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배척 신학 사상
심판 배척 신학 사상
I. 보편구원론 유형들
보편구원론 내지 만유구원론은 여러 가지 명칭을 달고 浮沈하여 왔다. 그리고 이런 사상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배척하고 보편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을 전개하여 왔다. 보편회복(apokatatasis, universal restoration)론을 주창한 오리게네스(Origenes) 이래 그 대표적인 신학적 주장들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A. 스웨덴의 론트학파의 영향을 받은 페레(Nels Ferre)의 아가페 신학(agapeic theology)
B. 만유회복설을 주장한 독일 급진적 경건주의(German radical pietism)
C.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은 구원받았다는 보편화해론 (universal reconciliation)
D. 일생 동안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다는 보편 명시적 기회론 내지 두 번째 기회론 E. 일반 계시들을 통한 보편기회론(universal opportunity)
F.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믿음에 상관없이 용서하실 것이라는 보편용서이론(universal pardon) 내지 보편 칭의론(universal justification)사상
이들 각각은 이름이 다르지만, 그 저류에는 보편회복론이나 보편구원주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현대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 후기 신학은 블룸하르트(J. Chr. Blumhardt) 부자의 영향을 받아 보편구원론에 경도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J. Moltmann은 만물회복설을 십자가 신학의 필연적 귀결로 보았다.
II. 종교 다원주의 옷을 입은 보편구원론
보편구원주의 사상을 가진 한국 개신교회들이 있는 것으로 거론되어 왔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에 개방적인 진보적 계통 교회들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이 사상을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과 능력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을 가르쳤든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886-1968)는 ‘익명의 그리스도론(Anonymous Christology)’을 도입하여 유명세를 탔다. 라너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만인보편구원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와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의 관계 선언(Declaration on the Relationship of the Church to Non-Christian Religions)’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단일기원이며, 그 하나님의 섭리, 그의 선하심의 현현과 구원 설계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한다(제1항). 힌두교는 거룩한 비밀을 명상하며 신에게 귀의하여 인생고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추구한다. 불교는 자기 노력으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 그 밖의 전 세계 종교들도 교리와 생활 규범과 신성한 예식 등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는 이들 (타)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 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교회가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제2항)고 한다.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1918-2010)는 스페인 출신 로마가톨릭교회 사제이다. WCC의 탈기독교적 신학 방향 설정에 이바지한 신학자이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 신자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종교 경험을 바탕으로 ‘보편적 그리스도론’을 펼쳤다. 파니카는 ‘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를 나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그 밖에도 많은 그리스도가 있다고 한다.
파니카가 말하는 ‘보편적 그리스도’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루듯 세계의 각 종교는 한 개의 ‘궁극적 신적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문화, 역사의 반응이다. 역사적 종교들은 빛이 스펙트럼을 통과하면서 발생시킨 파장들에 지나지 않는다. 각 종교의 고유소(固有素)는 타종교의 그것들과 더불어 신적 실재를 더욱 완전에 가깝게 드러낸다고 한다. 힌두교의 라마(Rama), 크리쉬나(Krishna), 불교의 석가, 이슬람교의 마호메트, 유교의 공자 등이 역사적 인물로 나타난 그리스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무하마드 그리스도, 공자 그리스도 등 수많은 ‘그리스도’가 있다는 뜻이다.
로마가톨릭교회의 만인보편구원주의와 WCC의 종교다원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것들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전혀 다르다(요 14:6; 행 16:31).
로마가톨릭교회는 예수 없이도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한 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 유태인과 무슬림도 구원받고, 미지의 신을 찾는 사람들,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만인보편구원주의’라는 외연을 확대시켜 나가는 기류가 넘친다. 한국의 유동식 같은 이는 토속 미신까지도 구원의 반열에 드는 것으로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III. 기본적 특징 - 사랑과 은혜의 우위적 역할
하나님의 심판은 형벌이나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회복(apokatastasis panton)(행 3:21)과 새 창조를 위한 보편적 의를 구현하는데 있다. 여기서 회복이란 땅에서 모든 죄와 불의를 제거하고(고전 15: 24-28),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그 지으신 본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상태에 이르게 하여(엡 1:1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도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10)로 끝맺는다. 이런 흐름은 고전 15:22-28로 이어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우주적 범위로 읽힌다.
만물회복론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라는 성경의 기본인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다. 그래서 인간의 죄보다도 그의 은혜가 더 크다(롬 5:20). 물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인간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진노보다 더 크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잠정적 과정에 불과하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진노보다 우위(preponderance)에 둔다.
만물회복론의 시각은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과 보편성에 무한한 신뢰성과 강조점을 둔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의 부정적 표현이다. 사랑의 진노는 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진노의 목적은 심판과 멸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유의 재창조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보편적 의를 구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심판과 우주의 화해는 반제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화해는 심판을 통하여 도래하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정의를 창출해내는 의를 계시한다.
다음에 몰트만의 만유구원이론의 논리를 더 부연키로 한다.
Ⅳ. 몰트만의 만유회복론
Jürgen Moltmann의 만유회복론은 그동안 나타난 만인 구원론, 만유화해론, 두 번째 기회론, 만인용서이론 등의 사상을 하나로 묶어내는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을 다루면서 김명룡 교수의 설명에 의존한다. 몰트만은 <오시는 하나님(The Coming of God: Christian Eschatology )> 제3장에서 모든 사물의 회복(The restoration of All Things)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목표를 만유의 회복과 만유의 구원으로 보았다.
몰트만은 신자 와 불신자 모두의 보편적 부활을 거쳐, 최후 심판대 앞에서 영생 아니면 영벌이라는 이중적 운명에 놓인다는 전천년론이나 후천년론의 공통된 주장을 배척한다. 그는 인류 전체의 선지자들의 구원 예언과 삼라만상의 회복을 말하는 묵시문학의 종말론에 집착한다. 그가 악인의 멸망과 심판에 대한 부정성(the negative)을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장차 죽은 자의 부활을 예기케 하며 죽은 자의 부활 없이 새 땅도 없다고 한다. 이 육의 부활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부활도 포괄하며 더 나아가 약속된 우주적 미래,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의 세계 혹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 가능성을 본 것이다.
이 만유의 구원에는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의 구원이 내포되어 있다. 악한 자들의 악은 심판 받아 없어질 것이다. 죄도 없어지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모든 잘못된 것들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악했던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마지막 날까지 그들은 악한 자로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살해당한 사람들도 구원받을 것이지만 그들을 살인한 자들도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까지 그들은 살인자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살인은 용서되고, 그들은 악한 데에서부터 변화된 새사람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만인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만유를 구원하실 것이다. 전체 피조물과 우주를 구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종국이다. 몰트만은 마지막 날에 트라웁(T. Traub)이 최후의 심판과 지옥도 부정하지만 만유의 회복도 부정하는 ‘전적 폐기설’이라는 주장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마지막 날 건설될 세상은 현존하는 세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 건설될 세계는 현존하는 세계가 아니라 변화된 세계이다. 몰트만은 마지막 날의 세계는 변화된 세계라고 보는 개혁파신학을 긍정하고 있지만 이것에 한 걸음 더 나가 세상의 신격화를 주장한 동방정교회의 정신에 더욱 긍정성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날 전체 피조물과 우주는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세상의 신격화를 주장한 동방정교회의 신학에 동조한다.
몰트만의 신학에서 대단히 특이한 것은 만유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종국적으로는 마귀도 구원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마귀도 하나님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사상은 이미 교부시대 오리게네스에 의해 주장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 정통 교회 측으로부터 배척 받았다. 몰트만에 의하면 불순종의 천사들까지도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귀가 있고 지옥이 있는 한 아직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이 아니다. 마지막 날은 끝없는 기쁨의 시작인데, 그날에는 악한 마귀까지 구원받고 만유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신성에 동참하게 되는 날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마지막 심판 선포의 종말론적 포인트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왕국이 된다.”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의 신학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A.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 확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인간을 영원히 저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간을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의 사랑을 인간에게 확증하셨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B. 심판의 기본적 개념
몰트만은 심판을 두려운 기별이 아닌 희망의 기별로 보고 있다. 이 심판에 대한 희망은 억압자들과 살인자들에 대한 세계상의 희생자들의 희망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 이후 심판은 비로써 행악자들에게 정향되었다. 중세의 심판 그림들은 불안과 경악을 강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에게까지도 이 심판은 위협과 놀람의 메시지였지 기쁨과 해방의 메시지가 못되었다. 몰트만의 신학적 이해의 지평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모든 피조적 존재들과 함께 하시는가 아니면 심판주로서 구원받지 못하고 저주받는 대상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시는가 하는 대칭적 신관이 담겨 있다.
보편구원론과 이중심판(double outcome of judgment)은 각각 나름대로의 성경적 근거에 뿌리를 두고 있어 일견 모순되어 보인다. 따라서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본문들에 대한 조화적 이해를 하는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이중심판의 원천은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믿음의 상호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 편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만민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확신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심판의 근거가 되는 보복하는 의를 죄인에게 돌려주는 의가 아니라, 법을 세우며 회복하고 의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의로 보아야 한다. 최후의 심판이란 영원한 형벌의 선고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모든 사물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심판은 공포가 아닌 회복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이중적 심판론을 말하고 있는 성서본문들(마 7:15-27; 마 12:32; 마 25:31-46)에는 저주적 특성이 담긴 메시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본문에 나오는 영원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헬라어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같은 의미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리스 철학에서 형이상학적 절대적 의미에서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올람(olam)은 아이오니오스와 같은 의미이다. 그는 이 어휘들이 아이오네스(aiones)와 올라민(olamin)이 나타나고 있는 복수형에 유의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저주의 기간을 나타내는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인 영원은 일종의 교육적 형벌 정화기간이 된다. 마가복음 9:49의 지옥의 불은 교육적 형벌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정화의 불이며 교정의 불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축복과 저주의 대립은 결단코 같은 높이의 대칭적 대립은 아니다. 축복 받은 자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는 "창세로부터"(마 25:34) 예비된 나라이지만, 저주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불은 창세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세상 끝까지 존재할 수 없다. 몰트만은 발터 미하엘리스(Walter Michaelis)가 저주와 심판과 영원한 죽음은 종말론적으로 관찰할 때 최후의 것의 지평 속에 있는 "한 단계 이전의 것"(ein Vorletztes)으로 본 것에 동조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저주와 지옥은 최후의 것이 아니다. 최후의 것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이다. 이런 정화사상은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이어 받은 것에 불과하다.
C.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만유 구원론 근거 본문들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지만 몰트만은 다음과 같은 성경본문을 주관적으로 풀이하여 만물회복론과 만인구원론의 밑받침으로 사용하고 있다.
1. 사도행전 3:21 - "만물을 회복하실" 하나님
2. 에베소서 1:10 - 하나님의 예정과 경륜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으로 규정
3. 골로새서 1:20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하 나님과 화해시킴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은 인간만을 향하고 있는 만인화해론을 넘어서 만유구원론적 특성을 지녔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 심지어는 불순종에 떨어져 있는 천사까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화해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로 통일되는 인격화된 창조의 지혜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본문들은 만유의 회복에 초점이 있는 본문으로 몰트만은 이해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지막 날은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는 만인 구원의 날일뿐만 아니라 만유가 회복되는 만유의 구원의 날이다.
D. 빌립보서 2:10-11에 나온 그리스도 찬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 날이 되면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발아래 무릎을 끓게 되고(고전 15:2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된다는 이 비젼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어두운 지옥에서 이를 갈면서 강제적으로 복종 당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면 안 된다. 몰트만은 이 비젼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원수들까지 굴복시켜서 변화된 그들이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땅 아래 지옥에 있는 자들도 하늘에서 어둠의 세력을 만들고 있는 불순종의 천사들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위대함에 사로잡혀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다. 바로 이 날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고전 15:28)이 되는 날이다.
E. 아담-그리스도 동형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느니라"(고전 15:22). 이 본문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가 만민에게 미치는 보편성을 언급하고 있지 제한성을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그리스도의 은혜는 만민에게 미치는 긍휼이고 하나님은 바로 이런 긍휼로 만민을 구원하고,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신다.
F. 인간의 자유의지 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자유의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선택을 결단해야 하는 자유의지적 존재이고 이 결단의 실패는 끝없는 저주 아래 사는 삶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보장되어 있다. 인간은 저주받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저주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몰트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은 만유를 구원하는 것이고 만유를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이 십자가 속에 밝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선택한 저주받은 삶이 끝없이 계속될 수는 있지만 절대적으로 영원할 수는 없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은 대칭적인 것이 아니고 심각하게 비대칭적이다. 하나님의 결정이 절대 우위의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은 끝없이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극복할 수 없다. 로빈슨(J. A. T. Robinson)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양자택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주는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nevertheless)에 의해 한계 지워져 있다. 몰트만은 이와 같은 로빈슨의 관점을 정당하다고 파악하고 있다.
G. 지옥의 영원성 부정
지옥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배치된다. 몰트만은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들어갈 지옥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비롯한 성서의 여러 곳의 지옥에 대한 비유들을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겪을 지옥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영원한 지옥이 있다면 십자가에 계시된 은총과 자비의 신은 무의미해진다. 십자가 차원에서 지옥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지옥의 고통과 경험은 영원하지 않다. 지옥이 있는 한 하나님의 경륜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H. 그리스도의 지옥여행과 파괴된 지옥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지옥여행에 대한 깊은 표현이다. 루터는 지옥을 어떤 특정한 장소라고 생각지 않았다. "지옥은 세상의 어떤 장소나 지하세계의 어떤 장소가 아니고 하나의 실존적 경험인데 곧 죄와 하나님 없는 존재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경험이다". 그런데 루터에 의하면 이 지옥의 고통을, 저주받은 세계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셨다. 몰트만은 이 루터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옥을 파괴시키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보고 있다. "겟세마네에서 골고다까지의 버려진 그리스도의 모습은 영원히 저주받은 한 인간의 버려진 모습이다". 겟세마네에서의 그리스도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지 않았고 응답되지 않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옥의 고통의 서곡이었다. "그리스도는 게헨나와 지옥에 떨어지고 있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없는 세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현재의 진노뿐만 아니라 미래의 진노와 미래의 지옥의 고통까지 겪고 계셨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지옥의 경험이 지옥을 열고, 지옥을 파괴시킨 결정적 근거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가 지옥이 파괴되었다는 결정적인 보증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속죄의 상징으로만 멈추고 있으면 지옥은 파괴되어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죄용서 받은 사람만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행운을 얻게 될 뿐이다. 그런데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고난을 읽었고 여기에서 파괴된 지옥이라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도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I. 죽은 자들에게 전파되는 복음
몰트만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보았다. 베드로전서 4:6은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벧전 3:19은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이 본문들은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속에 있다는 뜻이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있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희망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자들도 복음의 소급하는 능력에 의해 신앙에 이를 수 있다. 죽음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을 기준으로 희망의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할지라도 그들을 완전히 버려진 자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십자가는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들을 바르게 하고 그들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희망과 은총의 빛이 그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다.
개신교 전통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그런 까닭에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차단했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도 거부했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초대교회의 신앙 가운데 하나였다. 로마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연옥설을 반대하여야 하겠지만,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교제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가능성까지 잘라낸 것은 잘못된 것이 된다. 불신자로 죽은 자는 영원히 희망 없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니고 믿지 않고 죽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희망의 빛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J.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의 질적 차이
몰트만은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결단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이슈가 만유구원론의 정당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유일회적인 하나님의 영원한 결단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우주'를 그 자신과 화해시켰다(고후 5:19). 하나님은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멸망에서 구원으로의 위대한 전환은 골고다에서 일어났으며, 우리의 신앙의 결단이나 전향의 시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이 전환의 개인적 경험이요 수단이지 그 전환 자체가 아니다. 나의 신앙이 나에게 구원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나에게 신앙을 마련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결정이 영원의 영역에 속한다면 신앙을 향한 우리의 결정은 시간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결정으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팔 수 있다. 그러나 그 잘못된 결정은 시간의 세계에 속하는 결정이다. 그는 결코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을 뒤엎을 능력은 없다.
인간의 결정에 의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정해진다면, 태어나면서 죽은 아이들의 운명,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는 정신 장애인들의 운명, 회교권에서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각각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결정된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정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십자가에 계시되었는 바, 이는 구원의 소망이 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이미 하나님과 화해되어 있다는 바르트의 견해는 전적으로 옳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안에서 "객관적으로"(objektiv) 화해되어 있다. 그들이 그것을 알고 있든지 모르고 있든지 그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정해진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어 있는 사람으로 보아야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믿지 않는 자들의 불신앙을 하나님께서 화해시킨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보다 크게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어떤 것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불신앙과 저주는 인간의 자유와 시간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만유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K. 최후의 심판과 용서하시는 하나님
과거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 최후의 심판의 날은 무서운 날로 각인되어 있다. 그 날은 모든 죄악이 드러나는 날인 동시에 그 모든 죄악에 대한 형벌이 시행되는 날이다. 그리고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다. 물론 의인들은 이날에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떨고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루터는 은총의 신을 발견하고 싶었고, 자신이 선택된 자 속에 들어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루터에게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도록 크게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z)였다. "네가 예정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면 상처받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예정에 관한 논의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가 예정된 자인가 아닌가를 종결짓는 결정적인 자리라고 루터를 가르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면 내가 예정된 자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의 이 가르침은 루터의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542년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상처받은 그리스도를 보라. 거기에 너의 선택이 확실히 있다".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의 가르침을 20세기에 가장 위대하게 계승한 사람은 칼 바르트(K. Barth)였다. 바르트는 그의 예정론에서 십자가가 우리의 선택의 보증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을 선택했다고 가르쳤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이 예정론을 종말론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몰트만에 의하면 만민을 예정하고 만민을 화해시킨 십자가의 복음은 지금은 만민에게 "선포되고" 있고,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offenbar) 것이다. "십자가의 그 깊은 곳 속에서 겪으신 것이, 그의 고난을 통해 극복하신 것이 마지막 날 영광가운데 드러날 것이다". 몰트만은 마지막 날이 되면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가 보편적인 용서로 만민이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몰트만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가 뫼틀링엔(M ttlingen)에서 1872년 성금요일에 행한 "총체적 용서"(Generalpardon)라는 설교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성금요일은 전 세계를 향한 총체적 용서를 선포한다. 그리고 이 총체적 용서는 이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헛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세상은 총체적 용서를 향하고 있고, 이 용서는 이제 나타날 것이다! 이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성금요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만민을 용서하고 만유를 하나님과 화해시킨 십자가의 거룩한 사건의 깊은 의미는 아직 세상에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현재 복음 전파를 통해 선포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거룩한 십자가 사건의 깊은 의미가 역사의 마지막 날에는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몰트만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은 기쁜 날이다. 그 날은 두려운 날이 아니고 "가장 놀랍고 놀라운"(Das Wunderbarste) 일이 일어나는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은총의 하나님이 심판의 주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심판은 은혜의 심판이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심판은 아니다. 죄인에게 죄의 값을 매기는 보복적인 심판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심판과는 거리가 멀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총체적 용서와 만유의 회복이 구현화되는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의도했던 바가 완성되는 날이 마지막 날인 것이다.
몰트만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의 원칙은 십자가 신학에 모순된다고 보고 있다.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의 원칙은 유대의 묵시문학 속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은 십자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과 심각하게 모순된다. 기독론 문맥에서 몰트만은 십자가 안에서 마지막 날의 심판자가 어떤 분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범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범죄인을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하신 분이 마지막 날의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은 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제나 임금의 심판과는 다르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만유를 용서하고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역사의 완성이자 계시이다.
Ⅴ. 만인구원론의 문제점들
A.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완전조화
만인구원론자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영원한 형벌을 내리신다는 것은 모순된다고 하며 하나님의 주권의 절대적 우위론이나 진노에 대한 은혜의 절대 우위를 전개하나 그것은 인간의 이성적 추리일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완전한 조화를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이를 논증하고 있다. 사랑과 공의는 쌍둥이 자매가 된다(3Bc 1149).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 못지않게 그 분의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 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 분의 사랑의 열매이다”(DA 762).
인간의 공의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공의 개념을 수용하여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 것에 대하여 선택할 자유가 주어져 있다. 예수께서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까지 주권적인 의지를 발동하시어 구원을 인간의 믿음과 상관없이 강제로 구원시키시는 분은 아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이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독재적 주권을 행사하는 분으로,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왜곡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로마서 8:35-39에 나오는 “우리”는 선택의 자유를 통하여 불의를 행하는 자까지 포함하는 모든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고후 5:19). 이는 보편 구원론이 아닌 보편 준비론을 시사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하여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 결여된 보편구원론은 회복된 세상의 불완전성을 증거할 뿐이다.
B. 사랑과 심판의 이중적 사상
성경은 이중적 심판론을 가르치고 있지, 만인구원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에밀 브룬너와 게르하르트 에벨링도 칼 바르트의 만인구원론적 신학적 사고는 성서와 충돌된다고 비판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많은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의 사랑이라면 인간의 죄악에 대한 그의 진노는 어디 있는가?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이라는 이중 구조를 잘 증거하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위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의 대립 외에도 마태복음 25장의 미련한 처녀와 슬기 있는 처녀의 비유 및 양과 염소의 비유 등은 대표적인 사랑과 심판의 이중 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면서 심판하신다.
만인 구원론 또는 보편구원론은 구원을 위한 믿음의 필요성을 제거하고 있다. 믿음은 구원의 확신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조건이 된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믿음의 조건성을 두고 구원을 인간의 자기 주도적 결정으로 보는 만인 구원론적 해석은 빗나간 성경풀이일 뿐이다.
C. 지옥불의 소멸적 특성
성경이 아이오니오스(영원한)를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할 때는 그분께서 무한히 생존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불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나 멸할 수밖에 없는 사물에 대하여 사용할 때는, 그 사람이 사는 동안, 혹은 그 사물이 존재하는 동안을 의미한다. 마가복음 9:45, 누가복음 16:23이 음부에서 고통하고 있는 부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마가복음 9:48은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한시적인 것으로 보고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점은 수긍이 가지만, 그것들을 정화기간이나 교육형벌기간으로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죄악이란 자기 소멸적 특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자유 선택의 기회를 악용하는 죄악을 안으시고 계속적인 기회를 주신다는 것은 죄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벗어나는 것이다. 죄악에 대한 소멸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구현이 된다. 공의의 구현이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부조화 된다고 보는 사상은 십자가의 심판적 성질을 간과하는 것이 된다. “둘째 사망”(계 21:7-8)이라는 최후 집행심판 이후에는 결코 영원한 형벌이나 영원한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루터와 칼뱅이 말했듯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버림받는 지옥의 경험을 대신 당하셨다는 것을 이용하여 공의의 형벌과 심판을 배척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D. “죽은 자들에게 복음 전파”(벧전 4:6)과 “옥에 있는 영들”(벧전 3:19)의 이해
몰트만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베드로전서 4:6의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를 들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에 “죽은” 자들은 그들이 죽기 이전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으나, 지금은 죽은 상태를 두고 한 말로 복음이 지금은 죽은 자들에게 전파되었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벧전 3:19은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구절을 근거로 들고 있다. 몰트만은 이 본문들은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속에 있다는 뜻이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있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1. “영으로”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19절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노아의 봉사를 통하여 홍수 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음을 의미한다.2. 그리스도께서는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 홍수 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으므로 “영으로는” 그분의 현존 이전의 그리스도를 지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따라서 본문의 ‘영’은 현존 상태 이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다. 3. “영으로”는 18절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19절은 그때까지는 미래에 있을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영” 가운데 노아의 봉사를 통하여 홍수 전 사람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다.” 그런 사실로 인하여 그리스도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18절)셨으므로 그분은 이미 노아를 통해 구원을 전파하셨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물로 말미암아 구원”하셨다. 그와 같이, 침례가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21절).
E. 불순종에 대한 심판
죄를 짓고도 죽지 않는다는 사상은 사단의 작품이다. 사단은 불순종하면 죽음이 온다는 하나님의 경고와는 반대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가르쳤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에 그들은 죄의 삯이 정말로 사망(롬 6:23)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죄는, 너희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너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는 선고를 받게 했다. 이 말은 생명의 계속을 가리키지 않고 생명의 단절을 가리킨다.
둘째 죽음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 곧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 형벌이며, 그것은 1,000년 기 끝에 있다. 이 죽음에는 부활이 없다. 사단과 불의한 자들의 멸망과 함께 죄는 사라지고 죽음 자체도 없어진다(고전 15:26; 계 20:14, 21:8).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고 보증하셨다.
성경이 둘째 사망을 지적한 것에 근거하여 첫 째 사망은, 승천 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타락적인 죄의 영향을 받은 인간성에 나타나는 자연적 결과"이다.
E. 골로새서 1:19-20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본 성경절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주의 혼란된 질서를 바로 잡아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다는 사상을 말하고 있다. 예수의 희생으로 인하여 생긴 화해의 효력은 무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어떤 것도 예수의 희생이 가져다주는 화해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자동적으로 화해에 참여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만 예수 희생의 효력이 무제한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거역하던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고 화해의 은총을 거부한다면 그는 여전히 저주 가운데 있다.
F. 빌 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그러나 본 성경절은 승귀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심을 드러내는데 그 초점을 두고 있지 불신세계 사람들을 강제로 구원 받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장치를 해두셨지만, 인간이 구원 받으려면 믿어야 한다.
G.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러나 본 성경절은 아담-그리스도 동형론 구도 아래에서 모든 인간 앞에 놓인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을 대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삶을 얻을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만인 구원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 받은 자의 구원의 준비를 말하고 있다.
H.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그러나 이 성경절은 순종 불순종 문제를 바닥에 깔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을 믿는 자들의 구원 준비를 말하고 있다.
I. 로마서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그러나 본 성경절은 구원 받는 개개인의 운명을 선언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에 따라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Ⅵ. 구원 범주의 편차 이해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한 속죄의 은총을 통하여 온다. 이를 두고 배타주의 (exclusivism)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만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본다. 진리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한 종교를 아는 사람은 다른 종교를 다 아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하여 포괄주의 (inclusivism)적 입장에서는 구원받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하는 점에서는 배타주의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포용주의에서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적 신앙이 절대적 필수 요건이 아니다. 예수 이름 듣지 못한 사람도 그 받은 바의 빛에 충실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본다. Karl Rahner의 “익명의 크리스챤”은 그 분을 모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구원을 모르는 영혼들을 모두 다 내치지 않으신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문을 꼭 잠가두고 그 문안에 들어와야 구원을 해 주시는 야박하신 분이 아니라, 구원의 편차를 적용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속죄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배타주의는 구원의 기조가 된다. 그리스도 이외 다른 이로는 구원 얻을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종교나 타 교단에 속한 분들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엄호 아래 성령의 역사로 감동받아 순응하는 분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보편적으로 구원의 빛을 받을 수 있는 장치를 해 두셨다. 성령의 역사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르고 있다. 예외를 인정한 배타주의, 또는 유연한 포용주의를 아우르는 하나님이실 것이다. 성경은 “보편적 구원의 준비(salvation’s unversal provision)”을 가르치고 있지 “보편적 구원 수용(salvation’s universal acceptance)”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계시하고 있다(시 19편). “창세전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이 능력과 신성에 접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아는 체계가 무너진 까닭에 선행은총에 따라 감동과 지시에 순종하는 사람은 심판에 서게 될 것이다. 인간 안에 입력된 도덕률이 양심을 통하여 지켜질 때(롬 2:14, 15)에 소망이 있을 것이다(슥 13:5의 이차적 적용 참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의 은혜의 엄호 아래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판단 사항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 사항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아픔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픔이시다. 그 하나님의 아픔에는 이교도들도 들어 있다.
“빛이 전혀 없는 이교도와, 진리와 빛이 풍족한 곳에 사는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인 땅에서 베풀어진 의의 현상대로 이교도의 땅에서 그분을 만족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헤아리신다. 그분은 많이 받지 못한 곳에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5BC 1121; Ms. 130, 1899).
“사랑과 동정을 베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다른 삶을 복되게 하고 향상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곳마다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이교국(異敎國) 안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종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푼 예가 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증거한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덕성을 야만인의 마음속에 넣어 줌으로 저희의 본성과 교육에 반대되는 동정심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요 1:9)은 그들의 심령에 비치고 있다. 이 빛에 유의한다면 그 빛은 그의 발길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것이다” (COL 385).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한 번도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일지라도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은 알지 못하였으나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율법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킨 증거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DA 638).
"유대 백성 외에도 하늘의 교사가 나타나실 것을 예언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찾고 있었으므로 영감의 영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어두운 하늘에 하나 둘 떠오르는 별과 같이 이런 교사들이 일어났다. 그들의 예언의 말은 많은 이방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망의 불을 붙여 놓았다"(DA 33).
위의 인용문들이 시사하고 있는 점에는 빛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사이에는 구원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방인들 중에도 일반계시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율법의 요구에 순종한 하나님을 섬긴 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구원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중에서도 예언자들을 일으키시어 놀라운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중보하시기 위하여 항상 살아 계시므로 모든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는 초청을 수락하는 일뿐이다. 인간이 범하는 어떤 죄든지 갈보리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열렬한 호소로서 계속적으로 죄인에게 철저한 속죄를 제공하고 있다.”(1SM 343)
“그대들이 갈보리의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갈 때에 그곳에서 비할 데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들이 믿음을 가지고 희생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에 그대들 자신이 깨어진 바 된 율법으로 정죄를 받은 죄인임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회개이다. 그대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사유하심을 얻게 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단 앞에 서 계셔서 간단없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자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1SM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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