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관계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관계
I.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중요성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아무도 거듭남을 경험할 수 없으며, 또한 거듭남을 경험한 자라면 성령의 침례를 받은 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한 말씀에 비추어 보면 확인되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서 성령은 승천하신 주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연합시켜주는 본드 역할을 한다.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성령은 신앙생활의 알파(시작)에서부터 오메가(끝)까지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 계서야 한다. 이 원리를 잘 나타낸 표현이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이다.
II.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상호관계
1. 성령 침례 사건들 기사
신약성경에서 성령 침례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침례 요한의 메시야 오심과 성령 침례 예고--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2) 역사적인 오순절 사건 예고(교회의 탄생 예고)-- 행 1:5
침례 요한 말 회상—행 11:16
역사적인 오순절 사건은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동의적으로 사용되어 있으리만큼 (행 1:5의 성령 침례와 2:3의 성령 충만) 구속사적으로 특별한 사건이다. 신약성경의 성령 침례에 관한 위에서 열거한 6개의 본문의 예고는 역사적인 오순절 사건에서 성취된다.
(3) 개인적인 수침 입교 사건--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 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몸의 지체가 되어 몸의 유기적 일부가 된 다. 이는 은혜의 두 번째 사건이 아닌 회심과 관련된 사건이다. 그러면서도 그 초점은 “우리”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성령의 내주가 강조되고 있다.
2. 시작과 연속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침례를 통하여 거듭난다. 성령 침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 주시는 권능으로 다른 이들에게 곧 판별된다.
침례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침례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신호가 된다. 즉, 그리스도인 삶의 시작을 외적으로 표출하는 성례전이다. 그것은 죄 씻음의 성례전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내적인 새 삶의 시작인 중생의 체험이다. 곧 침례는 칭의와 중생의 성례전이 된다(참고, Michael Green,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128). 그래서 칭의와 중생은 부분적으로 겹쳐진다. 죄악적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가는 전환점이 되는 물 침례가 곧 성령 침례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이 포함된 삼위 이름으로 받는 물 침례 의식 그 자체가 성령의 개입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성령 침례는 독특한 시작 체험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복음을 듣는 일, 그 복음을 믿는 일, 성령을 받는 일 및 물 침례는 같은 경험의 다른 측면들이다(David Ewert,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201). 고린도전서 6:11이 바로 이런 원리를 천명하고 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본문에서 “씻음(ἀπολούω, apolouo-)”은 침례를 뜻한다. 사도행전 22:16에서 이 “씻음”과 침례가 단순과거(aorist) 중간태로 함께 나온다. 이는 물침례와 성령의 침례(씻음)가 동시적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디도서 3:5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서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읽혀진다.
같은 맥락에서 재림교회의 기본교리도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연합, 우리 죄의 용서, 성령을 받아들임에 대한 상징이다”(기본교리 27, 175)라고 진술하고 있다.
“우리가 회개했을 때 우리는 물과 성령의 침례를 통하여 거듭날 수 있다(요 3:5). 그 때에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기본교리 27, 64).
성령 침례는 회심을 위하여, 성령 충만은 봉사를 위하여 각각 역사한다. 성령 침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 단계에서의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기에 이 성령 침례는 성령 충만 생활의 시작이며 그 연속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령 충만은 믿는 자가 같은 성령의 지도와 지배를 계속적으로 받도록 부어주심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에게 한 시라도 성령의 지배가 결여되어서는 계속적으로 여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Ellen G. White은 같은 성령 안에서 자라남(growing in the Spirit)이라는 시각에서 모든 교역자들은 매일 성령의 침례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성령 침례 시의 성령의 부어주심은 성령 충만 시의 성령의 부어주심보다 부족하거나 낮은 단계라고 볼 수 없다. 같은 성령의 부어주심인데 받는 자의 상황에 따라 그 현현이 다를 뿐이다. 동질적인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처럼(1:5; 2:4) 성령의 침례와 성령의 충만을 동의어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날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명령성과 당위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화잇의 권고를 보자.
“모든 교역자들은 매일 성령의 침례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동료 교역자들은 저희가 어떻게 현명하게 계획하고 실행할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특별한 도우심과 하늘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모여야 한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교지들에 있는 그의 택하신 대사들에게 풍성한 성령의 침례를 베푸시도록 기도해야 한다.”(행적, 50-51)
이 문맥은 성령 충만을 계속하여 강조하는 직전의 앞 단락들과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한다.
성령 침례는 회심을 갱신 강화하면서 이어지는 성령 충만을 지향하는 길이 된다.
“그는[예수는} 매일 아침 여러 시간 동안 아버지와 교통하심으로 하늘의 빛을 사람에게 나누어 줄 준비를 하셨다. 그는 날마다 성령의 새로운 침례를 받으셨다. 주님께서는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나셔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자기의 심령과 입술에 은혜의 기름을 바르셨다. 그분은 하늘 조정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을 직접 받으셨는데 그 말씀은 피곤하고 학대를 받는 자들에게 하실, 경우에 합당한 말씀이었다.”(실물, 139).
“날마다 성령의 침례를 받는 것이 특권이 된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Teach your children that it is their privilege to receive every day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CT, 131).
종교개혁자들 이래 전통적으로 보는 시각을 다음 도식으로 보아왔다.
출생 ---> 중생=성령 침례---> (성령 충만의 삶) --->사망
III.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상호 구별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한 성령의 역사로 구별이 되면서도 상호 유기적인 연계성을 지녔다. 먼저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두 사이의 대조적인 면을 개관하고 그 다음에 간략히 서술키로 한다.
A.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대비 개관
1. 성경적 근거
a. 성령 침례-고전 6:11; 딛 3:5; 엡 4:5; 고전 12:13
b. 성령 충만-엡 5:18; 행 8:17
2. 회수
a. 성령 침례-단회적(once for all), 순간적
b. 성령 충만-계속적, 반복적
매일 성령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EGW의 권고는 성령의 충만의 명령법 어투로 보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이 성령의 지배(control)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Comprehensive Index to the Writings of Ellen G. White, vol 2, 1248; 3T 84; TM 79; CH 244; SD 294).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인용(MB 246; MH 246)도 이런 문맥에서 읽힌다.
3. 대상
a. 성령 침례- 그리스도인 생활을 시작하는 누구든지
b. 성령 충만-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자 하는 자들,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 은 자들에게
4. Mood(명령 여부)
a. 성령 침례-직설법
b. 성령 충만-명령법
5. 시기
a. 성령 침례—그리스도인 생활을 시작할 때
b. 성령 충만—매일의 그리스도인 삶 가운데서
6. 체험 여부
a. 성령 침례-체험적 감지와 비체험적 현상 모두 가능
b. 성령 충만-체험적 감지
7. 보편성 여부
a. 성령 침례-모든 신자에게 공통적, 보편적 현상, 회심 시 받는 선물
b. 성령 충만-비보편적, 특수적, 특별 신자에 국한, 회심한 신자의 삶의 내용
“원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다”(행적, 50).
8. 목적
a. 성령 침례-그리스도와 하나가 됨(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됨
b. 성령 충만- 삶의 변화와 말씀 증거 및 봉사를 위한 권능 부여
9. 조건
a. 성령 침례-믿고 회개한 사람들 누구에게나, 회심한 자
b. 성령 충만-예수 그리스도의 전면적인 통제 하에 들어간 자에게, 성령의 권능에 의존하고 지배를 받는 자에게
10. 시제
a. 성령 침례-과거 시제(aorist) 및 예고적 미래
b. 성령 충만-현재 및 미래 시제
B. 성령 침례에 수반되는 현상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구별된다. 침례와 충만은 별개의 단어로 그 뜻하는 바가 다르다. 성령 침례는 믿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행 10:44-46).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 부활에 연합하는 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로 칭의 및 중생과 연결되어 있다. 칭의와 중생은 부분적으로 겹쳐 있다. 물 침례와 성령 침례는 함께 한다. 물과 성령의 침례로 믿는 자는 사단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의 권세로,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진입하는 믿음과 충성의 응답이다. 이런 믿음과 충성의 응답이 결여된 유아세례는 당연히 배격된다. 침례는 “믿는 자의 침례”이고 그것에는 성령의 침례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물과 성령의 침례 때에는 사단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삶의 대 전환적인 큰 회심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회심의 두 국면은 믿음과 회개이다. 이러한 물과 성령의 침례에 나타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참조, Green, 132).
인간 편-- 회개와 믿음
하나님 편--성령 주심, 하나님의 권속, 죄용서, 칭의
교회 편--신자들의 몸에 연합
C. 계속적인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성령 충만
성령 침례 후 개인의 삶에 성령의 충만으로 이어져야 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흔히 지나간 날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한다. 그렇지만 그 때는 성령의 임재가 신자의 구원을 위하여 이미 전적으로 역사하고 있었다.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성령 침례 후 신자는 헌신하고 굴복하는 믿음의 삶을 이어나가며 자라나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른 사람을 위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계속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은 날마다 변화의 동력과 활력이 되고 부여 받은 사명을 추진하여 가게 한다.
성령 침례를 통하여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지만(행 2:38), 신자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홀연히 변화되기 까지는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성의 유혹과 싸워 승리하여야 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한 체험이 필요하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계속적인 지배와 통제를 연속적으로 받는 삶이다. 이는 실제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가장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행사함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능력을 증진시키는 법과, 성화되고, 우아해지며, 고상하게 되는 법을 배웠다. 겸손히 성령의 변화시키는 감화에 복종하였을 때, 그들은 신성의 충만함을 받고 거룩한 형상으로 변화되었다.”(행적, 49-50).
그리고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봉사 활동을 위하여 성령 충만이 있어야 한다. 그 사례는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7 집사(행 6:1), 믿음과 성령이 추만한 스데반(행 7:55),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행 11:24)에서 볼 수 있다. 이들에게 나타난 성령충만에는 방언 같은 은사나 異蹟을 행하는 것보다 健德이 앞서고 지혜와 성령이 앞섰다. 베드로도(행 4:31), 바울도 성령이 충만하였고(행 13;9), 제자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행 13:52). 이러한 성령 충만의 사례들을 통하여 일반적으로 이적을 행하는 현상은 수반되지 않았다.
사가랴에게 약속된 태아가 태속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할 것으로 예언(눅 1:15)을 두고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어머니의 팔에 안긴 영아일지라도 기도하는 어머니의 믿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할 수 있다. 침례 요한은 날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산다면 우리도 역시 아주 어릴 때부터라도 성령께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을 꼴지워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DA 512).
Charles Finney는 성령 충만을 성령 침례 후 봉사를 위한 특별한 체험, 즉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으로 보았다. R. A. Torrey는 성령 충만을 은혜의 두 번째 사역으로 봉사와 증언을 위한 특별 권능 부여로 이해하였다. 19세기 두 번째 축복 운동은 완전 성화 운동으로 능력 부어주심 추구에 역점이 있었다. 신앙생활이 해이하여 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체험하는 일은 필요하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그러나 이것만을 성령 충만으로 보는 것은 성령 침례 이후 줄기차게 이어지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가야 하는 삶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쉬울 것이다.
D. 왜 성령 충만이 필요한가?
(1)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우리는 성령의 전 아니면 악령의 전 둘 중 하나에 속하기 마련이다. 주의 뜻에 순복하는 삶이 신앙생활인데 성령 충만하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마련이다. 사도행전을 가리켜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분이 있다. 성령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의 역사 기록이기 때문이다.
(2) 성령 충만을 받으면 세상에 향한 욕심이 사라지고 투기하는 마음, 싸우기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하면 내 마음에 하늘의 평화가 지배하고 찬송이 터져 나오고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생활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3) 주님과의 관계에 질적인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주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주님으로 꽉 찬 사람, 주님의 말씀으로 꽉 찬 사람 주의 성령으로 꽉 찬 사람이 된다.
E. 성령 충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1. 성령 충만하면 수평적으로 주님을 전하고 싶어 한다.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 이야기가 나오는 곳에는 전도 폭발 이야기가 나온다. 베드로의 말씀 증거(행 4:8), 무리들의 말씀 증거(4:31), 사울의 말씀 증거(행 13:9)의 권능은 성령 충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령 충만은 능력이 있는 전도로 발산되고 있다. 불이 없으면 열이 전하여지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야 전도하게 된다. 불의 혀 같은 열심은 성령 충만의 결과이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다.
2. 두 번째는 성령 체험과 함께 해방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적대적인 자들의 제재나 폭압이나, 율법주의나, 혹은 자기 육신의 욕망과 두려움이나, 세상 복잡한 문제들에서 오는 절망의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된다. 성령 받으면 비록 죄된 성향을 지닌 존재이지만 그 죄된 성향의 강한 요구에서 탈피하는 삶을 살아간다. 본능적인 욕구를 제압하는 능력을 받아 죄에서 자유한 삶을 살아간다. 성령 받으면 우선 얼굴이 달라진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비쳐졌다. 얼굴은 마음의 창문이다. 스데반의 사례에서 보듯이 성령 충만한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밝게 빛난다(행 6:15).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얼굴이다. 원수까지 용서하며 사랑하는 얼굴이다. 마음속에 예수님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만할 때, 그분의 생명력이 작용한다.
(3)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아 주님을 닮아가는 믿음생활을 한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수직적으로 날마다 주님과 가까이 살며 그를 닮아 간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이 본문에는 이상스러운 대칭이 나온다. 성령 충만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술 취하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 마시는 만큼 취하게 마련이다. 술에 담긴 알콜 강도에 따라 또한 술의 양에 따라서 술의 지배를 받아 취하여 간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나 그 다음에는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린다. 그리하여 드디어 인사불성이 되어 자기가 무슨 행동,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르게 되는 인사불성이 된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즉 안 믿는 사람들이 술의 지배를 받아 취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취하듯 지배 받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왕으로 다스리며 우리는 그에게 굴복한다는 것이다. 성령 충만 하라는 명령법 다음에 이 닮아가는 삶의 특징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한다.(엡 5:19). 마음과 영혼으로 주를 찬양한다. 찬미의 제사가 예배의 핵심에 들어 있다. 창조주와 구속주를 찬양한다. 구원받은 것을 찬양한다. 산다는 것은 찬양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넘치는 사람은 가슴으로부터 벅찬 찬양이 솟구쳐 나온다.
② 엡 5:20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항상 넘친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기쁨이 넘친 사람들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모여 기도하고 떡을 나누고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 감격과 감동은 신앙인들의 생리가 된다.
③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자기주장을 꺾고 굽힐 줄 아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다.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이듯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은 자기를 굽힐 줄 아는 사람이다.
IV. 오순절주의 입장
오순절 주의자들은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동의어로 간주한다(행 1:4과 2:4 비교). 엡 5:18의 성령 충만 명령을 성령 침례를 구하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성령 침례는 중생 후에 오는 제2의 성령의 역사라고 보아 이른바 두 단계론적 도식을 강조한다. 중생한 사람이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다. 성령 침례와 물 침례를 구별한다. 사도행전에서 사마리아 성령 강림(8:1-13, 16-17), 고넬료에게 성령 강림 사건(10:44-45; 11:16-17), 에베소에서 침례요한 제자들 사건(19:1-7)은 이러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 사이의 뿌리 깊은 적대감 해소 차원의 특별 사건, 고넬료 사건에서 선교의 지평이 확대되는 이방인 개종자에게 물 침례와 성령 침례를 하나로 묶어 볼 수 있는 여지, 에베소에서 침례 요한 제자들의 재침례적 성격을 중심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오순절주의에서는 소위 2 단계론을 다음 도식처럼 주장한다.
출생 --->중생 ---> 성령 침례=성령 충만 (은혜의 두 번째 사역, 방언 수반) --->사망
성령 충만은 방언이라는 신비체험인가? 성령 충만의 증거는 방언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내 인격 전부 즉 지 정 의를 지배하고 있느냐, 그리고 그 지배 결과로 성령의 열매가 내 안에 있느냐 여부로 판결 내릴 것이다.
V. 맺는 말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은 함께 간다. 성령 침례는 신앙생활 시작 경험이며, 성령 충만은 성령의 계속적인 지배와 통제를 연속적으로 받는 삶이다. 이 성령의 지배 받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두 단계론은 이어지는 경험을 무시하는 입장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령 침례를 받는 것으로, 성령 충만은 구원 받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인 삶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보았다. 신약성경은 성령 침례로 시작된 그리스도인 삶이 이어지는 성령 충만으로 보는 것, 즉, 두 사이에 유기적인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신앙생활의 역동적인 힘을 발휘케 하여 승리하는 생활을 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오순절주의의 2단계론(two-stage theory)은 율법주의에서처럼 복음을 어렵게 만든다. 또한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 된다는 복음으로 불충분하다는 인상도 남긴다. 이른바 두 단계론은 물 침례의 진정한 의미를 가볍게 보거나 그 진정한 의미를 간과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성숙한 성도들은 성령의 침례로 시작한 거룩한 믿음을 더욱 원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매김하고자(참고, 빌 3:12, 14) 매일같이 성령의 충만을 갈급하며 성령의 지배에 굴복하면서 주의 오시는 날을 대망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스위스의 어느 등산 안내인의 무덤 비문에 새겨진 대로 “오르면서 죽었다(Died climbing)”와도 같이 “성령 충만하여가면서 죽었다(Died filling of the Spirit)”는 비문을 남기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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