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평신도가 어떤 건설적인 제안을 하여 어느 정도 구현되어가는 중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도자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후 서러워서 하소연을 하여 온 경우가 있었다. 잘 모르긴 하지만 그 따돌림을 당한 배경에는 그럴만한 사정이나 이유 같은 것도 있었기에 지도자는 계획에서 그의 이름을 빼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왕따 당했다고 생각하는 평신도는 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고 교회에 낯을 들고 교회에 출석할 수 없다는 번민을 하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허물 많은 인간 제자들을 그 허물 때문에 그 이름을 빼거나 그 인격을 따돌리지 않고 다시 깨우치고 이해시켜 참여시키시며 쓰시는 연민의 리더십을 발휘하셨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섬기시는 리더십 핵심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섬김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섬기시러 오셨다. 그는 자기가 창조한 인간이 죄악에 빠지자 연민의 마음으로 섬기고 수고하시려고 이 땅에 내려 오셨다. 물론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제물을 받으시며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일은 피조적 존재인 인간의 당연한 도리이고 특권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더 원하시는 일은 인간을 지배하고 명령하는 하나님 상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수고하고 고생하는 섬기는 상으로 나타나시는 일이다. 이것은 구약성경 예배의 핵심이 희생 제물과 그 피 의식에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을 위하여 희생당하고 고난당하는 것이 예표된 하나님의 모습 - 이것이 성경 예배의 진수가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 수고와 희생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의 삶과 십자가의 고통으로 집약되어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실 때 함께 고난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시는 하나님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즉, 무감정(impassibility, apatheia)의 하나님이 아니다. 신적 무고통론 신관을 주장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변화도 없고, 고통도 없는 신을 상정하고 있다.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이나 변화에 무관심한 헬라의 하나님이 아니다. NyssaGregory 등 정통 교부들은 오히려 사랑의 열정(pathos)를 가지고 고난당하고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플라톤 철학에서 주장하는 것 같이 감정이 없기에 고난과 고통을 당하실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그리스도교회에 도입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무감각에 있지 않고 그의 연민에 바탕을 둔 사랑의 리더십에 있다.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고난당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었다(고후 5:19). 십자가 주위에 임한 그 짙은 어두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가리워졌다. 그분은 어두움으로 장막을 만드시고 그분의 영광을 인간의 눈으로부터 감추셨다.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은 십자가 곁에 계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함께 계셨으나 그분의 임재는 나타나지 않았다”(DA 753-754).

하나님은 분노하고 왕따시키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속된 세상에 내려오시어 무한히 용서하고 인간이 당할 심판과 저주를 대신 당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섬김을 받기보다는 고난의 길을 걸으시며 섬기시는 하나님의 리더십이다. 실족한 인간을 향하여 연민을 쏟으시는 파토스의 하나님이시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