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시대에 살면서
신들과 우상들
아이돌 스타 또는 틴 아이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요즈음 아이돌이란 말이 미화되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기 있는 사람이나 가수 또는 우상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아이돌이란 본래의 부정적 의미가 상실되어 버리고 미화된 의미가 강조되는 시대이다. 본래 우상을 뜻하는 idol의 이미지가 선망의 대상이나 자기 인생의 전부를 걸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아이돌에는 절대적으로 의지, 의존하는 어떤 형상을 뜻하는 우상숭배적 의미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미 4:5). 이 성경절이 시사하듯이 신들이나 종교 없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주로 인공위성을 날리는 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넓은 의미에서 어떤 것에 대한 확신과 신념 체계라고 한다면, 현대 첨단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세속적 인간들까지도 자기들의 삶을 끌고 가는 강한 확신이나 신념 체계라는 어떤 형태의 종교적 틀을 벗어나서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신념 체계가 무엇이 되었던지 그것은 종교적 역할을 하고 있어서, 현대를 사는 세속 인간들마저도 종교의 카테고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이 “현대사회는 수많은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라고 지적한 것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우상에 현혹되어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다.
보이는 우상들
종교들 세계나 세속 세계에서 거룩한 하나님 형상을 어떤 신상이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긴다. 다른 종교들이 섬기는 신의 형상은 고등 문화 종교에서는 주로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고, 하등 미개 문화권에서는 짐승의 형상을 만들어 섬긴다. 인간은 마음속에 어떤 종류의 우상을 들어앉히지 않고는 평안함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첨단 장비로 장착된 비행기를 처음 운행을 개시하기 전 돼지 머리로 고사를 지냈던 일이 화재가 된 적이 있다.
세상에는 신들이 많다. 이집트의 아피스 신은 동물신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사카라 모래 지하 무덤에서 하나에 65톤이나 되는 황소 미라 대리석 관들을 보고, 또 왕들의 무덤 벽화에 뱀 신이 왕과 사람들을 불멸의 세계로 인도하는 광경을 보고 놀랐다. 룩소 신전을 보고 또 놀랐다. 먼저 그 장엄함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지성소에 해당하는 방 벽화에 성행위 장면이 그림으로 새겨져 있는 것에 놀랐다. 여행 안내자가 이곳에서 알렉산더가 처 들어와서는 여사제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이교 신들은 음란하여 그 신전이 일종의 성의 제사 향연을 올리는 곳으로 전락되어 버렸다.
엘리야 시대 수많은 사람들 마음에는 바알과 아세라 신으로 꽉 차 있었다. 당대 지배적인 신은 바알과 아세라 신이었다. 아합과 백성들은 이 신들을 섬겼다(18:18). 종교가 권력과 제휴하여 한 통속이 되어 통치의 방편이 되었다. 권력은 짐승으로 둔갑되어 갔다. 종교는 우상이 되어버렸다. 고대 이스라엘에 짐승과 우상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었다. 바알은 바다와 물과의 항전에서 가나안 모든 신을 대표하여 싸워 이겼다는 농토와 토지 소출을 주관하는 풍요와 다산의 남신이었다. 그는 비와 구름을 다스리는 가나안 주신으로 불을 보내는 태양신이었다. 가나안 여신의 우두머리(모신)로 바알을 유혹하여 성관계를 맺었다는 풍요와 다산의 신 아세라 신은 바알의 아내 격이었다.
보이지 않는 우상들
오늘날에는 불가시적인 우상들이 오히려 더 판을 치고 있는 세태이다. 성경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한 것(골 3:5)은 보이지 않는 우상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무엇이든지 우상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유명 작가 펄 벅(Pearl Comfort Buck, 1892~1973)은 현대인들의 3가지 우상으로 돈, 권력, 쾌락을 꼽기도 했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하나님보다 우선으로 꼽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오늘날은 인간, 이성, 과학, 재물 등이 아이돌이 되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오늘날에 성행하고 있는 배도는 선지자 엘리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던 그것과 동일하다. 오늘날의 군중들은 하나님보다 인간을 높이고 인기 있는 지도자들을 찬양한다. 그들은 또 재물을 숭배하고 계시의 진리보다 과학의 가르침을 높임으로 바알을 따르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인간의 학설로 대치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보다 더 높여야 할 시대에 우리가 이르렀다고 공공연히 가르쳐지고 있다. 의의 거룩한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은 효력이 없다고 선포되고 있다. 모든 진리의 원수는 기만적 능력을 가지고 남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의 제도를 두고, 인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제정된 제도를 잊어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기만적인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PK 170).
“비록 그 형식은 다를지라도 옛날 엘리야 당시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있던 것과 똑같은 우상 숭배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계에도 존재한다. 소위 현명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신, 철학자와 시인과 정치가와 문필가들의 신, 교양 있는 상류 계급의 신, 많은 대학과 심지어 어떤 신학교의 신들은 페니키아의 태양신 바알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GC 583).
“역사는 반복된다. 오늘날의 세계에도 아합과 이세벨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현대도 엘리야가 살던 시대와 똑같은 우상숭배의 시대이다. 외형적으로는 사당도 보이지 않고 우상은 눈에 뜨이지 않지만 무수한 사람들이 이 세상의 신들 곧 부와 명성과 향락과 사람들로 죄된 성향을 따르게 하는 재미있는 우화들을 따르고 있다. 많은 무리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에 대해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바알의 예배자들처럼 거짓 신을 충실히 섬기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끊임없이 반대하는 세력과 연합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서 인간을 높이게 된다”(PK 177-178).
대쟁투 앞에서 결단 요청
아합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재난의 원천이 된다고 보아 선지자들을 발본색원 도륙하여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엘리야는 아합에게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왕상 18:18)고 준열하게 꾸짖었다. 엘리야는 통치자가 하나님의 도덕적 계명들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것이 국가적 재난의 원천이 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오늘날도 범람하는 파멸적인 범죄와 각종 재난이 꼬리에 꼬리를 잇고 있는 그 원인은 인간을 아이돌로 삼아 하나님의 명령을 등지고 우상이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그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 6:24).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하였다. 특히 혼합주의적 신앙을 하면서도 백성들에게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고 하였다. 여기서 “두 사이”는 “두 마음 사이”로 당대 혼합주의적 신앙 흐름을 보여 주고 있는 칼날 같은 지적이다. 바벨론적 특성을 지닌 종교 체계에 마음을 빼앗긴 현상은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태양신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백성들을 향하여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머뭇머뭇 하려느냐 ”의 본 뜻은 “술 취한 사람처럼”이다. 즉 갈之 字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왔다 갔다 하는 타협적인 백성들에게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 결단 요청에 대하여 백성들은 침묵하였다.
참 하나님과 앗시리아 신들을 함께 섞은 혼합주의적인 스왈바임 사람들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 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33). 오늘날도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혼합주의적 풍조를 버리고 한 쪽을 택하라고 엘리야는 결단을 요청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결단의 도전을 받고 있다. 종말론적인 결단을 해야 할 이유는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에서 보듯이 짐승과 우상의 잇슈가 곧 대두될 것이기 때문이다.
형상의 우상을 버려라
그리스도교에는 신의 형상이 없다. 개신교에는 상징성을 띈 십자가만 있을 뿐이다. 예수의 형상도 없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예수의 형상이나 마리아의 형상을 두고 있다. 출애굽기 20:4-5에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그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다. 신의 형상을 만들거나 그것을 만들어 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과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가 말한 대로 ‘전적 타자“되시는 하나님을 인간이나 기타 피조적 존재의 범주로 이끌어 내리는 일은 초월적 존재인 창조주의 근본 바탕을 무너뜨리는 일이 된다. 장인이 부어 만든 우상(사 40:19), 목공이 만든 신상(사 44:13-17)들은 모두 인간이 제조한 것들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피조 인간은 구분되어야 한다. 신상이나 우상을 만들어 이 구분을 없애 버리면 창조주의 존재는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신은 인간의 제품으로 전락되고 만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주를 피조물로 전락시키는 신상을 금지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 1533~1592)는 “사람은 지렁이 하나도 만들지 못하면서 수많은 형상의 우상을 만들고 있다”고 꼬집었다.
사람들이 우상으로 섬기는 그 수많은 형상들은 모두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하다. 신으로 섬기는 명산대천들은 그저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진 것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창조물 신상들에 현혹되어 정작 그것을 만들어 낸 창조주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피조물을 섬기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한번 우상에 빠지면 인간은 우상의 노예가 된다.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은 우상이 우리를 입맛대로 조절해 버려 빠져나오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돈이나 권력, 쾌락과 같은 우상에 휘둘리다가 인생을 망치고 만다. 우상은 우리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지하여야 할 자리를 한낱 우상에 내주고 있지는 않은지를 늘 경계해야 한다.
성경 종교는 끊임없이 우상 숭배와 싸우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랍비 이스마엘은 백성을 우상숭배에서 지키자는 것을 토라의 개요이며 의도가 된다고 보았다. 므나세는 경건한 아버지의 신앙을 떠나 성전에 각종 우상을 두었다(왕하 21:1-7). 우리 마음의 성전에는 어떤 우상이 자리잡고 있는가?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일은 곧 경계의 대상으로 곧 드러난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우상을 품고 있는 경우는 곧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위장된 다신교가 된다.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지니라”(시 81:9)는 말씀은 보이는 형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아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다른 신들을 두는 것도 포함된 말씀이다. 내 마음의 성전에서 내가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지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자기 자신이 대답하여야 한다. 여기에 영원한 복음 속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라는 말씀이 들어갈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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