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죄의 길
전적인 죄인
인간의 실상을 천진난만하게 낙천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간 심층의 지변에는 죄와 이기심이 깔려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더구나 절대자 앞에 노출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죄의 심각성에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은 죄를 특정 행위 이상의 상태 개념으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죄의 권세 아래 있다고 일깨울 뿐만 아니라(롬 3 : 6, 19), 한 인간의 인격 안에 죄악의 권세가 통치하고 있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롬 7 : 5, 18~23). 모든 인간은 육신이 죄의 권세 아래 팔렸고 몸과 마음의 소욕을 좇아가는 우리는 본성적으로 진노의 자녀가 되어 있다(엡 2 : 3). 이 땅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롬 3 : 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롬 3 :23).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 아래서 탄생하고 있다(롬 5 : 12). 그리하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전 15 : 22). 본성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기 안에 죄를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 안에 고상한 면과 고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것은 대인적인 수평적 관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며, 수직적 관계인 하나님 앞에서는(Coram Deo) 그분이 받으실 만한 의를 소유하거나 배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인식하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전적으로 타락된 존재 (Corruptio totalis)"로 보았다. 이러한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의 고백은 로마 가톨릭주의가 주창하는 타락한 마음이라도 인간이 본성적인 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대립적이었다.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여 이 죄를 잊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림자가 물체의 뒤를 따라다니듯 인간을 항상 따라다닌다. 다른 사람들은 이 죄를 벗어나고자 선행을 쌓는다. 많은 선행이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고 또 뜻을 지닌 분들의 선행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선행을 산처럼 많이 쌓아도 지난날의 죄과는 선행으로 가려지지도 않고 자기 안의 죄된 본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죄를 병적인 과민한 신경의 소산물이거나 미 진화 단계의 불완전성 정도로 보고 있지만 이것은 모래 위에 세운 낙관론에 불과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교육이나 도덕적 수양을 통하여 죄를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우리는 지난날의 유대주의에서 또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그 파산을 본다.
인간은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 죄 된 생활 중에서 방황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삶의 길에서 죄의 속박이나 죄된 본성 아래 있을수 밖에 없다.
인간 존재의 두 방식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인간 존재의 두 방식을 아담과 그리스도를 구속사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데서 보여 주고 있다. 전 인류는 아담의 죄와 불순종을 통하여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누구나 그의 은총 아래에 설 수 있다. 죄와 사망은 아담의 죄를 통하여 진입한 불가분의 동맹관계에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란 표현은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 떄문에 죽게 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아담의 죄가 각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담의 죄와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 사이에는 연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자기의 성향과 소욕에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바울의 이 아담-그리스도의 대비 관계에서 탈죄의 길-즉, 의롭게 되는 길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가 아담의 불순종과 죄보다 더욱 넘치는 은총을 끼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고전 15 : 45), 또는 “둘째 아담”(고전 15 : 47)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오게 된 의에 관한 승리의 찬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간 존재의 두 상이한 방식을 대표하고 있다. 이 두 상이한 방식은 죄와 의이다. 아담의 죄가 죄와 불순종을 초래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는 더욱 더 순종과 의의 생활을 가져온다.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죽은 것같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살게 되어 있다. 이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은 아담의 죄의 결과보다 훨씬 더 강하다.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가 율법의 정죄하에 있는 전 인류의 죄와 허물을 가리우기 때문이다.
의의 관계
레드(George E. Ladd)는 바울이 “용서하다(aphiēmi)”라는 동사를 한번 사용하고(롬 4 : 7), 명사형 “용서(aphesis)”를 두 번(엡 1 : 7 ; 골 1 : 14), 그리고 용서하는 뜻을 지닌 다른 동사 “카리조마이(charizomai)”를 두 번(엡 4 : 22 ; 골 2 : 13) 쓰고 있어 비교적 인색하게 사용하고 있는 반면 동사 “의롭게 하다(dikaioo)"와 명사 ”의(dikaiosyne)"는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동사“의롭게 하다(dikaioo)의 39회 용례 중에서 바울이 27회나 사용하고 있다. 그것도 주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집중되어 있다. 이 dikaioo의 본뜻은 “의롭게 하다”, “의롭다고 선언하다” 또는 “의롭게 여기다”로 알려져 있다. 그 뜻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 말은 법정의 용어다. 바울은 이 용어를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상태의 관계를 맺도록 하는 행동이나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죄인을 바른 관계로 두고 생명을 주입하여 주거나 유지시켜 주는 하나님의 방법이 된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계 13 : 8)이 되셨다. 죄가 진입하여 오자마자 구주가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서 죄에 대한 형벌을 자신 위에 내리게 하고 죄인에게는 두 번째의 기회를 갖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 : 19).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의롭게 된 것처럼 취급한다. 이 칭의는 “죽는 자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는”(겔 18 : 32)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랑과 관심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의 권능에 의존하여 친밀한 재연합 관계를 맺어 죄의 궁극적 결과인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여셨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의롭다 하시는 칭의를 얻고 다시금 생명을 향유케 된다. 이 칭의는 인간이 받은 정죄에서 완전 해방시키는 선언이다. 그것은 인간이 모든 죄에서 용서받는 것이며 죄가 가져오는 형벌을 면제 받아 자유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 : 21).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 이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롬 3 : 28). 율법은 의를 요구하고 정죄한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3 : 21).
칭의의 두 국면
칭의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다. 그 하나는 임시적, 보편적, 법정적인 칭의 양식이며, 또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양식이다. 전자는 지상의 전 인류에게 모두 해당되는 칭의다. 이것은 죄의 고백 유무와 상관이 없다. 또 인간이 그 칭의를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간에 주어지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태도가 윤리적으로 바꾸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따라서 이 칭의의 양식은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이며 비인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이러한 칭의 은총이란 공기로 지구를 에워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 잠정적이어서 항구적인 생명을 주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까지 영원한 구원이 보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믿음에 의한 칭의 양식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때 일어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인한 칭의다. 이 경우 그리스도의 의가 각 개인, 믿는 자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 국면의 칭의는 개별적이며 인격적이다. 또한 그것은 체험적이고 영구적이다. 이 믿음에 의한 칭의에는 회개와 자복 그리고 믿음의 역동적 현현이란 구원의 순서(ordo salutis)가 포괄된다.
회개는 지난날의 잘못과 죄과를 뉘우치고 그것들을 슬퍼하며 그 길에서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경험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러한 일이 각 개인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도록 촉구하는 대로 따르는 자는 자신의 내적인 악을 깊이 깨달아 그 마음은 부드럽게 되며 통회하므로 하나님 또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죄를 자복하므로 심령과 생활이 변혁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 : 31)는 말씀에서 보듯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이 믿음의 칭의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 : 8). 이 믿음은 죄인 구원의 유일한 문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매는 연결고리나 밧줄이 된다. 그러나 구원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 믿음이 아니다. 단지 인간은 믿음으로 그 구원의 선물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의 분량을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롬 12 : 3). 따라서 믿음도 선물이 된다. 각 사람이 이 믿음의 선물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 결정하여야 한다. 혹자는 그것을 발전시키고 혹자는 그것을 축소, 말살 또는 배격한다. 구원하는 믿음은 진리에 관하여 단순히 동의하거나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마귀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막 5 : 7 ; 약 2 : 19). 참된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겸허하게 자기의 구주로 계속하여 모시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8절에 나오는 칭의는 결과도 되지만 과정까지도 함축하고 있다. 믿음은 계속적, 절대적 그리고 완전한 신뢰다. 그리고 충성이며 헌신이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순종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신조에 대한 단순한 이론적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체험적 신앙으로 산다. 자기 생명과 마음을 다하여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한 여인은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야고보서에는 이러한 칭의의 양식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를 예를 들어 강조하여 순종 없는 인간적 견지의 칭의를 배격하고 있다(약 2 : 17~23). 창세기 15장 6절의 진술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의 구체적 실제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었으며, 화육되었다. "믿음은 인간 존재의 총체와 관련된 행위며 태도다”라고 지적한 헨드리쿠스 뻘콥(Hendrikus Berkhof)의 말은 음미할 만하다.
바울 편지서에서 의는 개인의 윤리적 특성을 지적하는 데 그 초점이 있지 않고, 관계의 충실성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 야훼께 헌신하고 굴복하는 관계를 맺는 사람은 참된 의를 향유하고 천국행 티켓을 가지게 된다. 바울이 용서가 전제된 의란 말을 사용하기 좋아한 것에서 우리는 곱하기 법으로 넘치도록 부어 주시고 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의롭다고 하시는 은총을 확인하며 환호한다. 어떤 사람들은 칭의 개념을 바울 신학의 핵심에서 제외시키는 작업을 하여 왔으나 이는 빗나간 발상에 불과하다.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
전통적으로 칭의를 법정적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는 반론들이 제기 되었다. 래드가 강조한 칭의의 관계적 차원의 의미를 강조하는 시각이 더욱 활발하여 오다가 결국은 둘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때 칭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엘렌 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이해를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를 하나로 묶어서 진술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죄인이 율법을 바라볼 때에 그가 범한 죄들이 자기 자신에게 밝히 드러나며 양심을 깨우치게 되며 정죄함을 받는다. 그의 유일의 안위와 소망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데 있다. 그가 과감하게 허락들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을 붙잡을 때에 그의 영혼에게 위로와 화평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는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나이다. 저는 멸망할 수밖에 없으며 무기력하고 소망이 없는 영혼이로소이다. 오, 하나님,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멸망할 수밖에 없나이다”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1기별, 365-366)
풀러신학대학원 김세윤 교수는 그 통합적 통찰을 <칭의와 성화>에서 잘 부각하고 있다.
(1) 법정적 칭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1-26).
위 본문 번역에는 누락이 있다. 그것은 문장 초두에 나오는 “νυνι δε(뉘니 데)”에서 접속사 ‘데 (δε)이다. 그 뜻은 “그러나”이다. 이 “그러나”는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 흐름을 말하고 있어 유대주의의 율밥주의 체계와는 다른 사상의 대 전환점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속량하다’(redeem)란 말은 ‘되사다’(to buy back)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인질을 석방하기 위하여 지불하는 속전(贖錢)이나 노예를 풀어 주기 위하여 지불된 대금(代金)을 의미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못해 받는 저주는 흔히 사형 선고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지불한 속전으로 아들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요 3:1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는 자’(sin-bearer)가 되심으로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다(고전 6:20, 7:23) 그분은 자원하여 우리의 저주를 자신이 취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죄의 완전한 형벌로 고통을 당하셨다(고후 5:21).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다. 구약 시대에 율법의 지도 아래 있는 백성들도 주님을 섬기기로 선택한 모든 사람은 약속된 메시야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롬 3:23).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리셨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이 것을 받아들이면(믿으면) 십자가에서 일어난 역사적 구원 사건이 오늘 내게 실존적으로 효력을 발생하여 죄 용서를 받는다. 여기 법정적 칭의의 핵심에는 은혜성이 강하게 담겨 있다. 이 칭의는 내 주권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옮기는 주권의 전이(leadership transfer)이다(골 1;13).김세윤은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으로 이해하면서 의인으로서의 삶이 없으면서도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관계적 칭의를 강조한다.
(2) 관계적 칭의
하나님이 우리 죄를 씻어버리는 제사(expiatory sacrifice)가 되게 하심은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돌보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심이고 우리를 돌보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심이다(로 3:21-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제사에 대한 선포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롬 1;17). 이 복음을 믿으면 그것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속죄제사가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여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불의, 죄가 씻어지고 그 죄가 초래한 하나님과의 갈등이 해소되어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다. 그래서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의인이 된다. 이것이 칭의이다(김세윤 칭의와 성화, 72). 이것이 우리가 아담이 초래한 죽음의 숙명을 극복하는 길이다. 탕자의 비유는 이를 말해주고 있다. 관계적 칭의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길이다.
이 관계적 칭의는 신분적 성화(하나님께 바쳐진 성도), 하나님과의 화해된 자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자녀가 되는 길, 새로 지음 받은 자들이라는 바울의 그림 언어들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법정적 치의와 관계적 칭의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도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다는 논리를 더욱 굳게 하여 준다.
나가는 말
아담이 물려준 숙명에서 피할 길을 마련해 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벗어나 의로운 대책을 미련하셨다. 인간이 선물로 받는 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근거한 것으로, 살아 있는 믿음을 조건으로 한 하나님과 화해와 친교의 회복을 가져온다.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종교 개혁자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완전하게 구현될 죄의 방면(放免)과 의롭게 되는 일이 현세적 소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성경에서 의라는 단어는 법정적인 것과 관계적인 것이라는 양면성을 지녔다. 왈랜캄프의 칭의의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은 현대신학에서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라는 이해의 연속 또는 같은 범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의롭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산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성령이 자기 영혼에 역사하는 대로 자기 죄를 고백하고 버린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날마다 추구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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