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신비- 너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은 시들하여졌지만, 안철수 씨의 신비 전략이 상당히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을 보고 느낀 점이 많다. <너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더 알아서 뭐 하시게요. 너무 따지지 마세요. 그렇게 따져서 무슨 유익이 있고, 무슨 기쁨이 있다구요.> - 어느 글에 나온 한토막이다. 어느 누구도 미주알 코주알 다 캐내어 정체가 드러나거나 이해가 될 때 믿겠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정나미가 떨어져 더 이상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어야 할 시간대가 있고, 장소가 있다. 물어서는 안 되는 관계도 있다. 캐물어서는 관계가 허물어지거나 후회되는 경우도 있다. 인간사회에는 물어서는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지나간 일을 캐묻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모른다고 해서 꼭 덤벼들어 캐내고자 하면 인간관계는 파탄나기가 쉽다. 알아도 침묵해야 될 때가 있는 것이 세상살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질문을 시원하게 풀어버려 왕으로 추대 받았다. 그는 아버지인 줄 모르고 아버지를 죽였고, 어머니인줄 모르고 왕비인 생모와 결혼하여 테베의 왕이 되었다. 다스리고 있는 나라에 창궐한 전염병 원인이 선왕 살해에 있다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선왕을 죽인 자를 찾아 나섰다가 자기가 범인 것을 알게 되자, 자기 눈을 빼 버리고 방랑의 길을 떠나고 이어 자살한다. 아내인 어머니도 목숨을 끊었다. 이는 호기심을 지닌 인간이 참지 못하고 그 호기심을 풀어보려는 인간심리가 비극을 끌어 온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세계를 끝까지 파고들면서 따지고 들고, 알아야겠다고 벼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정이 떨어질 것이다. 피조적 존재가 창조주의 세계, 신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파 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알려고 하지 마라. 너무 따지지 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신비에 대한 감각 없이는 사랑도 경외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 성소에서, 그리고 지성소에서 표현 불가능한 외경적 감각, 하나님의 장엄함과 신비하심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 속에서 제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학적 이성의 컴퍼스로 재고, 상식의 대패로 밀어 대는 실용주의적 종교 관념을 추구하다보면 창조, 성육신, 이적, 부활 같은 특별계시 영역들은 우스운 만화로 전락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경우에는 숨어 있는 미래를 들추어 내 보여 주신다.
인간이 신비를 대하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먼저는 운명론적 태도이다. 이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맹목적인 힘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운명이라는 신비 앞에 던져져 있어 그 운명을 들여다 볼 수도 없다. 이 운명론적 시각은 이교종교가들이나 역사를 생성과 순환으로 보는 현대 역사 철학자들이 취하고 있다. 팔자 타령하는 사주를 보는 것도 토정비결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다음으로 신비에 대하여 논리 실증주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 같은 신앙적 명제들, 종교적 명제들을 허깨비 소리로 본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경험법칙에 따라 판별할 수 있는 자명적인 명제들만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는 신비를 신비 그대로 두라고 한다.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다. 인간은 그 신비의 현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나님은 어둠을 그 숨는 곳으로 삼으셨다(시 18:11). 우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신비하다. 우선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하여서 인간들이 그 이름을 쓰거나 부르는 대신에 아도나이 같은 다른 표현으로 기록하거나 불렀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그 정확한 발음조차도 잊어버렸다. 성령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너무 세세하게 파헤치는 일도 침묵해야 될 영역이다. 몰아닥친 비극적 상황 모두가 선명하게 이해 안되는 경우들은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계시 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침묵하는 대신에 파고드는 일은 인간의 월권이다.
묵묵히 배워가며(默而識之) 살아가지만, 배울수록 더 어려워 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길이다. 시공간적 제약 아래 있는 인간이 시공간에 초연한 분을 알고자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일을 숨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잠 25:2)이 된다. 성경이 신비 세계를 추구하는 마술, 점술, 주술같은 오컬트(occult)를 금하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주제 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라고. 이는 우둔하고 무지한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것을 다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 말씀이다.
다윗은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실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사단이 발동시킨 호기심이라는 기만적인 오류의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기이한 일들을 풀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의인이 고난당하고 급기야는 순교당하는 일을 다 이해 못한다. 독재자나 불의한 자가 계속 버티고 있으면서 좌지우지하며 거들먹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어리둥절하여진다. 아삽이 성소에서 악인들의 끝을 보았지만, 우리에게는 아삽 같은 계시적 깨달음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때와 경우에 이 땅에서 당하는 의문의 고리들을 풀어주실 때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침묵하시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숨기는 영광이 드러난 영광이 될 날이 올 것이다.
“짙은 안개 가리운 듯 희미하게 보이나, 후일 복된 날이 오면 주의 영광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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