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왕국 멸망 역사 되돌아보기 <2>
유다 왕국 멸망 역사 되돌아보기 <2>
I. 요시야의 아들들의 몰락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유다의 왕들은 예루살렘이 망할 수밖에 없는 외교적 줄타기 정책을 펴거나 애굽파의 시대 오판에 따른 함정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1. 여호아하스 - 본명은 샬룸(Shallum), 유다 제 17대 왕으로 3개월 통치, 요시야의 노선에 따라 반 애굽 정책으로 인하여 애굽 군에게 폐위 당하였다. 그는 요시야의 맏아들은 아닌 여호야김의 동생으로 보인다.
2. 엘리야김(여호와김)- 요시야의 둘째 아들(대상 3:15)이었으나, 장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애굽이 그를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위를 승계시켜 유다 18대 왕으로 삼았다. 여호야김은 그는 애굽 왕 바로 느고에 의해 엘리아김이라는 원래 이름 대신 여호야김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참조, 왕하 23:34; 대하 36:4).
대하 36:5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야훼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는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여 애굽에 조공을 바쳤다(왕하 23:35), 그리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궁전을 짓기도 하였다(렘 22:13∼14). 뿐만 아니라 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다(왕하 24:4). 이를 본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야김의 악행을 신랄하게 책망하였고(렘 22:15-19), 선지자 하박국도 그 시대를 탄식하였다(합 1:3∼4).
여호야김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이 버리시자 이번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와 여호야김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이송하였다.
3.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 - 18세 때 유다 제19대 소년 왕으로 등극, 선왕 아버지 여호야김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일삼다가 또다시 바벨론 왕의 재침으로 (B.C. 597년) 즉위한지 3개 월 만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왕하 24:8∼16).
4. 배신 때린 유약한 군주 시드기야 (아래에서 상설)
II. 배신 때린 유약한 군주 시드기야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 유다의 마지막 왕(제20대)이다. 시드기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정의이시다'를 뜻한다. 본명은 맛다니야이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에 맛다니야를 봉신왕으로 임명 시 개명까지 하였다(왕하24:17-20, 대하36:10-13).
시드기야는 포로로 끌려간 조카 여호와긴의 뒤를 이어 21세에 즉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을 봉신왕으로 치리하였다. 그는 통치기간 중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야훼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대하 36:11-12).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52장를 통하여 무려 19개 장(章)에 걸쳐 관련 메시지를 주셨다. 시드기야는 다른 어느 왕보다 더 많은 장(章)에 포괄된 것이다(예레미야를 순서대로 읽는 배열에 따라 나오는 시드기야 관련 자료들은 24장; 29~31장; 46~51장; 27장; 28장; 21장; 34장; 32장; 33장; 37~39장이다). 그만큼 유다 멸망을 막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인내가 풍기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유다 역사의 위기에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선왕들의 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참조, 왕하 24:18∼19; 대하 36:11∼12).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왕과 방백들을 향해 거듭 회개를 촉구하였다.
시드기야는 처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그러나 즉위 몇 년 뒤(재림교 성경주석은 시드기야 왕 제4년 즉 593 BC으로 봄) 모압, 암몬, 두로, 시돈, 에돔 등 주변 군소 국가의 권유로 바벨론 배척음모에 가담하였다(렘 27:3). 본 절에서 “여호야김” 3절과 12절에 비추어 ‘시드기야“의 전사과정 상의 오기(誤記)가 확실하다.
느부갓네살에게 시드기야가 반 바벨론 주동인물로 알려져 이를 무마하고 화친키 위하여 왕 제4년(594/593BC) 바룩의 아우인 시종장(병참감) 스라야와 함께 바벨론에 갔다. 이는 충성서약하기 위하여 간 것이다(참고, 렘 51:59, 60, 61). 개정개역판의 ‘병참감’은 왕의 메누하(안식처) 숙소 관리 책임자를 뜻한다. 메누하를 한글 개역판은 ‘시종장’으로 번역하였다.
“시종장 스라야(Seraiah)(왕하 25:18 대제사장 스라야와는 同名異人)를 대동하고 중대한 사명을 띠고 바벨론으로 갔다. 갈대아 궁전을 방문하는 동안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에게 충성하겠다는 그의 맹세를 새롭게 하였다”(PK 447).
바벨론에 대한 적극적인 반역이 터질 위협이 있었던 서쪽 지역의 불안 요소를 감안해 볼 때 느부갓네살이 충성의 서약을 새롭게 하고자 그의 봉신을 수도로 호출했으리라고 믿는 것도 불합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유다 왕이 바벨론을 방문한 것은 두라 평지에서 있었던 느부갓네살의 대(大)신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이 있다(단 3:1). 이는 PK 447 문맥에 비추어 흥미롭고도 가능성 있는 추론으로 보인다. 그 논리는 이렇다.
느부갓네살 왕 재위기간은 605-562 BC 이었다.
시드기야 왕 재위기간 597-586 BC (통치기간 11년)이었다.
종주왕 통치기간과 봉신왕 통치기간이 겹쳐 있다.
시드기야 왕 제4년(594/593BC)이 두라 평지 금 신상 봉헌 의식(단 3장)이 거행되었던 연대와도 거의 맞아 떨어진다.
Shea 박사는 <Daniel 1-7>에서 제국 내 반역사건을 아카드 (바벨론) 연대기에 나오는 갈대아 왕 연대기 분석에 따라 594 BC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있다. 또한 쉐이 박사는 느부갓네살이 반역 평정 후 충성서약을 위하여 시드기야를 포함한 제국 내 봉신왕들과 고관들의 참석을 독려한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시드기야 제4년에 바벨론 방문한 연대와 이 금신상 봉헌식 연대가 거의 맞아 떨어진다. 요컨대, 바벨론 제국 내에 595/594 BC 반역 사건 평정 후 제국 내 봉신왕들과 신하 제후들의 충성 서약 성격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이 때 시드기야가 스라야를 대동하고 참석하여 충성서약을 하였을 것으로 볼 가능성은 열려 있다.
시드기야는 가끔 예레미야의 권고에 따라 충성하였다(렘 38:14-26). 그러나 그는 휘하 친애굽파 고관들에 맞설만한 도덕적 용기가 결여되었다. 그리하여 성전 타락상도 묵인하고 반 바벨론 음모를 분쇄할 정치력이 결여되어 흔들렸다(렘 27:1-22). 궁중 예언자 하나냐의 말이 솔깃하기도 했다. 이렇듯이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지키지 못하고 배신 때리는 일을 반복하였다. 그리하여 시드기야 왕은 끝내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유다 왕국의 멸망을 초래하고 말았다(참조, 왕하 24:20∼25:21; 대하 36:12∼20).
시드기야의 운명에 대한 예언과 성취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시드기야 왕과 유다의 운명을 예언하셨다. 그 예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붙이실 것이며, 시드기야 왕이 사로잡혀 포로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의 아들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몇 차례에 걸쳐 선지자 에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깨우치고 경고하였어도 목을 곧게 하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 백성과 제사장도 크게 범죄하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 하셨다(렘34:1-4, 17; 대하36:12-17).
시드기야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겸손하게 수용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더라면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 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만히 행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자초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드기야의 죽음은 평안한 죽음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시드기야 왕에 대한 예언은 역사 속에서 모두 성취되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 고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애급과 동맹을 체결한 결과 바벨론의 노여움을 사 이스라엘은 침공을 당하였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에게 충성 언약을 어기고 애굽에 원군을 요청함으로써 느부갓네살 왕의 분노를 일으켰다.
“시드기야 王의 第九年 열째 달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王과 그의 모든 軍隊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2 시드기야의 第十一年 넷째 달 아홉째 날에 城이 陷落되니라 예루살렘이 陷落되매“(렘 39:1-2).
느부갓네살은 제3차로 침공하여 30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B.C. 588년 여름에 애굽 원정군의 도착 지원으로 일시적으로 포위 공격이 풀렸었다. 그러나 6개월 후 마침내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바벨론 군대는 “사월 구일”에 그 방어 시설을 꿰뚫었다. 이 날짜는 1절과 같은 근거로 대략 BC 586년 7월 18일로 산출된다.
시드기야는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가다가 여리고 평지까지 이르렀으나 갈대아 군사에게 붙잡혀 바벨론 왕에게 끌려가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살해당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사슬로 결박당했다가 감옥에서 여생을 마쳤다(왕하25:1-7, 렘39:4-7). 느부갓네살 왕은 시드기야의 교만한 눈을 빼어 버렸다. 눈이 뽑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애굽을 향한 안목의 정욕을 쫓아 행한 자의 받을 징벌로 보인다.
이리하여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다. 먼저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을 보고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라는 예언과(32:4, 5), 다음으로 그가 바벨론에서 죽을 것이나 그 땅을 보지 못할 것(겔 12:13)이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 왕의 지시로 철저히 파괴되어 잿더미가 되었고, 적은 수의 장애인과 노약자를 뺀 모든 국민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제 3차 침공으로 왕조 역사의 막을 내렸다.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대결
하나님께서는 유다 마지막 때 예레미야 예언자를 보내 권고하고 경성을 촉구하였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대결이 마지막 때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다 마지막 때에 거짓 예언자 하나냐의 권위가 조정과 백성들의 호응을 받아 예레미야의 애소는 묻혀갔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者로부터 큰 者까지 다 貪慾을 부리며 先知者로부터 祭司長까지 다 거짓을 行함이라”(렘 6:13).
백성들의 도덕적 타락을 경고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할 당사자가 바로 종교 성직자들이다.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와 제사장은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선지자-제사장 직을 유지하며 살았다.
선지자로 표기된 히브리어는 נָּבִיא (nabi)로 대언자, 예언자, 선지자를 뜻한다. 선지자에 해당하는 나비는 일반적으로 '부르다 call', '선포하다 proclaim'라는 뜻의 아카드 동사 ‘나부’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나비“ 단어를 능동태형, 즉 부르는 자, 예언하는 자, 설교자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다(참조: H. J. Kraus, Worship in Isrel, 1966, 102). 그러나 나비를 능동형이 아니라 수동형으로 이해하여 '부름받은 자, 임명된 자'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W. F. Albright,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1940] 1957, 303). 이 수동형의 뒤에는 집행자, 곧 여기에서 부르시는 자로서의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묶여 있는, 그러므로 독특한 자유를 즐기면서, 하나님에 의하여 경고와 권고, 위로, 가르침과 조언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말씀의 선포자이다.(C. Brown).
명사 나비는 구약에서 309회 나오며, 그 중에서 예레미야에서만 92회 사용되었다. 구약 예언자들에는 참 예언자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동 시대에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레미야 27-28장에는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충돌 사건이 나온다. 특별히 28:1-9에는 하나냐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예레미야의 참 예언의 메시지를 배척하였다.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이라고 한 드라마틱한 충돌 사건이 나온다.
백성들이 거짓 예언자들도 참 예언자와 똑 같이 “메신저 양식(messenger form)"을 사용하므로 참 예언자로 보기 쉬웠다. 메신저 양식이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koh 'amar Yahweh)”나 “여호와의 말씀(ne'um Yahwh)”(렘 23:31; 겔 13:6; 22:28)이라는 신권적 권위 어구를 빙자한 양식이란 뜻이다.
”先知者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豫言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렘 14;14). 예레이미야는 거짓 메신저 양식을 자주 부각 시켰다(14:15; 23:25; 29:9, 21)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들의 예언에 관심을 갖기 쉽다. 거짓 예언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에는 다른 신을 전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렘 5:31) 그들은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지 않았다(렘 23:1, 23). 또한 그들은 샬롬이 없는 상황에서 샬롬을 선포한다(미 3;12; 렘 6:14; 8:11;14:13, 15; 23:17).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기 말을 전하고,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한다(사 30:9-10). 그들은 돈과 권력에 부패된 어용 선지자들이며(미 3:11-12), 간음을 행하고 거짓말을 하며 악행까지 하는 비윤리적인 행동까지도 서슴치 않았다(렘 23:14; 습 3:4).
예레미야는 멍에를 메고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항복하고 바벨론을 섬겨야 한다고 연출했다. “예레미야가 목에 속박의 멍에를 메고 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렸을 때에 모인 열국 회의(會議)의 놀람은 매우 컸었다”(PK 444). 그리고 이미 사로잡혀간 백성들과 성전 기구들이 70년이 차기까지 돌아오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25:11, 29:10).
“예레미야는 제사장들과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정하신 기간에 바벨론 왕에게 복종하도록 그들에게 열렬히 호소하였다. 그는 유다 사람들에게 호세아와 하박국과 스바냐와 그리고 자기의 기별과 동일한 견책과 경고의 기별을 전한 다른 사람들의 예언들을 인용하였다. 그는 회개하지 않은 죄에 예언된 형벌이 예언 그대로 성취되었던 사건들에 대하여 그들에게 언급하였다. 과거의 하나님의 형벌은 당신의 사자들을 통하여 나타내신 당신의 목적을 정확하게 성취시켜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임하였다”(PK 445).
하나냐는 바벨론 압제 멍에를 받아야 한다고 한 예레미야의 전쟁과 재앙과 염병 예언을 반대하고 정반대의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냐는 그에 대해 반박하였다. 그는 시드기야왕 즉위 4년에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백성들 앞에서 메신저 양식을 동원하여 예언했다. 그는 예레미야 목에 있던 멍에를 꺾고 하나님이 바벨론 멍에를 꺾을 것이라고 했다. 선왕 때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자들과 바벨론에 빼앗긴 성전기구들이 2년 내에 돌아올 것이라고도 예언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자신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응수했다.
“平和를 豫言하는 先知者는 그 豫言者의 말이 應한 後에야 그가 眞實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先知者로 認定 받게 되리라”(렘 28:9).
그리고 누구의 예언이 맞는지는 그 말이 응한 후에 알게 되고 누가 참선지자인지는 그 예언이 이룬 다음에야 알 수 있다고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은 환난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평화를 말하는 거짓 선지자를 더 신뢰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사람이 믿고 안 믿는 것과 상관없다.
시드기야 통치자의 특징
(1)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함
시드기야는 선대 왕 통치 시대 유다가 우상숭배로 인해 이방제국에게 정복당하는 수치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계속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요시야의 개혁 정책이 무색하리만큼 예루살렘의 모습은 우상숭배로 충만하였다.
“시드기야의 치세 제 6년에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과 여호와의 집 문 안과 안뜰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들을 계시로 나타내 보이셨다.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겔 8:10) 곧 새긴 우상과 그린 우상의 방들-이 모든 것들이 놀란 선지자의 눈앞에 신속히 연달아 지나갔다.
백성 중에서 영적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70인이 성전 마당의 신성한 지역 안에 있는 밀실 속에 갖다 둔 우상의 조상(彫像)들 앞에서 분향하는 것이 보였다. 유다 사람들은 저희가 이교도의 행습에 종사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신”다고 말하고 “여호와께서 … 이 땅을 버리셨다”고 참람되이 선언하였다.
선지자가 보아야 할 더욱 “큰 가증한 일”이 있었다. 밖에서 안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선지자는 “여인들이 … 담무스를 위하여 애ㄴ다면하”고, “여호와의 전 안뜰 안 … 여호와의 전 문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태양에 경배하”(겔 8:13-16)는 것을 보았다.”(PK 448-449).
(2) 강대국 패권정치 흐름 오판
시드기야는 국제적 상황을 올바로 파악하는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쇠퇴한 나라를 따랐다. 그는 시대와 때를 변별치 못하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은 대외정책을 펼치므로 자기 파멸을 불러왔다. 당대 패권국에게 충성과 반역이라는 이중주 교차 정책을 전개하다가 자기 그물에 걸려들었다. 나는 그를 두고 갈팡질팡 한 왕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유다 말기와 이 나라의 현재가 오버랩이 되어 떠오르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심정이다. 만일 세계 초 패권국과의 동맹관계에서 이탈하여 무저갱 같은 나라를 지향한다는 소리가 오판이기를 기원할 뿐이다. 설마 하나님의 교회에 박해를 가하고, 바이러스 재난의 창출자로서 온 세상에 재난을 확산시켜 국제적으로 경제 왕따가 되어 생산기업체들이 속속 떠나 산업의 공동화가 진행되고, 홍수 등 자연재해로 쇠하여 가는 권력에 편승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망해가고 있는 나라에 의지하는 길은 멸망을 자초하는 길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3) 의지가 연약한 여론의 노예
“시드기야의 유약성은 일종의 죄악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두려운 형벌을 받았다. 원수들은 저항할 수 없는 산사태처럼 휩쓸고 내려와서 그 성을 초토화시켰다. 히브리 군대들은 혼란 중에 격퇴당했다. 그 국가는 정복당했다.”(4T 184).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권면과, 그가 참으로 멸시하는 사람들, 그들의 소원에 그처럼 쉽게 굴복한 그의 품성의 연약성을 조롱한 사람들의 권면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의 성년(成年)의 고귀한 자유를 포기하고 여론에 굽실굽실하는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가 어떤 확정된 악한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옳은 것을 위해 담대하게 설 만한 과단성이 있지도 않았다. 그는 예레미야가 말한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권면을 순종할 도덕적 정력은 없었고, 꾸준히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갔다(4T 184).
(4) 왕국이 멸망의 마침표를 찍은 왕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 충성서약을 배신하고 바벨론에 포위당하여 항전하였으나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양식이 진하여 백성들이 기아의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왕하 25:3). 시드기야의 불순종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포위가 되어 성안에 있는 백성들은 양식을 구할 길이 없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시드기야는 나라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자기 두 눈이 뽑혀 쇠고랑을 차고 포로로 잡혀간 비운의 신세로 전락됐다. 그러나 군인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그를 버리고 흩어져 버려 그와 함께 하는 자가 없었다(왕하 25:5).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를 모두 사로잡아 갔다. 그리고 비천한 자들만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다(왕하 25:10∼12). 그러므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땅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에게 짓밟히게 된 원인은 왕과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온 백성이 자기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저버린 데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리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려 멸망하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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