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 모델론 개요

 

(Avery Dulles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로 명성을 날려 왔다. 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1940년에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하버드 법대에서 1년 반 공부하다가 제2차 대전 시 해군에 복무하였다. 그 후 가톨릭교회로 개종, 제수이트회에 입단하였으며, 1956년 사제로 위임 받았다. 1960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과 유럽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회의 모델론계시모델론은 도움이 되는 자료에 속한다. 여기서는 그의 계시 모델론 개요를 원용하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I. 명제적 계시모델

1. 보수적 복음주의

(1) 주장자들

이 명제적 계시 모델론의 대표적인 학자는 Princeton SeminaryBenjamin B. Warfield(1851-1921)이다. 보수적 복음주의 학자들이 이 모델을 지지 강조한다. Gordon H. Clark, James I. Packer, John Warwick Montogomery, Carl F. H. Henry 등이다. 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1978년에 4000어로 된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은 명제적 모델 입장에서 작성된 문서이다.

(2) 주장 내용

a. 하나님께서는 천연계를 통하여 자기의 뜻을 알린다. 일반계시(자연계시)의 가능성을 신봉한다.

b.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과 원죄의 결과 인간은 천연계와 자연신학으로부터 확실하고 참된 구원하는 신() 지식을 얻을 수 없다.

c. 천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오로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도록 함에 있다(1:20). 초자연적(특별) 계시를 통한 구원하는 진리의 효험적 지식이 필요하다.

d. 초자연적 계시는 구체적으로 예언적 이상과도 같은 신적 현현 현상들(theophanic phenomena)과 예언자와 성경 기자의 역사적 연구, 추리 및 문학 작품 구성 시 성령의 초자연적 감동과 지도가 수반된다.

e.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계시의 최고 형태이다.

f. 계시와 영감은 밀접한 관계를 지녔으며 때로는 동의어적이다, 계시는 주로 정보의 전달과 교류에, 영감은 기록에 관계된다.

g. 성경 원본의 무오론과 축자영감론을 신봉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원본 무오 대상에 대한 인식의 변모를 보여주고 있다.

Harold Lindsell--원본 무오론

Bernard Ramm--구원의 지식(역사적, 과학적 지식은 제외)에서의 무오론

Donald G. Bloesch/Paul K. Jewett -- 주요 신학적 주장 무오론

h. 성경은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타당성을 지닌 일련의 명제적 진술, 선언이다.

i. 계시의 성문화(inscripturation)를 중요하게 여긴다.

j. 성령의 내적 증거를 강조한다.

 

2. 로마가톨릭교회 자연계시와 초자연적 계시론

로마 가톨릭신학에서는 계시를 자연적 계시와 초자연적 계시로 구분한다. 이런 계보에 속한 학자들은 Riginald Garrigou-Lagrange, Christian Pesch, Hermann Dieckmann 등이고 Vatican I 회의도 이런 구분을 따르고 있다. 자연적 계시는 행위(deeds), 초자연적 계시는 말씀(words)으로 주어진다. 자연적 계시는 인간이 타락 상태에 있어서도 창조주이신 인격적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이성이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자연 종교의 진리들을 얻을 수 없어 특별계시를 필요로 한다. 삼위일체, 화육과도 같은 신비를 아는 데는 특별계시가 절대로 필요하다.

초자연적 계시로 개념적 지식이 언어 매체로 전달된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의 내용을 제공한다.

계시는 행위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취하고 있다. 계시는 성서시대 활동적인 예언과 영감, 예수의 가르침 등으로 구축된 신앙의 집합 저장이다. 계시는 축적된 것이 신자들에게 교류되는 과정을 통하여 확장된다. 요컨대, 계시는 성경과 사도적 전승(성전)에 담긴 명제적 진리의 집합체이다. 이 계시가 교회에 위탁되었고, 교회의 사제(교황)는 그것을 권위 있게 가르치는 권위를 행사한다(magisterium).

로마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의 성경충분론을 배척한다.

 

3. 명제적 계시의 장단점

(1) 장점

a. 명제적 계시론은 성경=하나님의 말씀라는 등식으로 인한 권위적 특징을 지닌다.

b. 명제적 진리가 전승에 기초되어 신앙 공동체의 내적 응집성을 기하는 일에 기여한다. c. 교회의 통일성과 성장에 기여하는 실제적 유익성을 준다.

d. 교회는 이런 계시관으로 선교의 동력을 얻는다.

(2) 문제점

a. 성경이 명제적 계시인가 하는 논란이 계속 일고 있다. 계시 내용은 그 전부가 명제 집합체가 아니다.

b. 성경은 명제적 무오성을 직설적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다. 문자적 무오론은 논란 대상이 되고 있다. 각양 우화적, 영적 해석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c. 성경 이외에 교회가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교도권, 회의, 전승에 의구심이 제기 되고 있다.

d. 근대 성서비평학은 성서 이외의 여러 유사한 문학적, 역사적 자료의 영향을 주장한다.

e. 무조건적 순복을 요구하는 권위나 주장이 현대인간들에게는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f. 명제적 진리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각 교단, 종파들의 교리적 불일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4. 타종교에 계시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교는 초기부터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여 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간다. 그들에게도 계시가 주어졌는가? 만일 그들에게도 계시가 주어졌다면, 그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켜 온 주제들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계시의 완성 및 총화는 그리스도를 그 중심 메시지로 선포하고 있다. 동시에 그리스도교 복음은 모든 인류를 위한 좋은 소식으로 선포한다. 여기에서 특수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에 긴장 문제가 야기 된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계시가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는 것은 긴장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성경 이외에도 명제적 계시의 길이 있느냐를 놓고 보수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 신 스콜라주의자들 사이에는 견해 차이가 있다.

 

(1) 보수적 복음주의

a.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오로지 성경을 통하여서만 특별계시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행전 14:17, 17:22-31; 로마서 1:18-20; 2:15과 같은 성경 본문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는 보통 인간들에게 일반계시로 증거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반계시에는 구원이 없다.

b.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

1974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열린 복음주의 대회, 1차 세계복음화국제대회(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대회가 열린 장소의 이름을 따서 로잔회의(Lausanne Congress)라고 부른다.)에서는 (당시 의장: 미국 침례교의 빌리 그래험 목사; 참석자는 150여개국에서 온 3천명의 각국 대표들) '이 땅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라'(Let the earth hear His voice)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로잔언약에서 선포된 성경의 권위와 능력 (The authority and power of the Bible)”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되었음과 그 참됨과 권위를 믿는다. 성경은 그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유일한 기록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있어서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유일의 정확 무오한 법칙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그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경말씀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불변하기 때문이다. 그 계시를 통하여 성령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성령은 어느 문화 속에 있든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깨우치사 이 진리를 그들의 눈으로 친히 새롭게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모양의 지혜를 온 교회에 더욱더 풍성하게 나타내신다. (딤후3:16, 벧후1:21, 10:35, 55:11, 고전1:21, 1:16, 5:17, , 18, 3, 1:17, 8,, 3:10, 18).”

 

로잔 언약은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 (the uniqueness and universality of Christ)”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우리는 전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구주도 오직 한분이요 복음도 오직 하나임을 확인한다. 우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이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의 불의로써 진리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여하한 형태의 혼합주의와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신다는 뜻에서 진행된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이를 거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신인(神人)으로서 죄인을 위한 유일한 대속물로서 자신을 주시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시다. 예수의 이름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은 없다.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멸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어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할 것을 원하신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구원의 기쁨을 거부하며 스스로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떠난다.

예수를 "세계의 구주"로 전한다 해서, 반드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모든 종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공한다고 보장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예수를 "세계의 구주"로 전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죄인들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며 마음을 다한 회개와 신앙에 의한 인격적 헌신으로 예수를 구주로 맞이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다른 이름위에 높임을 받아 왔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모든 입이 그를 주로서 고백하게 되는 날을 간절히 고대한다. (1: 6-9, 1:8-32, 딤전2:5, 6, 4:12, 3:16-19, 벧후3:9. 살후1:7-9, 4:42, 11:28, 1:20, 21, 2:9 -11).

 

로잔 언약에서 우리는 또한 여하한 형태의 혼합주의와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신다는 뜻에서 진행된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이를 거부한다는 입장에는 타 종교, 이교도들은 마음이 죄로 어두워져 진리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2) 로마가톨릭 신 스콜라주의

1850-1950년대 로마가톨릭 신 스콜라주의자들은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처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확연하게 구분하지 않는 대신에 종교를 자연적 종교와 초자연적 종교(계시 종교)로 구분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연 종교에 낙관적 견해를 피력한다. Gerardus van Noort 는 자연 종교 근거를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다. 초자연 종교는 자연종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 종교에 어떤 무엇을 부가하여 완성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자연 종교는 원시적 계시가 들어 있다고 한다. 그 시원은 아담과 성경에 나오는 모세 이전의 부조들에게 주어진 것들과 연계된다고 본다. Noort 는 오늘날 인류학자들의 조사를 원용하면서 순수성을 지켜 온 원시인들은 이런 원시 계시를 보존하여 오고 있다고 한다.

 

이런 원시계시의 가설은 명제적 계시 개념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는 보편성이 없는 가설일 뿐만 아니라 명제적 계시를 너무 느슨하게 보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더구나 자연종교에서 죄로 인하여 왜곡 손상된 인간이성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부풀렸다고 보아야 한다.

 

II. 역사 모델 (Revelation As History)

 

A. 명제 모델의 한계와 역사 모델 필요성

 

명제 계시모델론은 계시에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도 그 역사가 완전한 역사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계시는 역사 안에서 일어난다. 또한 역사적 사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 역사의 운동장 밖에서 계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 사건들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계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 기억이 전수된다. 이 전수된 기억의 축적은 계시의 증대가 된다. 계시는 어떤 역사적 사건들을 입증하고 해석한다.

역사 모델은 명제 이론이 거룩한 역사적 사건들 자체를 계시로 보는 것을 부인한다고 비판한다. 명제적 말씀에 담기지 않으면 계시로 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명제이론은 너무 권위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래서 19-20세기 신학자들 중 상당수가 계시는 말씀(words)보다는 행위(deeds)를 통하여 야기된다고 보았다. 역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매체가 된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을 나타낸 일련의 사건들이 계시의 내용이 된다. 계시의 형태는 행위 또는 사건들이 된다. 케류그마는 역사적 사실, 하나님의 초자연적 행위에 의존한다.

 

역사로서의 계시에 관한 증언들을 몇 가지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John Baillie (1956)-- “하나님은 행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David Kelsy (1975)--“계시는 정보 전달이 아닌 역사적 사건들에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James Barr (1963)--미래 시대의 역사신학자들은 20세기 중엽을 가리켜 역사 안에 있는 계시의 시대(the revelation-in-history period)'라고 칭할 것이다.

 

B. 역사 계시 모델의 제 양상

역사로서의 계시 모델에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그 하나는 Oscar Cullmann의 구원사적 시각(salvation history)이고, 다른 하나는 Jean DanielouW. Pannenberg의 보편사적 시각(universal history)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학자들의 사례까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영미신학에서의 사건으로서의 계시 사상가

(1) William Temple, Nature, Man and God (1949)

계시는 역사적 사건들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어서 그의 뜻을 자연을 통하여 나타내기에 적합지 않고, 오로지 인격적 존재, 즉 인간 역사 단계들에서 배우들을 통하여 나타내신다. 역사적 인격들과 사건들은 진리의 원천이 된다. 신조와 교리는 그것들이 파생하는 그 이전 사건 계시에 의존한다. 사건들이 지닌 의미는 풍요하다. 엄격히 말해서 계시된 진리란 없다. 교리와 신조 형성은 계시가 발견되는 곳을 지적하는 신호표에 불과하다. 성경은 그자체가 계시가 아니고 계시의 기록에 불과하다. 성경은 무오한 것이 아니다. 사건으로서의 계시가 하나님을 드러낸다. 계시는 선지자의 마음을 조명하여 나타내진 것을 선지자가 분별케 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사건을 관장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읽어낼 수 있도록 비추어 주신다.

 

(2) G. Ernest Wright, God Who Acts (195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의 기록이다. 구약학자 Wright말씀하시는 하나님(God Who Speaks)"보다 행동하시는 하나님(God Who Acts)”을 선호한다. 그러나 사건은 그 참된 의미가 이해되기 위하여서 해석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2. Oscar Cullmann, Salvation in History (1967)

오스카 쿨만은 구원사적 시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전 역사의 중심점에 서 있다. 특히 그의 십자가-부활 사건은 향후 확장되어 그리스도교회의 선교의 동력이 되어 파루시아까지 전 역사에 의미를 부여한다. 교회는 계시의 담지자로서 신적 구속 활동의 도구가 된다. 쿨만은 사도행전 17:22 이하 기사와 로마서 1:18-20을 아브라함 이래 이방인들이 창조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마음을 닫아 버린 것으로도 해석한다.

 

성경 계시는 선택된 사람들을 다루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이다. 구원의 메시지가 땅 끝까지 전해져야 된다. 구원사에는 세 가지 사건들이 나온다.

(1) 일어난 그대로의 사건(The naked event)--신자, 불신자에게 모두에게 꼭 같이 보인다.

(2) 사건을 통하여 신적 경륜이 예언자에게 드러남(The disclosure of divine plan to the prophet through the event)

(3) 예언자의 마음에 새 사건으로의 연상(聯想)(The association of the new event, again in the mind of prophet)

 

계시는 사건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영감된 해석과 함께하는 사건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예언자에게 사건을 해석하도록 계몽시킨 의미이다. 사건은 해석에 선행한다. 그러나 해석은 본질적이다. 그렇다고 구원사 사건들이 자기 해석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시각에서 사건을 음미(명상)할 때만이 초자연적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역사가는 예언적 계시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신앙적 해석을 못 한다. 이스라엘이 선민이라던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역사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역사가 아닌 역사에 관한 계시된 예언이다. 성경이 정확하게 기록되어서 계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진술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성서 기자가 신화를 사용할 때 구원사 적 입장에서 하는 것이다. ,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전달키 위하여서다.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중심점이 된다.

Ernest Treoltsch는 쿨만의 이런 시각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3. Jean Danielou

Danielou는 구원사적 시각을 수정하여 비 성서적 종교들 세계에 계시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본다. 그는 역사적 계시가 성서 종교에 주어지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기를 세계, 양심, 인간의 영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계시하셨다고 본다. 이는 일종의 하나님과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 사이의 우주적 언약(the cosmic covenant) 같은 성격을 띈 것으로 전 인류에게 확장되어 간 것이 된다. 이 우주적 언약은 우주를 통하여 나타내는 것이어서 불완전한 것이지만 은혜의 언약이 된다. 성경 그 자체가 성서 속에 나타난 인물들(멜기세덱, , 스바 여왕 등) 같은 많은 이교도의 거룩성을 칭송하고 있으며, 비록 부패하여간 것이긴 하나, 이들이 자연종교의 물줄기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 같은 시각은 상상적 추리 성격이 짙다.

 

4. W. Pannenberg, Revelation As History (Offenbarung als Geschichte)

 

판넨베르그는 구원사적 시각에 비판적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연구하는 것이다. 계시 이슈는 신학의 중심 논제가 된다. 특히 역사로서의 계시(Revelation as history)”가 그 초점이 된다. 계시는 역사의 어느 단편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보편역사(universal history), 즉 세계의 전 역사에서 발견된다.

계몽주의 이전에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는 계시를 성경과 동일시하는 계시의 문자적 진술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계시와 영감은 동의어적이 되었고, 계시는 초장연적인 감추어진 진리의 전달로 보았다. 그러나 이른바 보편적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의 비판 아래에서 정확 무오한 진리의 체계라는 계시 개념은 설 자리가 없었다. 성서 비평학의 칼날 아래에서 성서의 문자적 의미는 더 이상 역사적 내용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 200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와 자연주의적 성경이해에 따른 텍스트와 배후의 사건 사이의 불일치 현상들이 강조되는 상황 속에서 판넨베르그는 하나님의 말씀 신학에 안주할 수 없다는 절박감을 갖고 합리적 방법을 추구하였다.

판넨베르그는 Revelation As History에서 계시 교리에 대한 교리적인 논제(Dogmatic These on the Doctrine of Revelation)"를 다루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논제 중 몇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자기 계시--계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2) 간접계시론--성서의 증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신적 현현의 의미로서의 직접적인 형식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행동의 수단에 의해서 수행된 것이다. 계시는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일어난다.

(3) 계시 이해론--계시는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된 것이 아니라, 계시하는 역사의 마지막에 이해되는 것이다.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이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판넨베르그의 이 같은 인식은, Danielou와 달리, 보편사를 통한 계시 사상이 그리스도 사건으로 제한된 것을 보여 준다.

(4) 전달된 텍스트와 현재 사이의 차이는 양자를 연결시키는 역사의 투영에 의하여 확립 내지 폐기되어진다. 이는 가다머(Hans-Georg Gadamer)지평의 융해적 접근방식이다. 과거의 지평은 고정되어 있으나 해석자의 자기지평은 이동, 확장될 수 있다. 그 차이는 우주적인 폭넓은 유일한 체계(지평) 안에서 합병될 때 극복된다.

(5) 신성의 특별한 표명과는 달리 역사적인 계시는 보는 눈을 가진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것은 우주적인 성격을 가진다. 여기서 신앙과 이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사건이란 자기 해석적이다. 사건 자체 안에 의미를 갖추어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예언적 정시(呈示)로 보완 명료화될 필요가 없다. 그 의미 포착을 위한 조명이 필요 없다. 인간의 통상적인 이성으로 자연적 방법에 의하여 역사의 계시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다. 따라서 신앙이 계시에 선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계시는 역사의 광장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 중에 살아 있는 신뢰와 소망의 의미에서 신앙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C. ·단점

1. 장점

(1) 하나님의 행동 강조로 신앙의 실제성의 가치를 강조한다.

(2) 명제 이론이 등한시하는 역사적 사건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3) 전 역사를 한 묶음으로 보아 명제 이론보다 더 유기적이다.

(4) 귄위주의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 날 수 있다.

 

2. 단점

(1) 말씀을 사건 다음에 오는 제2차적인 것으로 본다.

(2) 성경에는 말씀 계시가 엄존하고 있으며, 명제적 진리의 교류가 나오고 있다.

(3) 교회통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로 원용되고 있다.

(4)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적 권능을 무시하고 있다.

 

III. 내적 체험 모델(Inner Experience Model)

 

A. 체험 모델의 존립 근거와 그 신학자들

1. 존립 근거

명제적 계시 모델과 역사로서의 계시 모델이 지닌 공통점은 계시의 객관적 측면에 집중, 강조하는 점, 계시가 말씀이나 사건(사실)을 통하여 교류되는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점, 계시가 전달된다는 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끝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모델들은 문제점들을 지녔다. , 비 그리스도인들과 비 성서적 인종들의 종교적 유산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이 없는 점, 각 세대가 하나님께 신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는 점, 기독교 신앙을 기록된 성경 말씀에만 집착하는 점이다. 여기서 근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계시가 제3의 접근 방식인 내적 체험에서 발견된다고 보는 시각이 등장한 것이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각 신자들에게 내적으로 교류하시는 내적 체험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2. 신학자들

(1)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

내적 체험 모델의 사상적 계보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태두 Friedrich Schleiermacher(1768-1834)와 자유주의 신학자 Albrecht Ritschl의 영향이 지대하다. 슐라이마흐는 종교를 어떤 깊고 심오한 의식인 감정(Gefühl)으로 보았다. 진정한 종교의 핵심은 유한존재가 무한하신 분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는데 있다. 그는 종교를 신적인 계시에 의한 정보의 체계가 아닌 믿는 자들의 이런 내적 체험으로 본 것이다.

Wilhelm Herrmann 는 계시를 예수 상에 의하여 야기된 하나님과의 교제의 내적 느낌으로,

Auguste Sabatier는 계시를 하나님이 친히 고취하시는 경건 중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현현으로 각각 보았다.

(2) Catholic Modernists

George TyrrellSabatier의 영향을 받아 계시를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임재에 대한 직접적인 내적 체험으로 보았다.

(3) AnglicansEvelyn Underhill 등은 계시를 모든 종교의 기초가 되는 신비적 요소로 보았다.

(4) 스웨덴의 루터란 대감독 Nathan Soederblom은 신비주의 모형론을 발전시켰다.

(5) 미국의 이상주의 철학자 William Ernest Hocking은 종교를 체험으로 보았다.

(6) 영국의 H. Wheeler, C. H. Dodd, John Hick은 초월자 의식을 강조하였다.

 

(7) Karl Rahner(1904-1984)

Roman Catholic의 신학자 Karl Rahner는 계시를 은총의 체험으로 보았다. 그는 초월적 신학(transcendental theology) 패턴을 추구하였다. 그는 역사적 보편주의에 상징적 계시 사상을 접목시켰다. 종교란 하나님의 절정적 선물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기하며 탐색하는 기억의 표현이 된다.

초월적인 하나님은 거룩한 신비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라너는 계시를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하였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연적, 초자연적 성향인 초월적 계시(transcendental revelation)이다. 이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비테마적이며 비반추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암묵적 지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초월적 계시는 개념을 형성하거나 사상적으로 내용을 반추해 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초월적 계시는 수신자에게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거룩한 신비에 이르게 한다.

다른 하나는 범주적 계시(categorical revelation)이다. 이 범주적 혹은 실제적(real) 계시는 역사 속의 사건들이나 말씀, 상징 등을 통하여 주어지는 공개적, 공적, 교회적으로 구성된 계시이다. 초월적 계시와 범주적 계시는 상호 의존적이다. 범주적 계시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내적 실재를 드러낸다. 이리하여 라너는 계시를 상징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로마가톨릭의 미사 신학을 심화시킨 것으로 비쳐진다.

 

B. 계시의 형태

내적 체험 모델은 개인적 체험들이 다르기 때문이지 다양한 형태들을 보여 주고 있다.

1. 기본 원칙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다. 계시는 내재적 하나님에 대한 즉각적 내적 체험으로 구성된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분이 각 사람의 안에 계신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17:28)

은혜란 각 사람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역사이다.

2.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라는 이원론적인 구분 접근 방식 배제

내적 체험 모델은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라는 이원론적인 구분 접근 방식을 배제한다. 어떤 종교이든지 신적 체험은 항상 있는 것이다. 종교 개념이나 계시 개념은 상관관계를 지녀 상호 불가분리적이다. 종교는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주관적 계시가 되고, 계시는 하나님 안에서 객관적 종교가 되기 때문이다. Söderblom에 다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참 종교 신앙이 발견 되는 곳에서 발견된다.

3.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예리한 구분 배격

내적 체험 모델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예리한 구분을 배격한다. 계시란 특정 인간에게만 임한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적으로 전 인류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어 일반화 된다.

4. 내적, 인격적 계시

계시는 내적이고 인격적이다. 계시는 외부에서 내부로 지향하여, 그 내부에서 역사하는 현상이다.

 

C. 계시의 내용

계시의 참된 내용은 추상적, 교리적인 진리의 정보 교류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다. 계시는 이 하나님과의 연합 체험이다. 이 연합 체험이야 말로 영생이 된다. Sabatier에 따르면, 계시는 인간 안에 있는 신의식을 창조하고 정화시키며, 점진적으로 명료성을 띄어 간다.

계시된 교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계시된 교리가 있다 해도 그 계시된 교리와 계시의 수용인 신앙 사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교리라는 것은 내적 체험을 상징화시킨 것이다. 교리는 상징, , 사도적 계시의 핵 주위를 싸고 있는 보호막에 불과하다. 과학적 진리와 상징적 진리를 구별하는 근대주의자들처럼, 내적 체험론자들은 체험적 진리와 인격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비전적인 진리를 구별한다.

 

D. 계시의 권위와 판단 기준

1. 성경의 권위는 인정하고 있으나, 명제적 진리의 계시 개념이나 무오론에 관심이 없다.

2.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이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거룩한 진리가 소개 내지 중보된다. 선지자들은 종교적 천재들이다. 이 선지자들의 체험을 후대 인간들이 시험, 확증, 및 개정하여 왔다. 이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생애와 가르침에서 그 정점(頂点)을 형성하고 있다.

3. 계시에는 등급이 있다. 이는 체험의 질적 차이를 전제한 것이다.

4. 계시의 판단 기준은 체험 그 자체의 질에 있다. 계시는 증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내적 반응이 있다. 따라서 계시의 판단 기준은 인간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심령이 반응하는 것이 된다. , 프로테스탄트의 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ium (the inner testimony of the Holy Spirit) 사상을 부각시킨다.

 

E. ·단점

1. 장점

(1) 내적 체험 계시 모델은 합리주의적 사고가 휩쓸어 인간의 정서가 매 말라 가는 풍토에서 각광을 받았다. 이 모델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회의주의 광풍에 대한 답변 역할을 하였다.

(2) 이 모델은 신앙적 헌신을 강조한다.

(3) 타 종교와의 대화의 가교를 위한 이론적 틀을 마련하여 준다.

 

2. 단점

(1) 자기 이론의 근거를 위하여 성경을 전체적으로 도출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인용 활용한다.

(2) 선지자의 계시에 대한 자기 이해를 무시하고 있다.

(3). 종교적 천재들의 괄목할만한 종교적 체험을 앞 세운 것은 그런 것이 약한 일반인에게는 설득력이 약하다.

(4) 계시된 정보가 들어 있는 성경을 무시하므로 문제 해결의 답을 찾기가 어려운 혼란을 야기한다.

(5) 계시 수용자의 개인적, 감정적 판단에 기초한 특성을 지녀 객관성이 결여된 개인주의, 감정주의라는 극단화의 길을 피할 수 없다.

(6) 교리적 차이가 무의미하게 되어 성서적 진리체계가 별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7) 체험의 의미가 협의화되어 간다. 체험은 즉각적, 자발적, 개인적인 것이어서 무엇으로 그 타당성을 판단할 것인지 기준이 모호하여 진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tabla rasa 같은 것인가라는 물음이 일어난다.

(8) 계시가 개인적인 체험을 초월하는 점을 무시한다.

(9) 개인적 체험에서 경전이 도출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 일어난다.

 

IV. 변증법적 임재(현존)으로서의 계시(Revelation As Dialectical Presence)

 

A. 등장 배경과 대표 학자들

1914년 이래 체험 계시 모델이 빛바래 갔다. 체험 모델은 역사적 예수 재건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하여 정치, 경제적 혼란이 극에 달해 인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비관론이 팽배하여져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인간의 내적 체험에 기대하는 것 보다는 죄에 대한 예민한 의식의 필요성도 점증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위기신학(crisis theology),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이 등장한 것이다. 명제와 역사의 객관적 계시가 체험의 주관적 계시로 발전하였다가 이제는 그것들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보아 변증법적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변증법은 헤겔적이라기 보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이라는 질적 변증법이다.

변증법적 임재로서의 계시 사상의 대표자들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S. KierkegaardDostoevsky의 영향을 받은 Karl Barth, Martin Buber와 인격주의 영향을 받은 Emil Brunner, Heideggar의 영향을 받은 Rudolf Bultmann가 그런 부류에 든다. 바르트는 별도 항목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브루너와 불트만의 게시 사상을 보기로 한다.

 

B. Emil Brunner(1889-1966)의 계시 사상

브루너는 변증법적 신학을 주도한 초창기의 신학자이다. 계시와 이성(Revelation and Reason), Truth As Encounter를 저술하였다.

1. 성경적 인격주의

슐라이어마흐의 내재적 체험신학을 반대하였다.

하나님은 절대적 주어(주체)로서 자기의 절대적 신비를 알리신다. 게시의 진리는 주관적도, 객관적도 아니다.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이다. 인간 (I)” 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당신(Thou)”를 만나는 것이 계시이다.

계시는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당신(I-Thou )” 의 만남과 동일시하였다. 그는 Martin Buber의 사상을 따라서 진리와 지식의 두 가지 종류, , ‘그것-진리(it-truth)'당신- 진리(Thou-truth)'의 차이를 식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므로 그에 관한 진리나 지식은 반드시 인격적이 되는 Thou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2. 만남으로서의 계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그의 인격적 임재 안에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가 실재화 된다. 따라서 계시는 명제적인 것도 진리의 정보도 아니다.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신비에는 어떤 말이나 글도 부적합하다. 계시는 결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고, 생명을 부여하고 생명을 회복시키는 교통(communion)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다른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3. 성경의 위치

(1) 성경은 신학과 신앙의 근거를 제공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증거가 된다.

(2) 성경은 축자적 영감으로 된 무오한 명제적 말씀이 아니다.

(3) 성경과 계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4) 성경은 계시의 독특한 매개 도구가 된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워 있는 구유가 된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 되지만, 동시에 연약함과 불완전함으로 영향을 받는 인간의 메시지가 된다.

(4) 브루너는 최소한의 자연신학을 인정하였다. 그는 자연과 은총에서 바르트와는 달리 자연 안에 어떤 계시도 없다고 한 바르트에 반대하였다.

브루너의 일반계시론은 개혁신학에 대한 현대적 조명도 된다.

 

C.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불트만은 실존철학자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상황이라는 시각에서 해석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바르트와 같이 개인에게 전하여진 kerygma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로 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kerygma이다.

신비하고 감추어 있는 하나님인 동시에 계시된 하나님이다(the concealed Revealer). 계시에서 일어난 지식은 직접 전달 될 수 없다. 계시는 계시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도달 가능하다. 계시 내용은 그리스도의 사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난다. 진리는 교리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비신화화를 주장하면서 실존적 의미를 강조한 나머지 초자연적 현상을 신화로 본다.

 

D. 문제점

1. 이 모델은 이론적으로 내적 응집력의 결여를 초래한다. 이는 계시에 사상이나 개념이 도외시된 결과이다.

2.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그리스도와의 불일치 문제가 대두된다.

3. 종교 사이의 대화를 위한 계기가 약하다.

4. 명제적 계시를 증거하고 있는 성경의 기록을 도외시하고 있다 (2:2:22, 47).

5. 계시는 하나님을 만남과 진리의 체계로 되어 있다(삼상 3:21; 22:14; 11:25-27).

 

V. Karl Barth의 성경 및 계시관

I. 삶의 궤적

Karl Barth(1886-1968)은 스위스 바젤 출신 개혁파 신학자로 20세기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20세기 모든 신학은 죽어가는 교회에 생명을 부여한 바르트로부터 시작해야 하리만큼 그 위상이 압도적이다. 20세기 신학은 두 사람의 Karl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평이 있다. 그 한사람이 karl Barth이고 다른 한 사람은 20세게 가톨릭의 최고 신학자 Karl Rahner이다.

 

그는 19세기 팽배한 자유주의 신학적 훈련을 받았다. 궁켈과 하르낙의 강의를 들었고 헤르만의 강의를 들으면서 감동도 받았다. 바르트는 1911-1921Safenwil 목회 시절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1918<로마서 강해> 저작 출판과 <사회 속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강연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학적 자유주의자와 종교사회주의자였다. 1921-30년 괴팅겐, 뮌스터에서 대학 교수로 지내면서 <시간들 사이에>라는 잡지 발행을 하면서 변증법적인 신학자로 알려 졌다. 1930-35년 히틀러와의 투쟁기를 보냈다. 그는 초기 히틀러 저항운동의 불을 붙였다. 1930년 본 대학으로 옮긴 후 <오늘의 신학적 실존>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히틀러와 투쟁을 계속하였다. 1934년 고백교회의 신학선언인 <Barmen 신학 선언>을 발표하였다. 본 대학에서 해직 당하고 바젤로 돌아갔다. 1932-1962년에는 바젤대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신학적 원숙기에 접어들어 <교회교의학>의 저술 활동을 하였다.

바르트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들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1915년 스위스 사회민주당에 가입과 신학적 변환

이 입당 사건으로 그는 자펜빌의 붉은 목사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1970년대에 바르트는 사회주의자였는가 하는 이슈가 등장하였다. 사회주의를 복음의 불가피한 적용으로 보았다. 공장 노동자들의 의식화 운동을 하면서 신자들에게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19148WWI 발발 시 독일의 93명의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 선포를 지지하는 성명서 발표하였다. 이 명단에 존경하는 헤르만과 하르낙도 들어 있어 바르트는 더 이상 윤리학, 교의학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하고 19세기 신학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았다. 그동안 바르트는 사회주의를 하나님 나라의 구현 방법으로 보았으나 빌헬름2세가 유럽에 만연된 자본주의 이념을 독일의 사회주의 이념으로 구하여야 한다고 하여 사회민주주의를 전쟁을 위한 이념적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보고 역사변혁은 사람이 아닌 예수를 통하여서라는 입장으로 돌파구를 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자다.” 개인과 역사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사상을 <로마서 강해> 1판에서 강조하여 하나님 중심의 신학을 태동시켰다. 2판은(1922) 하나님과 세상의 철저한 단절을 강조하였다. 두 사이에는 무한과 유한의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그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2판은 위기와 심판의 신학을 조명하였다. 인간적인 것은 하나님과 부딪히면 죽는다.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역사일 뿐이다.

2. 1923년 독일 신학의 최대의 원로격인 베르린대학교의 하르낙 교수와의 논쟁

괴팅겐대학 교수로 재직 중의 이 논쟁을 통하여 일약 유명 인사로 부각되었다. 바르트는 신학은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신학의 과제를 설교로 보았다. 역사 비판의 한계점도 제기하였다. 하르낙은 신학교 교직을 설교직으로 바꾸는 행태로 비판하고 신학을 함에 있어서 어떠한 전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하르낙은 학문적 견지에서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전에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 설교하는 예수와 역사적 예수는 다르다는 입장이었다.

3. 나치 히틀러와의 투쟁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여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적 대부가 되었다. 현실 정치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석하였다. 신격화된 히틀러와 국가 사회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하여 당대에 왔다는 시각을 배척하여 히틀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가 증언하는 단 하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바르는 브룬너의 자연신학을 배척하였다.

 

4. 1935-1962 <교회교의학> 출판(9,000 )

이 저술에서 그는 말씀, 하나님, 창조, 화해, 구원 등을 다루었다. 13권의 방대한 그의 교회교의학은 미완성의 저술이다.

 

II. 바르트 신학의 핵심, 신학 사상의 변천, 및 적대 신학

1. 신학 핵심

바르트의 신학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것을 신학의 전부로 보았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본성이나 경험 안에 내재되어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은혜로 허락하기 때문에 비로써 가능한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의 신학을 펼쳤다.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음악을 통하여 희열을 맛보았다. 바하의 음악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더 우월한 것으로 보았다.

2. 바르트 신학의 변천--김명용 교수는 바르트 신론에서 6번의 신학적 변천이 있었다고 분석하였다. 일반적으로 바르트의 초기신학과 후기 신학 사상은 다르다고 보고 있다.

3. 바르트의 적대 신학

(1) 19세기의 문화 기독교--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옷을 입혔다고 보았다.

(2) 경건주의와 율법주의

은총의 신학자 바르트는 경건주의와 율법주의를 비판하였다. 로마서 7장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로 단정하여 그 지옥성을 파 해쳤다. 경건주의자들이나 율법주의자들은 용서도 없고 은총도 모르는 자들로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는 자들이라고 단정하였다.

(3) 로마 교황--교황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교황의 영은 한 지붕 아래 살 수 없다고 보았다. 바르트 신학 전기에 교황은 적그리스도였다. 그러나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초청을 받아 교황을 만난 이후 색각을 달리 하였다. 로마가톨릭신학자들은 바르트가 가톨릭 신학에 대한 오해 내지 부정확한 이해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로마가톨릭에 대한 그의 부정적 시각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전적으로 지배하여야 한다는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III. 성경 및 계시관

바르트는 Kirchliche Dogmatik I/1-2에서 말씀론(계시론)을 다루었다.

1.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는 표현은 바르트의 신학의 별명이 되었다. 인간 이성에 토대를 둔 신학을 탈피하여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는 것은 돋보이는 점이다. 그는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인간 사이에 일종의 유비를 시키고 있다.

성경상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하시는 행위와 구별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언어(speech)이다.이 하나님의 언어는 하나님 자신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근거는 하나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자체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는 일은 계시를 객관화하는 것이고 물질화 시키는 일이다.”

2. 하나님 말씀의 삼중 양태

1) 계시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

2) 기록된 말씀인 성경

3) 선포된 복음인 설교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계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빛이며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 하나님의 은총이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히틀러와 싸우고 있을 때는 이 세 가지 양태을 강조하다가 후기에는 자가 사라진다. 가장 근원적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경은 2차적인 의미에서 말씀으로 두 번째로 권위를 지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정신에 맞지 않으면 성서 비평도 가능하다고 본다. 세 번째 권위인 설교는 성경에 일치하여야 한다. 설교는 성경에 의하여 비판 받는다. 성경과 교회의 선포 사이에 신학의 자리가 있다. 교회의 설교는 신학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교류와 불가분리적이다. 이 게시는 본질적으로 구원적이며, 화해적이다.

 

3.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면서 인간적인 증언이다.

옛 정통주의는 성경에서 인간적인 증언을 바로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계적인 영감론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성경 안에는 수많은 인간적인 요소, 인간적인 제한성이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오고 있다는 실재 영감론(real inspiration)을 강조하였다.

 

4. 성경은 계시하시고 은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계시인 동시에 은폐이다. 신앙이 없을 때는 성경은 별 의미가 없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계시를 계시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이 계시인 동시에 은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고자 낮아지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말씀 속에 숨어 계신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 사건이다.

 

5.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 일어 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성경이 계시이면서 은폐라면 사람이 어떻게 그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은폐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사건이 일어날 때 비로써 우리는 그것이 계시라는 사실, 즉 하나님 말씀을 말씀으로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6. 성경은 인간적 증언이지만 가치를 지녔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특별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현존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증언을 통하여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증언을 떠나서 말씀하실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의 증언에 묶여 있다.” 우리는 이 증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다. 성경이라는 권위 외에 다른 어떤 권위를 요구하는 것은 참된 교회로부터의 이탈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인 증언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설교도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약점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서 말씀하신다.

 

7. 성경의 정경화 작업은 자기 입증의 방식을 통하여서 되어 왔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은 스스로 성경이 되게 한다는 것을 새롭게 표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못 듣느냐가 결정적인 표준이 된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문헌을 통하여 말씀하시면 정경이라는 것이다. 정경을 결정하는 것은 전체 교회의 몫이다. 만일 전체교회가 성경 이외의 다른 문헌들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정경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디다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는 정경에 들어 갈 수 있다. 바르트는 현재 정경으로 들어 있는 야고보서, 요한이서와 삼서 및 요한계시록은 정경에서 제외시킬 수 있다는 정경의 상대적 고정론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신약정경이 될 수 있기 위하여서는 기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하고 기록한 글에 한정시킨다.

 

IV. 바르트의 성경 및 계시관의 문제점

1. 강점

(1) 계시에 대한 전적 의존

(2) 하나님 말씀의 승리

(3) 자연신학의 문제성 제시

(4) 그리스도 중심 일원론

2. 문제점

(1)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분리 -- 성경을 계시나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 정통적인 해석을 재해석한다.

(2) 성경을 만남의 사건 중심으로 비명제적 계시화 -- 인간의 조관적 경험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는 것이 된다.

(3) 인간과 경험의 연관성 무시, 일반계시 배척

(4) 성서비평주의 용인-- 창세기 3 장의 아담 타락 기사를 Historie가 아닌 Geschichte로 해석하므로 사실의 역사적 사건성이 퇴색되어 버렸다.

(5) 상대주주의적 경전관

(6) 성경의 인적 요소의 과오론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