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 법정에 보인 선택들
빌라도 법정에 보인 선택들
운명을 결정하는 선택
인생은 선택(Choice)이다. 누구를 배우자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미래가 꼴 지어 진다. 잘못된 만남의 선택은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 여러 해 전 어느 총장이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에는 "안타깝고 슬프다. 악마의 덫에 걸려 빠져나가기 어려울 듯하다...모두 내가 소중하게 여겨온 `만남'에서 비롯됐다. 잘못된 만남과 단순한 만남 주선의 결과가 너무 참혹하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부단히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결단을 내리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누군가는 B(Birth)에서 D(Death)까지의 인생길에 C가 가운데 있다고 갈파하였다. 그 C는 선택이다. 선택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고 꼴 짓게 한다.
B ---------------------- C -------------------> D
B와 D 사이 중심에 있는 C는 센터(Center)도 된다. 이 센터가 종국적으로 Christ를 지향할 때 미래가 열린다.
인간 됨(being human)이란 선택의 자유를 행사한다는 것, 즉, 시도하고, 결정하고, 도전한다는 것에 매달려 있다. 선택의 자유 - 이는 인간 안에 창조주가 입력하여 둔 매우 위험한 능력이다. 인간은 그것을 마음대로 활용하여 심지어는 자기를 파멸 시킬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인간 창조는 위험한 창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자유를 지닌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되는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의 중심을 관장하여야 인간은 위험한 선택을 벗어나 안전하고도 영원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아담이 처음 들은 말은 금지 명령이다(창 2:16). 사람이 되겠다는 의식이 빛을 발하는 때란 자기 존재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이 명령이 자기를 인도하도록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는 때이다. 위대한 구원의 선택은 창조주의 큰 사랑의 도전에 응전하는 사랑의 선택을 한다. 이렇게 할 때 인간은 빛과 영광을 발산한다.
필자는 누가복음 제23장을 읽으면서 스쳐간 빛이 있었다. 그 것은 빌라도의 법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선택들에 필이 꽂혔다. 그 몇 토막을 여기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바라바 어의
바랍바스(Βαραββᾶς, Barabbas)는 아람어 바르 아바(아버지의 아들, son of Abba)의 음역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바라바'라고 음역했다. 그 뜻은 아버지처럼 존경 받은 랍비의 아들로 풀이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잘 알려진 랍비의 아들이라는 것을 뜻할 수 있다.
헬라어 사본들(아도스사본. 8-9세기경)과 시리아역, 그리고 오리게네스의 ‘마태복음 주석’ 및 Armenian 사본에서는 ‘바라바’를 ‘예수 바라바(Jesus Ba-rabbas)로 나와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바라바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삭제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룩한 외경 때문에 ‘예수 바라바’에서 ‘예수’라는 명칭이 생략되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빌라도가 바라바와 예수를 구분하기 위해’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점으로부터 ‘예수 바라바’와 ‘그리스도 예수’를 구분하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고도 한다(마 27:17).
복음서 기자들이 본 바라바의 죄목(1) 마태 - "유명한(ἐπίσημος) 죄수"(마 27:16). 이는 사형수 정도로 ‘악명 높은’이란 의미일 것이다.
(2) 마가 - "민란을 꾸미고(στασιαστής)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한 사람(막 15:7). 민란을 꾸미고(stasiaste)에 비추어 반역자, 혁명가, 민중 선동가를 뜻한다. 아마도 로마에 대해 혁명을 일으킨 민족주의자인 열심당의 일원으로 살인범 가능성이 있다
(3) 누가 -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눅 23:19; 참조: 행 3:14)
바라바가 살인자라는 누가의 진술은 아마도 그가 민란 중에 살인을 저지른 폭력단 중의 한 명일뿐이라는 마가의 보다 더 상세한 진술에서 추론한 것으로 비쳐진다.
(4) 요한 - "강도" 또는 "약탈자"(요 18:40). 요한이 제시하는 것처럼 약탈이 그의 범죄의 동기 였는지, 또는 그가 "로마 정권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킨 사람")인지는 알려지고 있지 않 다.
바라바는 반란을 일으키고 살인, 약탈을 자행한 악명 높은 사형수이었다. 복음서는 그에 관한 더 이상의 진술을 하고 있지 않아 그가 일으킨 민란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성경 외의 자료들에도 그의 활동 내용에 관하여는 기록이 나오고 있지 않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초라한 모습으로 사랑과 인내를 가르치는 예수보다는 민족 독립을 위해 혁명가로 투쟁하는 바라바가 더 귀한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엘렌 화잇이 본 바라바 모습(DA 733).
(1) 로마의 폭정에서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한 자칭 (정치적) “메시아 라고 주장하였다.” 이 점은 Albright 역시 지지하고 있다.
(2) “세상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사태(체제)에 대한 다른 질서를 세울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였 다.”
(3) “사탄의 망상에서 도둑질과 강탈로 탈취한 것들은 무엇이나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은 정의를 위한다는 구호 아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오늘 의 혁명가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4) “사탄의 대리자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으며 백성 중에서 추종자를 얻어 로마 정부에 폭동을 선동했다.”
(5) “종교적 열성의 가면을 쓰고 반역과 잔인한 일을 감행하는 강퍅하고 지독한 악한”이었 다.
바라바는 폭력 혁명가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민란과 폭력 선택하였다. 이는 거짓 구원을 선택하는 길이다. 그는 사탄의 대표자로서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DA 739). 특히 급진적인 무신론 프랑스 혁명 이래 체제 전복을 위하여 나선 사람들이 바라바의 길을 따라 얼마나 많은 인류의 피를 흘렸든가. 마르크스, 레닌-스탈린, 모택동 - 이들 모두가 인류 역사를 피로 물들인 혁명을 선택한 인물들이다.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선택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끌고 온 예수 그리스도를 몇 마디 심문해 보고 유대인들의 음흉한 음모를 간파하였다. 그는 예수가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자태는 반역자라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고소 내용은 터무니없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심 "존경하는 음성으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기까지 하였다(3SP 138).
빌라도는 백성들의 폭동을 우려하여 심문의 책임을 갈릴리 분봉왕 헤롯에게 넘기려고 그에게 보냈다. 호기심으로 예수를 심문했으나 침묵하는 그를 어쩌지 못한 헤롯 역시 그 무서운 책임을 맡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고 말았다.
빌라도는 의인을 무죄하다고 몇 번이고 선언하면서도 무죄 석방을 시키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상황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빌라도의 아내의 꿈을 통하여 남편 법정과 갈보리에서 고난당하는 그리스도를 보고 화들짝 놀라 경고의 편지를 남편에게 급히 보냈다. 그러나 그는 폭도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도록 내 주었다.
그는 옳은 사람(의인)에게 아무 상관도 말라는 아내의 꿈에 받은 하늘의 옐로카드 메시지를 받고 파랗게 질렸다. 올가미에 걸린 것은 예수가 아닌 빌라도가 된 셈이다.
“내가 어떻게 하랴”(마 27:22). 빌라도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판결을 내릴 만한 도덕적 용기가 없었다. 악을 악이라고 판단하는 일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유대인들의 선택
공포에 질린 빌라도는 당시 유월절 죄수 1인 특사 관례를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는 고육책을 제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바라바 둘 중 한명을 특사 후보로 택하라는 것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의 선전 선동의 올가미에 걸린 무리들 (ὄχλος, ochlos)(막 15:11)은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떼를 썼다. 오클로스는 ‘백성’ ‘무리’ ‘군중’을 뜻한다. 이들은 먹이를 찾아 울부짖는 이리 떼들 같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나니이다”(요 19:12)라고 으르렁거리는 협박도 불사하였다. 이들의 집요한 요청은 ἐπισχύω 에피스퀴오 epischuo(눅 23;5 )라는 단어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뜻은 “더욱 강해지다. 역설하다. 고집하다”이다. 이 단어는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고소인들이 승복하지 않고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요구를 수용하는 일 역시 빌라도에게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래서 악명 높은 혁명가를 석방하는 일은 있을 법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오클로스가 바라바를 선택한 것은 예나 오늘이나 같다. 선량한 사람들이라면 너무 분명한데도, 악당이나 죄인을 선택하는 “~빠”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수치도 다 던져 버리고 미래 자손들에게 불어 닥칠 재난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들은 메시아를 잡아 죽이는 일만 줄곧 주창한다. 그들은 사탄의 대표자 바라바를 택하였고 하나님의 대표자인 그리스도 예수를 버렸다. 그리하여 바라바를 위하여 준비된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져야 했다(SR 220).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에게 돌리라”(마 27:25)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고 했으며, 자기들의 행동을 거의 자랑하는 듯이 보였다. 이는 미래 후손들의 생명과 안정을 담보물로 내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한 세대 후인 AD 70년, 예루살렘이 비참하게 포위당할 때,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 선언함으로써 언약 백성들이 사탄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 대신 사탄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후 그들은 자기들의 소원대로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자기들 자손들에게 자자손손 영원한 저주거리가 되게 하였다(DA 739). 그들은 유랑하는 백성으로 거의 1900년 동안 고통을 당했다.
후일에 사도들은 그 민족의 지도자들을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로 고발했으나(행 2:23; 3:14, 15; 7:52),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책임질 것을 천명한 사실을 망각하고, 그렇게 고발한 것에 대해 화를 냈다(행 5:28).
종말론적으로 등장할 바라바들
“ 왕들과 관원들과 통치자들은 적 그리스도의 표를 자신들에게 부착시켜 오고 있으며, 성도들-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이들로 더불어 싸우려 하는 용으로 대표되고 있다. 그들(통치자)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함으로 그리스도 대신에 바라바를 선택한 죄가 또한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TM 39).
“오늘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바라바를 선택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의 성도들을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짓을 행할 것이다. 그들은 유대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그리스도를 취급할 때 했던 것과 같은 일을 저지를 것이다”(TM 131).
“성화되지 않은 목사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신을 똑같이 찬양하고 있다. 공언하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한편, 그들은 바라바를 껴안으며, 그 행동으로는 “이 사람을 없이하고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소서”라고 외친다”(TM 409).
모두를 감싸는 예수의 선택 - 참 구원 선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죄하셨으며 창조의 권능으로 그들의 올가미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올가미를 받기로 선택하셨다. 그리스도는 불법적인 철야 재판을 거쳐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다. 그는 빌라도의 심문에 몇 마디 대답하였으나 대부분 침묵을 선택하셨다. 헤롯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요 19:11 ). 이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해할 권세를 주지 아니하셨더면 그는 예수님을 해하지 못하였으리라는 말씀이다. 이는 원고와 피고가 바뀐 듯 한 인상을 주는 장면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 앞에서 떨었다. 빌라도는 자기의 정치생명에 무게 중심을 두고 그릇되게 판단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 보시고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정치적 권세도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
빌라도는 그리스도께서 무죄하다고 여러 번 선언하였으면서도 그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헤롯은 그를 멸시하며 조롱하고 홍포를 입혀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냈다. 빌라도는 마침내 바라바를 위하여 준비해 둔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世上 罪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羊”(요 1;29)의 모습이다. 그는 수난 받는 어린양으로서의 길을 선택하셨다. 그리스도는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Ebed Yahweh)의 길을 택하셨다. 이사야가 노래한 네 편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 (42장, 49장, 50장, 53장) 중 마지막인 네 번째 종의 노래(사 52:13~53:12)에는 구약성경 가운데 그 어떤 본문보다도 그리스도의 수난 사역의 세부 요소들이 생생하고도 비장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우리를 대신하여 겪으신 그리스도의 모진 고난과 고통, 숭고한 희생의 자세, 그 위대한 결과에 대한 감격과 찬탄, 그리고 구속 사역을 위하여 처절하게 낮아지셨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이라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 요소가 읽혀지는 빌라도 법정에서의 모습이다. 그의 이 선택으로 오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과 악 사이에서 번뇌하는 우유부단한 빌라도의 선택을 벗어나서
선전과 선동에 염색된 오클로스의 잘못된 선택을 미련 없이 던지고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그리스도를 선택하여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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