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그리고 파라오

이 세상 나라들은 온갖 독재자 파라오들이 설치는 무대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폭압적 정책을 펼친 파라오(바로)는 누구인가? 또한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의 정체는 누구인가? 폭압 파라오와 출애굽의 정체는 상호 긴밀한 연관성을 지녔다. , 출애굽의 파라오 직전의 파라오가 폭압 파라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출애굽의 파라오(바로) 정체를 18왕조 시대(주전 15세기) 파라오에서 찾는다. 18 왕조에서도 출애굽의 파라오를 투트모세(Thutmose) 3(1504-1450 B.C.), 또는 아멘호텝 (Amenhotep) 2(1453-1427) 중에서 지목하여 왔다. 19왕조 람세스(Rameses) 2(c. 1279-1213 B.C.)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이 견해는 배척한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1:8)에 나오는 새 왕은 애굽의 제15-17 왕조를 형성한 힉소스 왕조)를 축출한 제18 왕조의 첫 왕 아모세(Ahmose, 1580-1554)와 그의 대를 이은 파라오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출애굽 시기

출애굽 당시 파라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지름길은 출애굽 시기를 포착하는 일이다. 출애굽 시기를 19왕조 시대로 상정하는 것은 역사적 자료들과 발견에 비추어 맞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성경으로 출애굽 연대 산출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왕상 6:1).

솔로몬 왕 즉위년은 971/970 B.C.이다. 이 즉위년을 기점으로 하면 솔로몬 왕 제4년은 967 B.C.이다. 그러면 이 때부터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시작했는가? 이런 상정은 솔로몬의 선왕 다윗이 약 2-3년간 섭정했던 기간을 무시한 연대 설정이 된다. 다윗의 섭정 기간 중 성전 건축을 시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셨다. 다윗 사후 성전 성축이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성전 건축은 970년이 되고 이 기간에 출애굽한 때로부터 지나온 480년 기간을 더하면 1450 B.C. 가 산출된다. 이 연도는 불변적이다. S.F. Horn 박사의 솔로몬 왕 제4년을 966년 산출 기점으로 하면 출애굽 연도는 1445 B.C.가 된다. 그러나 William Shea 박사는 혼 박사의 산출 연도에서 고려하지 못한 섭정 기간을 고려하여 왕가의 단독 통치 970년을 산출 기점으로 마련한 것이다.

출애굽 파라오의 정체를 제 18왕조 시대의 이스라엘 출애굽 사건과 결부하여 풀이하는 것이 가장 성서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탭 2세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보이는데 그 중 어느 파라오일까?

람세스 2람세스 ll1267 B.C. 출애굽 파라오로 인기 있는 후보로 보는 기본적인 이유는 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聖地에 정착했다는 최초의 증거가 기원전 12세기 초에 나왔기 때문이다. Rameses 2세의 12번째 아들 메르넵다(Merneptah) 석비(c. 1219 B.C.)에 나오는 이스라엘 원정 기사 내용, 그리고 1400-1200 B.C. 기간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거주한 증거가 없다는 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압적으로 건축하게 한 도시가 라암셋 이름과 국고 성 건축이 나오는 점(1:11) 등이 람세스를 출애굽 파라오로 보는 부차적 이유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람세스 2세 통치시대에 가나안을 정복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메르넵다 비문 기록은 사사시대 사건으로 본다. 더구나 람세스 2세의 통치 시기와 정평이 나 있는 출애굽 연대 1450 B.C.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너무 크다. 출애굽 시기 이후 200년이나 지난 후대의 파라오가 출애굽 파라오가 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더구나 창 47:11에 나오는 도시 명 람세스 표기가 옛 이름 Qantir(Tell ed-Daba)의 현대화 개명이라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는 점이 출애굽 파라오가 람세스 2세가 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파라오는 이 곳에 야곱 자손들이 거주하도록 허락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곳을 건축케 하였고(1:11), 후에 거기를 떠났다(12:37).

 

재림교회 성경주석의 설명을 여기에 부가한다. 플린더스 페트리(Flinders Petrie)는 라암셋 도시의 위치를 와디 투밀라트(Wadi Tumilat)에 있는 텔 엘-레타베(Tell el-Retabe)로 확인하였다. 이 도시는 텔 엘-마스쿠타(Tell el-Maskhuta)에서 서쪽으로 약 1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성경의 소안(13:22), 그 전에는 아바리스라고 불린 힉소스의 수도 타니스(Tanis)라암셋이라고 하나 이는 거짓 라암세스일 뿐이다. 오랜 훗날 람세스 세는 그 도시를 확장하고 미화(美化)하여 자신의 이름을 따라서 그 도시를 명명하였다.

애굽왕 투트모세 1세에게는 오직 핫셉수트(Hatshepsut, 1504-1482) 공주만 있었다. 그래서 이 공주를 다른 부인을 통하여 탄생한 투트모세 2세와 혼인케 하여 투트모세 3세가 탄생한다. 보수적인 주석들은 투트모세 1세 치하 시대 모세가 탄생한 것으로 본다. 이 투트모세 1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아이가 탄생하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파라오이었다. 이런 엄혹한 시대에 핫셉수트 공주가 나일강에서 아기 모세를 발견하고 양자로 삼았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아지트에서 보호처를 마련하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투트모세 1세는 히브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사형령을 내렸다(1-2). 그러나 어머니의 열렬한 기도가 그의 아들을 하나님의 보호에 의탁하게 되자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들이 그의 비천한 휴식처 위를 날고 있었다. 천사들은 바로의 딸을 그 곳으로 인도하였고 공주는 그 작은 상자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가 그 상자 속에 있는 아름다운 아이를 보았을 때에 한눈에 그 아이가 버림 받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어린아이의 눈물은 그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방법으로라도 자기의 귀중한 아이의 생명을 보존해 보려는 알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동정심이 갔다. 공주는 그 아이를 구원하기로 결심하고 그를 자기의 양자로 삼으려 하였다.”(부조, 243). 요세푸스에 따르면 핫셉수트 평화 통치 시대에 모세는 누비아(Nubia) 및 팔레스타인 원정을 하였다. 투트모세 3세는 섭정 역할을 한 핫셉수트 공주의 영향권 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핫셉섯의 경력에 비추어 볼 때 파라오의 딸(2:5~6)에 어울리고 8왕조 시대 연대기에 조화된다. 18왕조 왕들의 통치연대에 비추어 모세는 투트모세 1세 때 탄생하였으며 핫셉수트는 그를 양자로 장차 지도자로 양육하였다. 모세는 출애굽(1450 B.C.)이 있기 40년 전인 주전 1490년에 애굽을 떠났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떠난 2년 후 핫셉수트는 섭정 제 16년 째(1488 B.C.) 그의 수석보좌관이 사라지고 그 후 6년을 더 통치하고 총 22년간을 통치하였다. 그의 비명들에는 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고 남성 동사로 수식되는 독특성을 보여 준다.

 

뒤이어 파라오가 된 투트모세 3세는 핫셉수트 역사 지우기 공정을 하였다. 이 때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다. 투트모세 3세는 재위 제 23부터 42년 사이에 16회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유프라테스까지 진격하였다. QantirRameses 병참기지 건설은 이 때 이루어졌다. 그의 원정 결과 막대한 조공을 받아 국고성을 증축해야 했다. 그는 이집트의 레반트(Levant,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등 강력한 전사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 역시 이집트 거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혹독한 억압정책을 펼치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역사가들은 그를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칭하기도 한다.

 

투트모세 3세 전적 유적은 테베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의 성벽에 제1차 원정의 기록을 담고 있다. 투트모세 3세는 카르낙에서 파라오로 즉위하고자 6일 동안 말을 타고 가자로 갔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에서 추격하다가 전사했다고 주장한다. Van Koot 박사가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투트모세 3세는 1450 BCE에 죽었다. 이는 미국 애굽학자 Peter Der Manuelian이 아멘엠헵(Amenemheb) 관리 무덤에서 발굴한 자료 연대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연대기에 따르면 투트모세 3세는 1450 B.C. 봄 철인 319일에 죽은 것이다. 이 때는 유월절(니산월 14)로 기념되는 날이다.

 

투트모시스 3세 시신은 익사하여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106:11). 시카고대학에서 연구소에 있는 이른바 그의 관 속의 미라가 된 자의 나이를 X 선 정밀 검사를 한 결과 35(40-45세 시각도 있음)를 넘지 않아 사실상 투트모세 3세가 아닌 것이 밝혀졌다. 이는 투트모세 3세의 다른 아들 Amenophis 2세의 시신을 가능성이 크다. 여하튼 투트모세 3세 시신을 홍해에서 찾아내지 못한 증거가 될 것이다.

아멘호텝 2투트모세 3세 장남 Amenemhet는 그의 아비 치세 중반에 이미 죽었다. 아멘호텝 2세는 본래 왕세자가 아니었다. 투트모세 3세는 42-53세 의 10여 년 팔레스타인 원정을 하지 않아 봉신국들의 반역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고자 아멘호텝 2세를 파송하였다. 아멘호텝은 달리기, 노 젓기, 궁술, 병거 및 승마 기술에 뛰어났다. 원정 결과를 보여 준 엘리판틴 석비에는 자기의 힘이 지금까지 살았던 어떤 왕보다 뛰어났다는 자화자찬의 기록을 남겼다. 또한 그는 전쟁의 전문가로 전투에서 무모한 용맹을 보여주었다. 아멘호텝은 미탄니와 바빌론뿐만 아니라, 히타이트로부터도 조공을 받았다.

 

아멘호텝 2세는 본래 왕세자로 책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전 1450년까지 섭정왕으로 나온다. 그가 봉신 반역을 평정하고 돌아 온 후에 그는 아버지가 홍해 바다에 수장된 것을 알고 파라오 보좌에 즉위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한지 9년째 되는 해에 행한 Talkhsi(시리아) 및 갈릴리 단기 원정 기사는 마지막 군사 작전이었다. 이 셈족 보복 원정에서 Apiru(Habiru) 3,600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ANET, pp. 245-248). 성경 상의 히브리인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문헌에서 알려진 하비루 가운데 포함되기는 하지만, 여기 포로된 하비루는 성경이 말하는 히브리인이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시내산 아래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멘호텝 2세의 통치 기간이 1453-1427 B.C.이라고 한 주장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기간이다. 이는 기원전 1450년경 출애굽기 연대와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투트모세 3세가 죽기 전 원정 중인 아멘호텝 2세를 24개월 동안 섭정케 한 기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혼 박사 등 몇몇 역사가들은 그의 통치기간을 1453-1425 B.C. 로 보고 있다. 아멘호텝 2세의 아들은 가계의 서열이나 papponymy(손자의 이름을 조부의 이름을 따서 작명하는 것) 증거에 의하면 10쟁앙 때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멘호텝이 통치 후반기에 군사 활동이 저조한 것이 출애굽기 사건으로 인하여 홍해에서 당한 군사적 재앙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아멘호텝 2세의 후계자 투트모세 4세는 아맨호텝 2세의 장남이나 후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장남이 10재앙 때 죽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다. !

엑서더스에의 길

엑서더스(exodus) 사건은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로 반복되고 있다. 엑서더스는 하나님 백성이 썩어버린 문명이나 폭압적 악으로부터 탈출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엑서더스 서곡으로 비친다. 예수께서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6:12)의 기도를 올리라고 하셨다. 인간은 세상에 가득한 악과 재난, 그리고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다. ‘악에서는 악한 자도 된다. 주의 기도문은 이 악한 자들이 난무하고 있는 세상에서 탈출을 해야 하고 이 탈출 사명에 투신하도록 요청도 하고 있다. 변화산상에서 자기의 죽음을 가리켜 엑서더스로 묘사하고 있다(9:31).

 

이집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이 아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순례자의 걸음을 중단하고 이방 땅을 영원한 정착지로 삼아 400년을 보냈다. 그러는 중에 그들은 이집트 우상 종교에 동화되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도 안식일 준수도 잃어버렸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사명도 잊어버렸다. 드디어 그들에게 압제가 몰아치게 되었다. 마치 독수리가 보금자리 안에서 부드러운 것들을 치워버려 가시에 찔린 새끼들이 할 수 없이 어미의 지시에 따라 창공을 나는 법을 배워 나간 것처럼, 포악한 독재자들이 민족 말살 정책을 펼친 것은 자기의 존재의미와 사명을 망각한 하나님 백성들에 향한 극약처방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고통스런 가시방석은 사실상 은혜의 방석이다.

 

이 출애굽 사건은 한 민족 전체가 동참하고 있는 집단적 사건이다. 탈출은 과거와 단절하는 사건이며 부패하거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적 기존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 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파라오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는 인류 역사의 어둠의 세력이다. 파라오는 압제권력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방해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인간 역사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런 파라오들이 설쳐온 것을 보여주고 있다.

 

21 세기 파라오들은 누구인가? 어둠의 세력들이 2년이 넘도록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상을 휘어 감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 백성은 신앙의 열정을 잃어 가면서 고통스럽게 지나고 있다. 이는 자기 백성을 바로 잡아가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가시 채 교육 방법으로 비쳐진다. 새 해를 맞이하여 코로나 바이러스 세상에서 엑서더스 하는 사자성어를 받았다. 엑서더스 순례자들에게 그 시사하는 의미가 깊어 아래에 옮겨 본다.

 

騎虎難下 (기호난하)

勇往直前 (용왕직전)

 

호랑이 등을 타고 있어

내리기도 힘드니 (잡혀 먹힐 위험이 있으니)

용감하게 힘내어

(천성을) 바라보며 잎으로 달려가자!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아침 홍해 바다가 갈라져 독재자들이 수장될 날이 멀지 않았다.

 

<참고 자료>

1. Sigfried H. Horn, 성서와 고고학 강의 요강 (1976)

2. William H. Shea, Interpreting the Old Testament 1 (Syllabus) (1978)

3. Archaeological Study Bible, Grand Rapids: Zondervan, 2005.

4. 반석(Van Koot) 박사 자료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