모순되는 용어의 결합이다. 생명의 기원은 우연에 토대를 둔 자연적 진화의 소산물이던지, 아니면 초자연적 창조권능의 결실이던지 둘 중의 하나일 뿐이지 그 두 가지를 모두 거친 결과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원이 간접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도록 하셨다면 우리는 인간 구원, 즉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대한 확증을 지닐 수 없게 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진화론이 채택한 '우연' 또는 '무목적성개념을 성경의 창조 신앙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를 두고 두 유형으로 나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이 우주와 최초의 생명체를 창조하실 때 진화에 따른 최종 열매를 미리 염두에 두시고, '초기조건'을 정교하게 미리 마련하여 두었다고 본다. , 오늘날의 모든 생물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진화를 해왔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오늘날의 생태계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성서적 창조신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두 번째 유형은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에 가까운 해석을 하는 바, 양자역학적 함의를 도입하여 진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 자체에 신적 섭리와 행위가 개입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진화의 저변에서 유전적 돌연변이가 '불확정'적인 양자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고 있고, 이 불확정성은 하나님에 의해 양자세계에 부여된 본질적인 법칙이므로 하나님께서 천연법칙을 깨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지대로 진화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요컨대, '우연'이라는 양자적 자연법칙 안에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진화 과정을 조정하실 수 있으므로 성서적 창조신앙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의 두 유형은 어떤 경우이든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인정하고 있으나, 일단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에 의한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면, 더 이상 무작위적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해 초기의 단세포 형태로부터 지금의 다양한 생물계를 이루었다는 가설적 설명 대진화적 설명을 수용할 필연성이 없어진다. 우리에게는 수백 만 번의 변이 없이 각 생물을 그 종류대로 즉각적으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

 

과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합당한가? 비록 유전적 변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더라도 자연선택이 제 기능을 하려면 결국 수많은 변이 형태의 생물들이 생겨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변이적 생명체들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절하게 적응될 후손 하나님이 의도하신 생물이 등장하기까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지극히 잔인한 메커니즘의 '희생물' 역할을 한 셈이다. 그 수많은 생물들이 정말로 변이체의 희생 과정의 소산물이라면 그러한 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 이러한 비평에 대하여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두 가지로 답하고 있다. 그 하나는 '사랑,' '잔인,' '가치' 등의 의미는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차피 지금도 그러한 적자생존이 생태계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답변이다. 첫 번째 답변에 대해서는 비록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 기준과 감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품성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에 답변에 대해서는 분명 지금의 생태계는 아담의 범죄 이후이고, 하나님의 창조는 그 이전이므로 그 둘을 동일시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반박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에 의한 창조라는 개념은 성서적 창조 신앙과 융합되기 어려운 논점이 될 것이다.

 

재림신도의 믿음이 만약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믿음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입의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교통하셨고, 우리 가운데 살으셨고, 우리 대신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승천하셨고, 우리를 자기에게 모으시기 위해 두 번째 오시며,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새 땅을 재창조하시며, 마침내 죄를 멸망시키실 분이 만약 존재하시지 않으신다면, 그 분은 경배를 받으실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진화의 오랜 과정을 통해 질질 끌고 있는 어떤 신을 경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의 그 하나님, 우리와 함께 교제를 원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배한다.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구분시키는 것이 된다.

 

참고 자료:

 

Ed Zinke, "The Role of Creation in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in Creation, Catastrophe and Calvary: Why a Global Flood Is Vital to the Doctrine of Atonement, ed. John T. Baldwin (Hag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n., 2000), 159-166.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