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왕국 멸망 역사 되돌아보기(1)
유다 왕국 멸망 역사 되돌아보기(1)
국가 흥망의 기조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王들을 폐하시고 王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智慧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知識을 주시는도다”(단 2:21 ).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단 4:17).
한 나라나 왕조가 흥하고 망하는 원인에는 복합적 요인들이 잠재 되어 있기 마련이다. 일제의 조선 합방으로 쓰라림을 겪은 우리의 현대사에는 나라 멸망이 얼마나 참혹하고 비참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유다 왕조의 멸망 시 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통하여 또는 기타 방법으로 피할 길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통치자와 그를 옹호하는 지도층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결딴났다. 비록 시대가 다르지만, 우리나라도 유다의 멸망 사건에서 역사적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마찬가지의 상황으로 치달을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국가이든 개인이든 흥망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다. 왕들과 통치자들은 궁극적으로 전능하신 주권자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다. 하늘의 위대한 하나님은 변화무쌍한 국제적 외교 무대를 초월하여 보좌에 앉아 “묵묵히 또 인내성 있게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PK 500; Ed 173).
나라는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충실성에 비례하여 강하게 되며, 나라의 성공은 그것에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원리에 따르는 그 만큼 그 나라는 번영한다. 그리고 나라의 운명은 이 원리에 대해 그 지도자들과 백성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Ed 174, 175, 177, 178; PK 536).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충성하는 나라들은 그것들을 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혜와 능력을 부여하시지만, 그들의 영광을 인간의 업적과 행위에 돌리는 자들은 내버리신다(PK 501).
“하나님의 정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지배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게 된다”(GC 584). 국가가 사람들을 보호하는 존재가 되지 않고 거만하고 잔인한 압제자가 된다면 그 멸망은 필연적이다(Ed 176). 나라들이 하나하나 하나님의 원칙을 거절할 때, 그 영광은 희미해졌으며 그들의 힘은 사라졌고 그 자리는 다른 나라들이 차지했다(Ed 177). “사람들은 다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원리를 거절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멸망을 자취하고 있다(Ed 178, 177). “인간 세계에 일어나는 복잡한 사건들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나라들의 불화와 소동 가운데서도, 그룹 위에 좌정하시는 분은 여전히 지상의 모든 사건을 인도하”시며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계시는 것이다”(Ed 178).
요시야 개혁의 한계
제 16대 왕 요시야는 개혁의 군주이었다. 그는 앗시리아에 굴종하여 그들의 종교의식을 도입한 선왕 므낫새 시대에 이방 제의들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왕하 23-24장). 그는 벧엘에서 드리고 있는 제의들을 일소하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강화시켜 갔다. 요시야의 통치는 지역적 팽창과 경제적 번영의 절호의 찬스도 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말기는 패권국들의 부침에 따라 격변과 변화의 시대이었다. 앗시리아와 갈대아 바벨론 사이에 극심한 투쟁 후에 바벨론이 점차적으로 패권국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나라에 편만한 우상숭배의 사당들을 깨끗이 치웠지만 대중의 마음의 성전에 도사리고 있는 우상들을 몰아낼 수 없었던 점을 꿰뚫어 보았다. 진리의 종자가 뿌려져 싹이 트기는 하였으나 가시 때문에 질식된 상태이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신명기에 나와 있는 권고에 따르도록 거듭 주의를 환기시켰다. 예레미야는 어느 다른 선지자보다 더 모세의 율법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이것이 어떻게 국가와 모든 개인의 마음에 최고의 영적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고 애소하였다.
요시야는 분명히 개혁의 기수이며 영웅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개혁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에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1) 말씀 왜곡 파문
먼저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여 백성들을 방황하도록 인도했기 때문이다. 다음 메시지는 바로 이점을 암시하고 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렘 8:8).
위 본문은 당대 부패한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막강한 조직력을 배경으로 기록된 율법 책 내용을 바꾸었던 점을 시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이란 것은 분명히 ‘기록된 율법’ 즉 성전에서 발견된 바 있는 언약의 책 또는 신명기서와 같은 책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들은 기록된 책 그 자체에 무슨 마력과 같은 힘이 있다는 미신에 젖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본문은 그 선을 넘어선 말씀의 변조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다음 각 번역본들을 비교하여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How can you say, we are wise, for we have the law of the LORD, when actually the lying pen of the scribes has handled it wrongly." (서기관들의 거짓 펜이 여호와의 율법을 잘못 취급)
<The Good News Bible>: "How can you say that you are wise and that you know my laws? Look, the laws have been changed by dishonest scribes." (율법이 부정직한 서기관에 의하여 변개)
<The Moffat Bible>: "What! you say, we are wise, we do have his directions - when lo your scribes have written them wrong, and falsified them." (서기관들이 지시를 오기 및 변조)
<The Jerusalem Bible>: "How dare you say: we are wise, and we possess the Law of Yahweh? But look how it has been falsified by the lying pen of the scribes." (여호와의 율법이 서기관들의 거짓 펜으로 변조)
<The New American Catholic Bible>: "How can you say we are wise, we have the law of the LORD? Why, that has been changed into falsehood by the lying pen of the scribes." (서기관들의 거짓 펜으로 거짓 변조)
<The Revised Standard Version>: “How can you say, we are wise, and the law of the LORD is with us? But, behold, the false pen of the scribes has made it into a lie.” (서기관들의 거짓 펜이 거짓으로 만듬)
여기서 우리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동력이 되어야 할 율법책을 변조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요시야에게 읽어 준 율법책과 백성들에게 알린 율법책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즉, 여호와의 율법은 그 분의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릇인데, 그 그릇에 말씀이 빠져 있거나 비틀어져 있다면 그릇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개혁의 진정한 권위는 참된 말씀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말씀이 변조되었다면 참된 개혁이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세간에는 요시야가 참된 개혁자도 아니고, 발견된 율법책이 진정성을 지녔는지 등 의혹이 증폭될 수 있는 여지가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파장은 요시야 왕 때 예레미야가 야훼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친 것에 대하여 백성들이 듣지 않게 되는 결과까지 몰고 올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곳에서 말씀의 진정한 권위도 갉아 먹게 된 형국이다.
(2) 급격한 국제정세 변화에서 위험한 줄타기 외교
바벨론 느브갓네살이 메디아와 스키디아와 제휴 하에 종주국인 앗시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니느웨가 함락되자, 앗시리아의 남은 병사들은 하란을 제 2의 수도를 정하고 바벨론과 대치하였다. 이집트의 바로 느고 2세 왕은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성장, 남진 정책을 펼칠 것을 예상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앗시리아와 연합하여 대군을 이끌고 지중해 연안 길을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당시 요시아는 오래 동안 유다를 괴롭혀온 앗시리아의 세력이 약해져 가자, 그 틈을 이용하여 국력 신장을 꾀하고자 신흥 바벨론과 유화정책을 세운 듯하다. 그리하여 느고가 앗시리아를 도우러 가지 못하게 하려고 므깃도에 나가서 이집트 군을 대적하여 싸우게 된다.
요시야는 먼저 당대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는 마당에 너무 성급하게 줄타기에 나섰다. 그 결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의 개입을 오히려 역행하였다고 할까? 이미 바벨론은 앗시리아의 니느웨를 정복하였다. 앗시리아는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에게 마지막 저항하는 태세를 정비하고 있었다. 앗시리아는 애급과 동맹 관계를 맺어 동맹군의 지원을 요청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느고의 그 길이 바벨론의 침공을 늦추는 길인데, 요시야가 저지하므로 오히려 바벨론의 침공을 앞당기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3) 자기 고집(아집)에 매인 왕의 운명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자기가 주도하여야 하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런 권력 주도 확신은 다른 사람이 개입할 여지를 없게 하였다. 그는 지금 전장에서 이방 나라 군주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출정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는 흔히 신앙을 잘한다는 사람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 독선이다. 자기의 판단은 옳고 남은 틀렸다는 것이야 말로 독선적이다. 적대 세력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기 구실을 잘 만들고 변론이 강하고 논리가 매우 정연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당사자가 위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가 된다.
요시야는 바로 느고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 35:21). 이는 바로 느고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출정하고 있으니 요시야는 막지 말라고 한 메시지이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를 불신하였다. 요시야 왕은 변장까지 하면서 이집트와 전투를 하다가 전장에서 화살을 맞아 죽는다(대하 35:21-24).
화잇 여사는 요시야의 실수(왕하 22:19, 20; 대하 34:26-33; 35:20-24)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증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가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젖혀 놓은 인간의 지혜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신다. 주어진 빛을 거절하지 말라. 요시야의 역사를 읽어보라. 그는 선한 사업을 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우상 숭배는 진정되었고 외관상으로는 성공적으로 근절이 되었다. 성전의 문을 다시 열고 희생 제도를 재확립하여 그의 사업은 잘 수행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 원인은 그가 받은바 경고에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대하 34:26-33; 35:20-24 인용). 요시야가 전쟁터에서 죽었기 때문에 요시야는 평안히 무덤으로 내려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하면서 누가 하나님을 비난하겠는가?
주께서는 요시야 왕더러 애굽 왕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신 일이 없으시다. 주께서 애굽 왕에게 전쟁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이르러 왔다는 명령을 주셨다. 그래서 사자들은 요시야 왕에게 느고와 전쟁하지 말라고 하였다. 분명히 요시야는 주께서 그에게 직접 아무 말씀도 없으신 것을 기뻐하였다. 군대를 거느리고 되돌아간다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였기 때문에 그는 계속 전진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전쟁에서 죽었는데, 그 전쟁이야말로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싸움이었다. 주님께 그토록 크게 영광을 받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지 않았다. 주께서 은혜 가운데 말씀하시고 그를 위해서 좋은 일을 예언하셨다. 요시야는 자아를 믿고 경고에 유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자신의 길을 따르기로 하였다. 하나님은 그 행동의 결과로부터 그를 지키실 수가 없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자기 뜻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될 수 있겠는가?(MS 163, 1903).”(White's Comment, 왕하 23:29,30-24:).
요시야는 애급의 바로 느고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세력의 남진을 막는 일에 애급을 사용하므로 유다에게 자비의 시간을 더 주기 원하였는데 요시야는 이를 수용치 않았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의 애급 군에 대한 저항은 오히려 바벨론의 남진을 더욱 재촉하는 결과를 낳아 하나님의 자비의 시간대를 단촉시킨 꼴이 된 것이다.
유다와 전투를 하느라 전투력이 약화된 이집트 군은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앗시리아의 군과 같이 연합하여 진을 쳤지만,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게 대패하였다(605 BC). 그 결과 앗시리아는 멸망하게 된다((대하35:20). 이집트 역시 세력을 크게 잃고 역사에서 다시는 대국으로써 인정을 받을만한 행보를 보여 주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바벨론는 그 후 한동안 근동 세계를 제패하는 패권 대국으로 등장하였다.
갈그미스에서 후퇴한 이집트는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폐위 시킬 뿐만 아니라,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삼는다. 그리고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한 후 봉신왕으로 세웠다 (대하 36:6). 이리하여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친 이집트 유다 침공을 서두르게 한 빌미를 제공하였다. 드디어 여호야김과 다니엘 등의 왕족을 포로로 잡아 갔으며 그 후 대를 이은 여호야긴도 바벨론로 잡혀갔고 그 뒤를 이어 시드기야를 봉신왕으로 세웠다(대하36:10). 신흥 바벨론 세력이 고대 근동지역 종주국으로 자리매김을 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대 대 제국 바벨론과 애굽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애굽은 서산에 걸린 지는 해와 같은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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