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신인협동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조화를 이룩하는 것이 복음적 신인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이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협동(synergism)’에 해당하는 헬라어 ‘synergos'는 ‘함께 일하는(working together)'의 뜻이다.
칼뱅주의 5대 교리 및 아르미니우스 5대 抗論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칼뱅과 웨슬리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칼뱅은 ‘신 단독설(monergism)의 입장에 서 있다. 즉, 칼뱅주의 5대 교리 처음에 나오는 인간의 전적 타락론에 서 있는 칼뱅은 부패하고 무능력한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한 어떤 기여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한다. 또한 그 은혜를 저항할 수 없다는 신조에 의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신 단독론을 역설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역설한 웨슬리의 구원론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이 은혜로 구원 받는 일에 자유의지의 협력이라는 책임의 결여로 보았다. 즉, 웨슬리는 하나님 은총의 전적 주도권과 인간 자유의지의 책임 협력을 강조하였다.
(1) 칼뱅주의 5대 교리(TULIP)
Unconditional election or particular predestination(무조건적 선택 또는 특별 예 정)
Limited atonement(선택 받은 사람만을 위한 제한 속죄)
Total depravity or natural inability(전적 타락 또는 자연적 무능력)
Irresistible grace or effectual calling(저항할 수 없는 은혜 또는 유효한 부르심)
(Final) Perseverance(성도의 견인, 무조건적인 영원한 구원의 보증)
칼뱅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작정(계획)이 인간의 결정과 행동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고 본다. 하나님의 결정은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이들은 "한번 그리스도인이 되면 항상 그리스도인이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Once a Christian, always a Christian." "Once saved, always saved.)"는 입장을 천명하여 왔다.
(2)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
아르미니안들은 조건적 예지예정론을 취한다. Wesleyan Arminianism은 하나님의 은혜와 전적 타락은 인정하나 선행은총에 의한 회복된 자유의지를 주장한다. Leyden 대학 신학교수가 된 James Arminius는 베자의 사상과 배치되는 사상을 펼친 평신도 Koornheert의 사상을 검토하여 논파하라는 임무를 받고 연구하다가 베자의 타락전 예정론 가르침은 바울의 가르침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이에 동 대학의 극단적인 칼뱅주의자 Gomarus와 부딪히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의 해박한 성경적 설명을 예정론자들은 누구도 성경적으로 논파할 수 없었다.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당대 지배적인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모든 믿는 사람들은 다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아르미니우스를 도르트 종교회의(1618-1619, 154회의 회의)에서 불공평한 참석자 제한에 기초한 다수의 권위로 배척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모든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고, 은총은 독단적인 강요가 아닌 가능케 하시는 자유로운 선물로 보았으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적 진리에 대한 최종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항론파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뱅주의의 5대 명제를 거부했다.
항론파는 이 5대 교리들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에도 포함되지 않고, 비교훈적이며 위험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설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들의 5대 명제들을 주장한다. 그들은 제 1항에서 무조건적 예정에 대하여 예지에 의한 조건적 예정을 주장했다. 제 2항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가 피택자라고 하는 칼빈주의 주장에 반대하여 구속의 범위를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시킴으로써 보편속죄를 주장했다. 제 3항에서는 구속신앙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개개인 스스로는 회개와 믿음에 이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칼뱅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에 오는 항과 밀접한 것으로서 여기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의 일치점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제 4항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반대하고 협력이라는 방법으로 불가항력적이 아니라고 하여 저항할 수 있는 은총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제 5항에서는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한 성도의 견인에 반대하여 "그들이 그 투쟁을 위해 준비되고 그의 도움을 바라고 수동적이 아니라면"이라는 단서를 붙임으로서 성도의 견인의 불확실성을 주장하였다. 이는 곧 구속의 불확실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타락전-타락후예정론 논쟁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이 그 논쟁의 전개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 두 견해의 차이가 예정의 시점이나 예정의 대상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반대한 칼뱅주의의 예정론은 타락전예정론적인 측면(제 1항)과 타락후예정론적인 측면(제 2항)이 다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주장한 것 속에는 타락후예정론적 개념이 나타나있다(제 1항) . 여기에서 우리는 양 파의 쟁점이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이었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두 개념을 모두 거부하고 그 중 한 개념을 채택하는 것은 논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제기한 문제점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 그들이 공격한 것은 절대예정론이었고, 이에 대하여 조건적인 예지예정론을 주장했으며,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성도의 견인이 불확실하다고 주장한 것은 이에 부수되는 논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항론파가 반대한 칼뱅주의와 항론파의 주요 차이점은 예정의 근거에 관한 것이었다. 칼뱅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절대적 예정론을 주장하는 데 반대하여 항론파로 결집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예지에 의한 조건적 예정론으로 그들과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반대한 것은 타락전예정론이 아니라 칼뱅주의자들의 예정론 자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칼뱅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차이점은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36)
항론파(Remonstrant)의 5대 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Conditional election(예지에 기초한 조건적인 선택)
Unlimited(Universal) atonement (개인의 믿음에 따라 제한되는 보편속죄론)
Natural depravity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연적 무능력)
Prevenient grace or Resistible grace (인간의 선의 근거 제시하는 선행은총, 거부 가능한 은총)
Conditional perseverance(인간이 거부하여 영멸할 수 있는 조건적 견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 가치와 역할을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택할 수 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각 개인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나 결정은 예지의 결과이지 예정의 결과가 아니다. 인간의 결정과 행동은 하나님께서 미리 결정하신 결과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은 조건적이다.
아르미니안주의는 칼뱅주의의 신적 작정의 감옥으로부터 믿음을 해방시켰다. 또한 칼뱅주의의 도덕무용론(antinomianism)에 대한 윤리적 반동으로, 만약 인간의 운명이 예정되었다면 성결에 대한 윤리적 요구는 그리스도의 삶과 무관하게 된다는 것이다.
Wesley는 아르미니우스 노선에서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은 사랑과 순종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칼뱅의 정적인 믿음에 대하여 역동적 믿음을 강조하였다.
칼뱅주의 5대 교리와 이에 대항하는 아르미니안주의의 5가지 항론(Remonstrance)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큰 공통점 아래에서 구체적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1. 양측은 예정과 선택을 믿는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이중 예정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믿고, 아르미니안주의는 예지 예정 즉 조건적 선택을 믿는다. 2. 양측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다. 그러나 속죄 대상의 범위 설정에 있어서 양측은 차이를 보여준다. 즉, 칼뱅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제한 속죄론을 신봉한다. 반면에 아르미니안주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류를 위하여 이루어졌다는 보편적 속죄론을 주장한다. 3. 양측은 인간의 자연적 무력함과 전적 타락성을 인정하지만, 칼뱅주의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수용한 반면에 아르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다. 4. 양측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신봉한다. 그러나 이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관하여 차이를 보여 준다. 칼뱅주의는 선택된 자들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즉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장하나, 아르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는 역사하시는 방식에 따라 인간의 악한 의지에 의해 거부될 수도 있다는 저항 가능성을 주장한다.5. 양측은 모두 성도의 견인의 은혜는 믿지만 내용에 차이가 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부주의와 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게 된 사람은 결코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반면에 아르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시지만, 인간의 나태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았다고 본다.웨슬리는 융통성있는 아르미니안주의자이었다. 웨슬리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책임성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었고,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부패도 믿었다. 단지 하나님의 예정과 절대주권을 화석화시켜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등한시 하는 것을 반대한다. 즉,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 것이다. 웨슬리는 온건한 칼뱅주의자이면서도 보다 더 성경적으로 해석한 아르미니안주의를 수용한 구원론으로 균형 잡힌 길을 택한 것이다. 은총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응답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사업에 협력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믿음만으로 라는 신앙지상주의가 야기시킬 율법폐기론을 피하면서도, 로마 가톨릭이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 나머지 칭의와 성화가 동행한다고 보아 결과적으로 행위로 의롭게 되는 교리의 위험성을 피하여 복음을 보호하는 시각에 서 있다.
웨슬리의 선재 은혜론
(1) 웨슬리는 아르미니안으로 선행 은혜로 자유의지의 회복을 말하고, 자유의지의 응답을 회개의 과정에서 강조하며, 선행 은혜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성령이 사랑과 선행을 요구할 때 응답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통상적으로 칼뱅빈주의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을 무시하고, 성령의 역사에 대한 노예의지적 요소만을 강조한다는 비평을 한다. 한 마디로 아르미니안은 자유의지로써 자신의 구원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고, 칼뱅주의자란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기여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의 시각은 구원의 확실성의 근거를 어디서 찾느냐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칼뱅주의자는 이중예정을 믿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공로를 믿는다. 그러나 아르미니안은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는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을 하나님이 만세전에 작정하셨다고 믿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공로를 믿는다.
(2) 칼빈주의자는 택자에 대한 구원은혜는 불가항력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누구라도 구원은혜에 대해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저항할 수 있다고 믿는다.
(3) 칼뱅주의자들은 “참 신자는 은혜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안은 참 신자라도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 파선’(딤전1:19)할 수 있되,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떨어져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Works,Vol.X, p.358-361).
요컨대, 웨슬리의 알미니안 개념은 범죄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돌리고, 구원의 공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는 이치를 설명하는 건전한 신학개념이다. 따라서 혹자가 주장하듯이 아르미니안 개념에서 구원의 공로를 하나님과 인간에게 분배하여 돌리는, 그래서 구원을 인간의 자유의지적 행동으로써 완성한다고 왜곡하는 건전치 못한 신학적 개념을 배척한다.
웨슬리는 빌 2:12-13에 나오는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에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이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을 다음과 같은 명제로 설명한다.
①“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행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일할 수 있다”(ibid.III.3).
②“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행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일해야만 한다. 너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꾼’이 되어야만 한다”(ibid,III.7).
이 두 번째 명제는 하나님의 협동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행하심)에 “늘 함께하며” 지속적으로 반응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행하신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의지하게도(to will)하시고, 행하게도(to do) 하신다”는 뜻이다(I.2).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질이나 언행에 있어서 무릇 모든 선한 욕망을 의미한다.”(I.3). 그리고 “우리가 ‘행한다’(energeo-‘역사하다,’ ‘일하고 있다’)는 단어는 명백히 모든 위로부터 오는 힘, 즉 우리 안에서 모든 올바른 상태를 조성하며, 그런 다음에 우리에게 모든 선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그 힘 전체를 의미한다”(I.3). 즉, ‘선한 욕망’도 하나님이 주시고, 이 선한 욕망이 이루어지게 하는 힘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인간 편의 공로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여지를 다 제거하는 것이다”(I.1).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님의 역사에 힘써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가 반응할 것으로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다 하시는 일에 힘써 순종하는 것이다(4). 여기서 순종은 이치상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기를 진정으로 힘써 간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간구라면 힘써 악을 버리며, 선을 행하며 은혜의 수단을 다 활용하며 간구하는 것이다(II.4). 이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행이 아니라, 믿음을 간구하는 회개의 행동이다. 정숙주의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행하여 이루신다.
웨슬리에 있어서 구원의 최종 목표는 성화이다. 이 구원의 최종목표인 성화는 동적이다. 즉, 성화는 구원의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순차적으로 올라가는 성장과정이다. 이 과정의 시작 단계가 선행 은혜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다음 단계로 이끄는 예비 은총이지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한 충분한 은총은 아니다.
빌 2:12-13에 관한 재림교회의 주석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루라(katergazomai)는 “완성되기까지 수행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사상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참조 롬 3:20~22, 24, 28; 엡 2:8 주석). 그러나 이 은혜는 우리를 선한 행위로 인도한다(참조 롬 6:11~16 주석). 그처럼, 그러한 행위는 우리의 구원을 가져온 은혜를 적용한 결과이다(롬 6:18; 참조 고후 6:1).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도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리스도인의 상급을 그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기는 꺼린다. 만약 그들 편에서 노력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받기를 아주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협력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각 개인은 “들어가기를 힘쓰”(눅 13:24)고,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골 3:9),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경주하며”(히 12:1), “마귀를 대적하”(약 4:7)고, “끝까지 견디”(마 24:13)어야 한다. 구원은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루어 내야 한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명상함으로써 솟아 나오지만 개인적인 협력을 통해 삶에서 실천된다. 그리스도의 공로, 행위 그리고 능력에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을 아무리 깊이 인식해도 지나칠 수 없지만,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원칙들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할 개인적인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
헬라어 energeo는 “힘을 내다”라는 뜻이다. 영어 단어 “energize”(활기를 돋우다)는 에네르게오에서 왔다. 이 단어는 자주 그리스도인 생애에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심에 적용된다(고전 12:6, 11; 갈 2:8; 엡 1:11, 20). 이곳에서 사도는 구원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과 이 하나님의 능력은 그 유익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 속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
제임스왕역(KJV)에는 “both to will and to do”라고 되어 있다. 이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초기의 결심을 할 자극과 그 결정을 효력 있게 만들 능력을 하나님이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처분만 따르는 수동적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을 받으려는 우리의 갈망을 일깨우는 자극을 제공하며, 구원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그 결정을 효력 있게 만들 힘을 우리에게 제공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처럼 구속은, 하나님이 사람이 활용할 필요한 모든 능력을 제공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협력 작업으로 비유되고 있다.
Ellen G. White의 신적 권능 부여 협동론 시각
엘렌 화잇은 <정로의 계단(Steps to Christ)>에서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와 삶의 계단에서 권능을 부여하시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성령의 역사 없이 회개할 수도 없다. 죄를 고백하는 일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권능의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이고 그 다음으로 인간의 자유의지 역할을 강조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구원의 경륜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SC 18).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에게 하늘의 선물을 얻게 하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이라도 하기를 기뻐할 것이다. 저들은 세상을 저들이 살기에 더욱 좋게 만들기 위하여 저희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정신은 참으로 회개한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생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나가자마자 그 마음 가운데 예수라 하는 생각이 날 것이며 사람을 구원하고 성결케 하는 진리를 그 마음 가운데 감추어 둘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 듯하고 그의 내재적 신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우리 속에 충만해질 것 같으면 우리는 잠잠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을진대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빌립이 구주를 처음 만나 보았을 때와 같이 다른 사람을 구주께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점과 내세의 보이지 않는 실재를 그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정로, 78-79).
엘렌 화잇은 회심자의 선한 행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값없이 받은 구원의 선물에 대한 사랑의 반응으로 보고 있. 인간 품성형성에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하나의 요인인 의지는 타락 시에 사단의 장악 하에 들어갔다.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를 바쳐야 한다(5T 515).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를 바친 후 하나님으로부터 의지를 받아야 한다(MB 62). 이런 시각은 웨슬리의 선재 은총론과 맥을 같이 한다.
“품성 건설하는 일에 성공하려면 철저함이 요청된다. 대 건축자의 계획을 수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한다. ... 힘과 에너지가 요구된다. 중요하지 않는 일에 낭비할 여유가 없다. 거룩하신 일꾼과 협력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dl 결단내리는 힘이 그 일에 투입되어야 한다. 세상의 습관, 격언, 교류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을 보존 유지하고자하는 진지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 일에 깊은 사색, 진지한 목적, 견인불발의 고결성이 핵심이 된다" (YI Feb. 1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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