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을 당할 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은 죽을 이 아니라 하나님의 榮光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榮光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11;4).

 

크리스천의 믿음의 근저에서 키가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에 있다. 불신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확신이란 일종의 모순어법처럼 들릴 것이다. 크리스천들도 때로는 모순어법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요한복음의 대 전제는 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에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실재보다 보이지 않는 실재가 더 깊고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믿음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실재를 보게 하는 하늘 제품 특수 안경이라는 역할을 한다. 보이지 않는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우리의 삶에 대한 그 분의 계획을 통하여서만이 접근할 수 있다.

 

어떤 病者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姉妹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phileo-) 들었나이다 하니”(11:1, 4).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7킬로미터 떨어졌으며, 감람산 동쪽 비탈에 놓여 있다. 이 베다니에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가 서로 의지하며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가정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가정의 기둥이 되는 오라버니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매들은 사랑하시는 들었나이다라는 메시지를 예수께 보냈다. 그들의 이 SOS 메시지에는 속히 오셔서 도와 달라는 간절한 탄원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가장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이 이상 절박한 것이 없었다.

 

나사로(Λάζαρος Lazarus)의 히브리리어 형태는 엘르아잘(Eleazar)하나님은 나의 도움이 되신다는 뜻을 지녔다. 자매들은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 자매들의 급한 전갈을 받고 엉뚱한 반응을 보이셨다. 나사로의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하신 것이다(4).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중병을 두고 다른 계획을 시사하고 계신 것이다. 나사로의 병은 죽음으로 이어지겠지만 이 경우에 죽음은 잠깐 지속될 뿐이며 곧 다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本來 마르다와 그 同生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ἀγαπάω agapao-) 6 나사로가 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하시고“(11:5-6).

 

자매는 예수가 그냥 자신들의 절실한 필요를 알리기만 하면 그가 즉시 와서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체하자, 그들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라비가 죽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인간은 보이지 않은 실재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기대에 부응되지 못하는 현실을 놓고 슬퍼하기도 하고 원망하며 탄식한다. 이는 하나님의 다른 계획을 모르는 인간의 필레오가 범하기 쉬운 반응들이다.

이 현상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우정적 사랑(필레오)과 하나님의 사랑(아가파오) 사이의 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필레오는 상호 조건적이고 단색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가파오는 무조건적이고 무지개처럼 다채롭다(colorful).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는 죽음을 넘어선 세계가 들어 있다. 하나님의 아가페에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계획이 들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가페에는 지체나 지연(delay)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지체하는 것에는 성급한 인간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카이로스(kairos) 즉 빛나는 이적의 축복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타이밍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확신하는 믿음의 안경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아가페를 지향하는 믿음의 눈이 뜨이고 확신을 갖게 된다(11:15).

 

덴마크의 우수의 철인 쇠렌 키엘케골(Soeren Kierkegaard)<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이라는 것이야 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만, 죽을 내야 죽을 수 없는 병, 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나야 할 병으로 묘사하였다. 인간은 죽음 앞에 선 단독자(외톨이) 실존으로서 고독, 불안, 그리고 절망의 심연 낭떠러지에 처하게 된다. 돈 판 같은 쾌락추구라는 미적 실존의 생활은 헛될 뿐이다. 양심을 가지고 엄숙하게 살아가는 윤리적 실존도 자기 무력의 한계에 부딪칠 뿐이다. 믿음의 질적 비약을 통한 종교적 실존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실재를 지향하여야 길이 열린다. 패러독스 하여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믿는 것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다. 키엘케골은 이 길을 두고 헤겔의 양적 변증법과는 다른 실존적 변증법, 역설 변증법, 또는 질적 변증법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rder)"이라는 건곤일척의 二者擇一이라는 믿음의 결단만 있을 뿐이다. 이 믿음의 결단이야 말로 보이지 않는 확신(unseen certainties)’을 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實狀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證據”(11;1).

실상ὑπόστασις ,hupostasis으로 본질, 실체, 확신, 계획의 뜻을 지녔다. ”증거ἔλεγχος, elegchos증거, 확신, 책망의 뜻을 지녔다. 믿음이 본질과 객관적 실체를 아는 길이고 확신이며, 보이지 않은 미래를 확신하는 길이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