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 심판의 필요성
최후 심판의 필요성
최후 심판의 필요성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벽화는 ‘천지창조“와 함께 주중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경하는 코스 중 하나로 유명하다. 이 “최후의 심판”벽화는 하얀 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마르기 전에 물감을 입혀 색이 스며들게 하는 프레스코 식 화법으로 그려진 최후의 심판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심판 벽화에 400여 명의 인물들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심판자의 모습으로 오른 손을 들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최후 심판에서 구원 받은 자들에게는 환희와 영생의 승리를, 불신자들에게는 보복하는 공포와 전율을 주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싫어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최후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불편해 하거나 공포심에 떨면서 쉽사리 수용치 않는다. 심판 사상은 인류에게 환영받지 못하여 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펼쳐질 일을 대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기류에 편승하여 잘 알려진 칼 바르트(Karl Barth),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 다드(C.H. Dodd), 및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 같은 대 신학자들도 자기들의 저술에서 최후 심판에 관한 자세한 담론을 하지 않은 채. 현재적 심판에 역점을 두는 편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최후 심판을 극적이거나 절정적인 우주적 사건으로 다루기보다는 각 개인들이 거룩한 칭의 또는 정죄에 동의, 수용하거나 반대하는 현재적 결단으로 보는 시각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어떤 화가라 할지라도 벽화 한 장면에 성경상의 심판 전모를 완벽하게 담을 수는 없다. 그리고 각 개인이 현재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반응을 보일 것인지, 아니면 영접을 거절할 것인지에 따라 스스로가 심판을 자취한다는 지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인간의 현재적 삶에서의 악행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행 전 11:9; 말 3:5 등). 그러나 현재적으로 죄악의 자기 소멸적 특성(시 34:21; 잠 29:6)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재적 자멸 행위는 최후 심판이 아니다. 최후 심판 법정의 판결은 인간 세상의 대법원 판결이 뒤바뀌듯이 번복될 수 없는 종국적인 기속 판결이다.
성경은 최후 심판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홍수 속에 흘러가는 세상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선과 악이 영원히 혼재된 세상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명쾌하게 처리하실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다고 선포하고 있다(행 17:31). 엘렌 화잇은 이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를 조사심판 문맥에 적용하고 있다(GC 548; 1T 54). 사도 요한은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고 선포하고 있다(계 14:7).그는 또한 장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종이므로 하나님의 법정 심판대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속죄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사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딤후 4:1) 곧 다가올 그리스도의 재림에 뿌리를 박고 있다. 최후 심판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사람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결정적 승리를 박차는 것이 되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후 15:19). 이렇게 성경은 반복적으로 최후 심판의 필요성을 선포하고 있다.
인간운명을 결정하는 죽음 이해
혹자는 최후 심판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인간이 죽을 때, 인간의 운명이 이미 결정된 것으로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T. Francis Glasson은 인간이 자기들의 사후 운명을 안다고 치자.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미 확정된 마당에 두려움이나 불확실성을 줄 수 없는 집합적인 최후 심판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이런 추론적 논리는 응답하기 어려운 비수 같은 점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런 논리의 바탕에는 성경과는 거리가 먼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적 인간 본성 이해가 깔려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생명의 부활 아니면, 정죄의 부활이라는 보상 또는 형벌을 받게 되어 있다(요 5;29)는 가르침과 동떨어진 사유의 유희에 불과하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죽음은 사람의 끝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한다(고후 5:10).
조사심판 불필요론
혹자는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종국적 운명을 결정하실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에 최후의 심판의 필요성을 배척한다. Anthony A. Hoekema는 재림교회가 마치 이런 견해를 가진 것처럼 보았으나 이는 오판이다. 즉, 그는 재림교회가 각 개인의 생명의 끝에 구원 받을지 아니면 멸망당할지 결정하는 조사삼판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재림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내지 오판에 불과하다. 재림교회가 말하는 조사심판 또는 재림 전 심판은 하나님께서 도덕적 자유를 지닌 각 개인이 맞을 운명을 임의로 또는 예정론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의 지성들에게 당신 자신의 공의와 자비의 조화로운 공정성을 들어내는데 있는 것이다. 기본신조 24항에는 “조사심판은 죽은 자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잠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가를 하늘 지성들에게 계시해 준다.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9:8).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 89:14).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최후심판의 필요성
1. 최후심판의 자명성
최후심판은 자명한 진리에 속한다. 그것은 일종의 공리적 진리가 된다. 오는 세계는 점진적으로 진화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 세계는 최후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거쳐 도래하게 되어 있다. 최후심판이란 인간의 죽음처럼 확실하게 일어날 사건이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바울은 이 심판의 불가피성을 두고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κρίμα,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고 날카롭게 묻고 있다. 이는 최후심판의 자명성을 확고하게 인정하는 질문이다. 그 누구도 최후 심판을 면제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최후심판의 필요성에 관한 가장 강력한 논거 중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그리스도에게 내려졌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세상 죄에 대한 죄책은 그것이 마치 그분의 것인 양 그분에게 전가됐다(사 53:3~6; 벧전 2:22~24). “그가 범죄자로 간주되었으니”(막 15:28), 그리스도께서 짊어진 우리 죄에 대한 무거운 심판을 짊어진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의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갈 3:13, 14:빌 3:9).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판단)이 종말론적인 최후심판에서 그의 진노가 확실하게 임하실 것이다(롬 2:5-6).
2. 하나님의 도덕적 본성의 요구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순결하시어서 악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그는 도덕적 순결성과 고결성 및 사랑을 지니셨다. 도덕적 순결성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그리고 정의로우신 속성으로 나타난다. 고결성(integrity)은 진실됨, 정직성과 신실성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인애,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지니신 그리고 그는 세계 창조 시에 피조 지성에 입력하여 두셨다. 그래서 이 도덕적 본성을 파괴하는 악을 용납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도덕적이고 의로우시고 정의로운 분이어서 끊임없는 선과 악의 대결 흐름을 정리할 최후 심판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사랑이 정의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정의는 사랑의 정의이고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죄에 대하여 형벌의 대가가 있을 것을 요구한다.
3. 인간의 선택의 자유에 수반되는 책임의 요구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1BC 1084). 인간은 선을 택할 수도 있고 악을 택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의 선택에 따라 자기의 운명을 결정한다(PK 536). 인간은 선택의 자유가 부여된 존재라는 점은 필연적으로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뜻으로 연결된다. 인간의 자유는 책임을 수반한다. 자연계 내지 생물계에서 야기되는 여러 현상들은 인과관계를 밝힌다 해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 존재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서는 그 의지의 자유 내지 선택의 자유에 부응하는 책임을 묻는다. 죄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침해이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기계와도 같은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법을 범한 행위에 대하여 최후 심판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심판은 인간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존중의 결과인 것이다. 하난미의 최훗미판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종국적인 승리이다. 동시에 이 심판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의 자유를 올바로 활용케 하여 멸망당하지 않게 하는 안전판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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