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I. 하나님의 예지와 그 성경적 근거
영원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예지(豫知)란 하나님의 전지성 안에 과거와 현재의 사실들이나 사건들을 아실뿐만 아니라, 그 인식에는 미래에 일어날 사실과 사건들과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능력(참고, Fernando L. Canale, "Doctrine of God," Handbook of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p. 114)이다.
스트롱(A.H. Strong)은 그의 <조직신학>에서 하나님께서 지식 대상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련된 사실적 또는 가능한 완전하고 영원한 지식을 지니셨다고 진술한다(P. 282).
다음에 하나님의 예지를 증거하는 본문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가 하나님께서 定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法 없는 者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위 본문에서 “미리 아신 대로”에 나오는 동사 프로기노스코(προγινώσκω)는 '미리 알다, 예지하다, 미래를 보다'를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님이 처형되기 전과 처형될 때까지 그의 신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미리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 그리하여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영원 속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 계획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점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προγινώσκω) 者들을 또한 그 아들의 形像을 本받게 하기 爲하여 미리 定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兄弟 中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위 본문은 먼저 예지를, 그 다음에 예정을 적시하고 있어서 예지예정의 직접적인 성경 근거가 된다. 하나님은 사단의 배도와 인간의 타락을 모두 미리 알았기 때문에 그 비상사태를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다(벧후 1:20; 계 13:8; DA 22). 장래에 대한 예언은 그분의 예지성에 대한 최고의 증거이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예지로써 본 사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말하는 것이다. 예언된 사건들은 그것들이 미리 보여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보여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自己 百姓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聖經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롬 11:2).
롬 11:2에서 프로기노스코는 이스라엘이 거절한다고 해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집념이 나타나 있다. 한 민족으로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계속하여 선지자들을 거절했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복음을 거절하였지만, 아직도 하나님은 그들을 개인적으로는 거절하지 않았다(참조 AA 375).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서”(EW 213; GC 615) 버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에 대한 하늘의 목적을 불신하고 거절함으로써 한 민족으로서의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상실하였다”(AA 377). 그렇지만 그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원하는 유대인으로부터 구원의 가능성을 철수시켰다는 뜻이 아니다. 롬 11장의 기별은 아직도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물씬하게 풍기는 희망의 기별이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백성을 부르고 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πρόγνωσις, 미리 앎, 예지) 따라 聖靈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順從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爲하여 擇하심을 받은 者들에게 便紙하노니 恩惠와 平康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이 본문에서 ‘프로그노시스’는 하나님의 '예지'를 의미하며, 이 예지의 대상을 선택 받은 자들로 칭하고 있다. 그 대상은 디아스포라(Diaspora)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선택 받기 위하여 성령의 거룩케 하심으로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고 자하는 자들이다. 이 선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의 환경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적대적인 환경에 놓여 있는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맺는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의 예지에 해당하는 많은 본문들과 사례들이 나온다. 그 몇 가지들로 우상들의 미래 예견력 결여(사 41:21-22), 고레스 등장 예고(사 44;28) 등 사건을 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지 사례들로는 베드로의 세 차례 부인 사건(눅 22:31-34), 자신의 십자가 사건 예고 (시 22:18; 41:9) 등을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사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지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에 관련된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집합적 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백성들에 관련된 것들이다. 하나님 백성과 관련된 본문들에 나오는 흐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목적, 선택, 부르심, 섭리와 연관된 것으로 단순히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신다는 의미 이상으로 개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다. 이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섭리를 가리킨다.
엘렌 화잇은 하나님의 예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있다.
“하나님은 미래에 관한 지식을 갖고 계시며, 심지어 창세전의 일까지도 알고 계신다. 그 분은 자신의 의도에 상황을 맞추려 하지 않으시고 사태가 발전하고 진전되기를 용인하신다. 그는 사물의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려고 일하시지 않고 그런 상태가 존재할 것을 알고 계셨다. 하늘에 있는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들의 면전에서 이루어져야 할 계획-그것은 신비요, 각시 대를 통하여 숨겨진 비밀이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행하여 오신 바로 그 일을 행하기 위한 영원한 목적으로 한 제물이 준비되었다.”(ST March 25, 1897; 6BC 1082).
“이것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어 온 원칙을 공개한 것이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사단이 반역할 것과, 그 반역자의 기만적인 권세를 통하여 인류가 타락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죄가 존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셨으나 죄가 존재할 것을 내다보시고 그 두려운 비상사태를 위하여 대비책을 세워 놓으셨다”(DA 22).
“하나님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를 아신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출생하기 전부터 각기 어떠한 품성을 가지고 성장할 것인가를 아셨다. 그는 에서가 당신께 순종하고자 하지 않을 것도 아셨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의 근심어린 기도에 응답하시고 리브가가 두 아이를 낳을 것과 형이 아우를 섬길 것도 리브가에게 알려 주셨다. 또 그녀의 두 아들의 장래 즉, 그들이 두 민족을 이룰 것이며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할 것이며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장자(長子)는 가족 중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지위와 특권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SR 87).
II. 하나님의 경륜과 인간의 행동의 논리적 순서
구속의 경륜은 창세전에 세워졌다(벧전 1:19-20; 계 13:8). 칼뱅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자들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경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인정하나,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를 두고 의견을 달리한다. 칼뱅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이 선행되고, 인간의 결정과 행동을 그 결과로 본다. 하나님은 인간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선택을 하신다.
아르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는 당대 풍미하였던 베자(Theodore Beza.1519-1605)의 타락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교리이며,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고 그의 예정론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예지에 의한 조건적 예정, 즉 ‘예지 예정론자’이었다. 예지예정론은 하나님이 믿을 자를 예지하시어 그의 믿음을 보고 예정하신다는 주장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 선택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에(예컨대, 마 11;28) 인간이 수용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로마서 8:29에 나오는 본문 이해에 있어서 각 개인의 운명의 선택이나 결정은 하나님의 예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부여된 선택과 결정이 논리적으로 앞선다. 모든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조건적인 선택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을 먼저 마련하여 제공하셨다. 그러나 그는 선택하신 사람을 중생시켜 믿을 수 있도록 구원의 제공을 시작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선택하신 사람들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도록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믿기로 선택한 후에 회심과 중생하도록 호소하고 설득하신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의 노선에서 웨슬리(John Wesley)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Thomas C. Oden, John Wesley's Scriptural Christianity, 259).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은혜를 값없이 제공하신다. 이 은혜를 선택하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복음을 허락해 놓으셨다. 그의 예지예정론에서는 인간에게 제공된 복음을 믿을 자들이 누군지 믿지 않을 자들이 누군지를 다 아시고 그것을 근거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 예지 예정론에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독단적인 주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속성에 근거한 구원 의지에 의하여 제공되었으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하여 가능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하여 마련되어서 인간의 자유 선택적 결단에 의하여 판가름이 난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무상 은혜에 근거한 구원과 그 구원에 대한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예지 예정론을 강조하였다. 아르미니누스와 웨슬리는 칼뱅주의의 이중예정론이 빠지기 쉬운 도덕률 폐기론(antinomianism) 경향에 대한 윤리적 반동(밀드레드 와인쿱, 칼빈주의와 웨슬리 신학, 64)을 구축한 것이다. 재림교회의 <기본교리>에 나오는 뎨지에 관한 설명은 이런 역사적 유산 위에서 구축되어 있다.
Ⅲ. 선택 개념
<기본교리>에서 예지와 선택에 관한 해설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하나님은 각 개인이 어떻게 선택할지를 미리 보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그분의 예지가 그 선택이 어떻게 되도록 결정하지 않는다. 성경의 예정은, 그리스도를 믿기로 선택하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되어 있는, 아직도 유효한 하나님의 효과적인 목적 속에 존재한다(요 1:12; 엡 1:4-10)"(기본교리, p. 38).
하나님의 자유선택 가능성을 열어 놓으신 예지를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누가 구원 받을 것인지를 전혀 모른다고 부정하면서 그 이유를, 만일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아신다면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역동적 관계가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각 개인이 무엇을 할 것인지 다 알고 계신다고 해도 그들이 실제로 행하는 선택에 간섭하지 않으신다. 이는 사진기가 장면을 녹화하지만, 그것을 변동시키지는 못하는 원리와 같다. 예지는 미래를 변경시킴 없이 그것을 직시하신다. 하나님의 예지는 결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기본교리, p. 39).
엘렌 화잇은 선택 개념을 신앙적으로 준비된 사람에게 모두 적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포괄적인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에서가 구원의 축복에서 제거된 것은 하나님의 편에서 독단적으로 택정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만민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멸망당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선택해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이 영생을 얻도록 택하심을 입을 수 있는 조건을 당신의 말씀 가운데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에 조화되는 한 인물을 선정해 놓으셨으며 누구든지 그분께서 요구하시는 이 표준에 도달하는 자는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요 3:36; 마 7:21)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분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고 선언하신다. 인간의 최종적인 구원과 관련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유일한 택정이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영혼은 택함을 받고, 갑옷을 입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도 선택함을 받았다. 깨어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하고 시험에서 도망치는 사람과 꾸준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다 택함을 받을 것이다. 구속을 위하여 마련된 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제한 없이 주어지지만, 구속의 결과는 그 조건들에 응한 자들이 누릴 것이다”(PP 207-208).
침례받고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고자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elect)이다” (SD, 133). 하나님의 택하심은 실천을 조건으로 있는 것이다(MS 49, 1894).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른 무조건적인 선택이론은 배도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비성서적인 이론일 뿐이다.
“개인과 한 백성에 대한 택함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택함인데,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 택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천국의 축복을 누리도록 분명히 택함을 입었다고 생각하면서 종말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택함이 아니다. 인간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갑옷을 입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사단이 그의 영혼을 앞잡이로 삼으려고 하는 동안에 모든 거룩하지 못한 정욕을 거스려 싸울 수 있도록 그의 수중에 놓아두신 하나님의 방법들을 사용하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깨어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시험에 들어가는 것을 피해 가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순종함으로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도록 택함을 입었다. 이것이 성경의 택함이다.”(목사, 453-454)
“성경은 사람이 아무리 꿰뚫어 보려 해도 알 수 없는 먼 과거를 비추어 준다. 땅에 기초를 놓고 하늘을 펴신 능력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만, 우리는 국가들의 기원에 대하여 믿을 만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자부심이나 편견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인류 역사의 기록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기록들을 보면, 모든 민족의 발전과 제국들의 흥망은 마치 사람들의 의지나 무용(武勇)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가지 사건들은 대부분이 사람의 능력, 야심, 혹은 변덕에 의하여 꼴 지어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휘장이 열려 있어서, 거기에서 우리는 무대의 상부와 배후는 물론 자비가 충만한 하나님의 대리자들이 인간의 이해 관계와 권력과 욕망 등 일체의 승부에서 묵묵히 인내하며 그분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교육, 173)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주신 당신 자신의 계시는 우리의 연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우리가 간파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최고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을 추측하고자 자신의 힘을 지칠 정도로 발휘할지라도 마침내 그 노력은 아무런 결실을 가져 오지 못할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해결하도록 위탁되어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의 정신으로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본성을 추리해내고자 몰두해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침묵이 웅변이다.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논쟁의 대상이 아니시다.”(치료, 429)
“땅의 깊은 곳을 수색하거나 하나님의 실존의 오묘를 이해하고자 헛된 노력을 함으로써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신 계시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과 일치된 생애를 함으로 발견하게 된다.
가장 위대한 지능을 가진 사람들도 천연계에 나타난 여호와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감은 가장 심오한 학자가 대답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문제들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대답하도록 하고자 제시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주목을 가장 심오한 하나님의 신비로 이끌므로 우리의 지혜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의 주변에는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MH 430-431).
Ⅳ.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양립 여하
1985년 당시 로마린다대학교의 교수 Richard Rice 박사가 저술한 하나님의 다스림 (The Reign of God)은 일종의 재림교회의 첫 조직신학 개요서라고 할 수 있다. 동 서에서 시사하고 있는 신관에는 논쟁을 유발하는 주제가 담겨 있다. 책 전체적으로 재림교회 시각에서 신학 일반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책의 구성이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구원론을 제9장 교회론 범주에 배치하므로 개인주의적 구원관을 멀리하는 의도가 풍긴다. 개인적 구원을 집합적 문맥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종말론도 개인적인 구원보다 사회적인 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안식일을 맨 끝에 배치하므로 재림교회 신학의 관석으로 삼아 재림신학의 아이콘으로 매기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라이스의 특이한 이론은 그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부모의 결혼 파경을 맞이하자, 그는 교회를 통하여 위안을 찾았다. 그는 시카고대학에서 신학 수학 중 세계 제1 랭킹에 속하는 학자들로부터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적 도전들에 대한 응답을 탐색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이해 방식을 넘어서 달리 보는 신학적 시각을 형성하였다.
특히 그를 가르친 교수들 중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의 철학적 신학에 매료를 당한 인상이 짙다. 하트숀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라이스의 책이 하트숀의 철학적 신학으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은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라이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변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역동적 견해, 특히 그의 예지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어떤 상관성을 지녔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지나간 시대 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풀어보고자 한 난제에 속한다.
전통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점이 역설되어 왔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 변동이 없다는 불변성을 증거하고 있다(말 3:6; 약 1:17; 시 101:26, 27; 히 13:8). 하나님은 인간이 갖는 아픔, 슬픔, 고통 등의 경험과 역사에 초연해 무감정으로 계시는 단극적 유신론(monopolar theism)이 있다. 그러나 하트숀은 인간의 고통에도 동참하는 역동적인 양극적 유신론(dipolar theism)적 특성을 지녔다. 존재(being)는 되어감(becoming)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본질을 바꾸지 않으면서, 즉, 인간에 대한 자기의 관계와 목적과 행동이 역사적으로 신실하고 항구여일하시지만, 새롭게 하시기도 하는 등 역동적인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즉, 불변성과 가변성이 양립하시는 하나님이시다(Norman R. Gulley, Systematic Theology: God As Trinity, 252-253).
하나님의 절대적 예지는 절대적 역동적인 신관이 아닌 靜的인 신관의 논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의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라는 신관에 근접하는 논리에 속하여 히브리적 신관과는 거리가 멀다. 라이스는 1980년 RH에서 출판한 책 하나님의 열리심(The Openness of God)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품성에서 불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분은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경험들 속에서 열려 있는 분이시어(p. 25) 중요한 부분은 아직 미결정된 상태에 속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열린 시계에서 도덕적으로 응답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미래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미래란 인간의 결정에 매달린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역사의 과정을 전단(專斷)적으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결정해 가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자유의지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 결정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하기 전에는 미래를 잘 모르신다. 만일에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지하신다면 하나님이 악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판이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신 분이 아니게 된다.
“너희는 옛적 일을 記憶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外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 내가 始初부터 終末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9-10).
라이스는 위 성경 본문이 하나님의 예지를 함축하고 있는 메시지라고 보지 않는다. 11절로 이어지는 메시지가 미래 예언(prediction)이 아닌 것으로 본다. 미래에 이루실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단순히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란 다소 모호한 설명을 한다.
하나님께서 고레스가 탄생하기 150년 전에 그의 등장을 예언하고 있는 본문(사 44:28-45:1-4)은 하나님의 예지를 나타내는 본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스는 이 본문 역시 예지를 말하는 예언이 아닌 고레스의 조상의 예견 정도로 보아버린다.
라이스의 이런 판단에는 두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한다. 먼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양립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철저한 예지를 하신다면, 어떻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라이스의 지론은 결국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 관계라는 차원에서 ‘부동의 원동자’ 같은 옛 그리스 철학의 신관을 배척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예지 개념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티프에서 인간 자유와의 양립성을 배격하는 것에 그 초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예지가 인간에 향한 영원한 사랑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하나님은 각 사람의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시간 속에 내려오신 하나님께서 사랑의 얼개를 통하여 하시는 예지라면 그것은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수준에서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의 자유와 양립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의 제약 아래 있는 인간 경험 수준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예지를 격하시켜 이해하고자 한다면 두 사이에 충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경험과 지성으로서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아시는지를 알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전지성과 예지는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Canale, 114). 판단의 근거가 되는 본문들을 하나님의 전능성에 관한 본문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은 이를 시사하고 있다.
라이스는 다음으로 이 신관 주제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신구약 성경 본문들을 다 매거하여야 할 것인데 일부만을 가지고 성경적이라고 하는 다른 성서적 견해를 강변하고 있다. 성경의 대동맥 같은 언약 사상을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랑의 현현인 조건성과 무조건성의 두 날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선택의 자유 사이에 얼마든지 양립이 가능한 것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같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모순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는 결국 선택의 자유 이슈를 기본적인 것으로 보느냐 여부에 귀결된다. 자유가 선택 사항들 사이에서 자발적, 도덕적 선택 능력이라고 하면 인간의 자유는 존재한다. 자연계 현상에서 대하여서는 그 인과관계를 밝힌다고 해서 현상을 낳게 한 원인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서는 행위자가 자기 결정적인 선택이 있기 때문에 책임이 수반되어 심판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책임을 하나님이 져야 하여 심판의 당위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도덕적 행위는 유목적적이고 의식적, 변별적 행위로 선택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Ⅴ. 맺는 말
인간 구속이라는 주제는 천상에서 조차도 영원한 연구 주제가 된다. 이 주제는 그만큼 광대한 주제가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과 예지예정의 관계는 이런 광활한 주제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천상에 이르기까지 그 완전한 의미를 풀어 나가야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죄악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세상에서 여러 제약을 받으며 올리는 성도들의 눈물의 탄원과 고난의 어둠 속에서 몸부림 친 삶의 의미를 풀지 못하면서 살아가던 날들을 비추어 주는 하나님의 예지적 자애로운 초청을 보게 되는 그날, 모든 의문이 풀릴 것이다.
이런 기대와 함께 이 짧은 연구에서 밝히고자 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의 능력은 신격(神格)의 특성이 된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신격의 증거로서 구속과 구원, 및 심판과 징벌을 예지하시고, 예정하시는 능력,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을 성취시키는 능력을 제시하셨다 (사 44:6-9; 48:3-8). 그러한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은 모든 종류의 참된 예언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사 42:9; 렘 50:45; 암 3:7, 8).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을 적대하던 이방 신들에게 자기들이 우상 신들임을 변호해 줄 신격의 증거로 이 예지예정의 능력을 제시해 보라고 도전하셨다.
둘째로, 성경의 축대가 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지성적 피조물들에게 자유 선택에 따라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명령법과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사랑의 哀訴적 초청이라는 직설법이 그 지반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피조물들에게 자유로운 선택, 즉 자유 도덕 행위를 행사할 수 있는 특권과 책임을 부여하셨고, 그렇게 하시므로 자기들의 행동 여하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만드셨다. 인간은 ‘로보트’가 아니다. 만일 인간이 자유 도덕 행위자가 아니라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예지와 지성적 존재인 인간의 자유선택과 도덕 행위 사이에는 아무런 충돌이나 모순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영원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예지의 신비를 시공의 제약 중에 있는 인간이 재단할 수 없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예지 예정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 역동적 관계를 끊임없이 활성화시켜 인간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의 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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