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율법관련 몇 이슈
로마서의 율법관련 몇 이슈
<제 4과 그리스도 “율법의 마침”>에 관한 해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연구 범위 : 롬 5:12~21, 롬 6:15~23, 롬 7:13~25, 롬 9:30~10:4, 갈 3:19~24.
로마서는 율법폐기론을 지지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기하였다고 보는 사람들은 로마서 10:4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또한 율법과 은혜는 서로 충돌하는 개념들인가?
I. 죄가 더한 곳에(롬 5:12~21)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이 본문을 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을 언급하고 있다. 율법이 죄를 지적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무력함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신 예수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죄가 넘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그 모든 죄를 덮으리만큼 더 넘친다.
A. 아담의 죄와 우리의 죄(롬 5:12~21)
로마서 5:12이 말하고 있는 요점은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것에 있을까?
로마서 5:12-21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에 관한 중요한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포인트는 아담의 죄의 결과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대비시키는 점에 있다. 5:12의 의미를 바로 포착하기 위하여서는 5장의 문맥을 통하여 사도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본문 그 자체의 의미를 먼저 음미하여야 한다.
1. 죄가 인격화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서 죄는 낯선 단어다. 본문에는 죄의 기원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지 않다. 죄는 단지 누군가가 접근하기만하면 이 세계의 출입문에서 엄청난 것을 가져다주는 인격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의인화적 언급은 로마서 6-7장에서 더욱 발전되어 큰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종으로 만드는 왕 같은 세력으로 묘사되어 나온다.
2. 아담의 죄는 독특하다.
아담의 죄의 결과는 그의 후손들이 범하는 어떤 죄와 차별화 되어 있다. 아담의 죄는 보편적 영향을 끼쳐 죄가 세상을 장악할 홍수문을 열어 제킨 것이었다. 아담을 통하여 육체적 죽음과 영적 죽음이라는 악한 현상이 이 세상에 이른 것이다.
3. 죄와 사망의 두 세력이 인간 세상을 전면적으로 장악하였다.
피조물은 죄의 노예로 전락되어 그 노예상태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롬 8:20-22). 아담의 불순종의 행위는 인간 및 이 세상과 연대되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결과적으로” 또는 “그러므로”의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죽음이 전 인류에게 파급되어 보편적이 되었다. 전 인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바뀌었다.
4. 아담의 죄와 각 인간의 죄
죄는 보편적이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죽는다. 롬 5:12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한글개정개혁).
“Therefore, just as through one man sin entered the world, and death through sin, and thus death spread to all men, because(epi ho) all sinned. ”(Rom 5:12, NKJV).
암브로시우스는 “epi ho” 를 옛 라틴어 번역에 따라 "in quo"로 오독하여 “그(아담) 안에서(in whom)” 로 보았고,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도 역시 모든 사람이 아담의 허리 근원에서 범죄하였다고 풀이하였다. 그리하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그 때 범죄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를 범하였다고 보는 원죄론을 전개하는 이론은 “epi ho”를 이같이 잘 못 이해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epi ho” 는 모두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because)” 로 번역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pi ho”의 문자적 의미는 “on (the basis of) which”이다. 한글 개역과 NKJV의 번역은 바로 되어 있다. 따라서 “그(아담) 안에서(in whom)” 모두가 죄를 범하였다고 보는 원죄론의 기본적 시각은 바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각 개인이 죄를 범하였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각기 죄를 범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본문 구절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죄를 범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담 안에서”라는 구절이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본문을 여기에 소개할 필요가 없다. 12절은 아담이 죄를 범하였다고 하지 않고, 그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로 동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느니라”라는 진술은 각 사람이 실제적으로 지은 죄를 두고 한 표현이지 아담의 죄 안에 참여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롬 2: 12 참고). 우리는 바울이 하고 있지 않는 의미를 본문에 부가하여서는 안 된다.
세 째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느니라”의 의미를 더욱 명료화하기 위하여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로마서 3:23은 로마서 1:17-3:26에서 논하고 있는 것처럼 전 인류의 실제적인 죄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 이 문맥에서는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하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라는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과거 시제 “죄를 범하였느니라”는 역사를 통하여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한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죄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죽음도 보편적이다. 아담의 범법행위를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와 사람들을 종으로 삼는 세력이 되어 왔다. “첫 아담과 관련하여서 인간은 그러부터 죄책과 사망선고를 받는 것 밖에 없다.”( 6BC 1074).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이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게 되었다. 아담의 행위의 결과로 전 인류에게 죄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은 그의 모든 후손에게 영향을 끼쳤다. 아담이 우리의 원 조상이기에 우리는 그와 연대되어 존재한다. 그리하여 죄가 우리를 관장하게 되었다. 바울의 주 목적은, 아담의 죄의 결과를 그리스도의 의롭다 하시는 일의 결과와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분의 사역이 미치는 결과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죄와 사망이 하나의 원리와 권세로서 아담으로부터 인류 전체에 미치듯이, 의와 생명은 그것을 반격하고 정복하는 원리와 권세로서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온 인류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종노릇하게 하는 권세를 패퇴시키켰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악한 권세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롬5:18).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롭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지어다!
B. “의의 한 행동”
롬 5:18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의로운 순종을 찬미한다(롬 5:18~21). 예수님의 순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죽음의 저주를 깨셨다. 그분의 의는 이제 신자들의 의가 될 수 있다. 첫째 아담의 죄를 물려받음으로 죽음의 저주 아래 있던 자는 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임으로 생명의 선물을 품을 수 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는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 길이 열린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롬 5:20). 율법이 있음으로 더 많은 죄가 밝혀지지만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여 이룬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그만큼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린다. 예수는 죄가 더한 세상에 더 풍성한 은혜로서 오셔서 죄와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어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넘치는 은혜로 생명에 들어 갈 수 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아담의 불충성과는 달리 예수님의 충성은 영생의 소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도 비록 유혹을 받았지만, 결코 죄에 굴복하지는 않으셨다(히 4:15).
III. 율법과 은혜(롬 6:15~23)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이 본문을 근거로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서 율법의 역할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율법이고 신약성경은 은혜라고 대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구약성경에도 율법과 은혜가 함께 나오고 신약성경에도 율법과 은혜가 함께 나온다.
은혜와 율법은 반대말이 아니다. 이 두 체계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은 강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은혜가 반대하는 것은 죽음이지 율법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그것을 범함으로 기인하는 영원한 죽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의 능력을 받아들임으로 의로움을 얻었다고 해도 계속 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의 정죄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을 범함으로 정죄 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율법은 구원받은 사람이 범법하면 여전히 법을 범한 자라고 정죄한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다시는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 준법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의로운 중에 살아가고자 그리스도의 통치영역 아래 있다는 뜻이다.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 구속주에게 충성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뜻한다. 또한 자기의 행함의 공로를 통하여 율법을 지켜 구원 받으려고 하는 삶이다. 율법은 그런 자를 정죄한다. 그런 율법의 정죄 아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은혜 아래 산다는 것을 신자가 이제는 아무런 형벌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도덕률에 불순종할 자유를 가졌다는 의미로 본다면 구속의 경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전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죄가 더 이상 자기를 주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롬 6:12, 15, 17).
IV. 곤고한 사람(롬 7:21~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롬 7:13~25 해석에 관련된 별도 자료 참조.
오랫동안 신학자들도 이 문제로 씨름해 왔다.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비신자일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죄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이길 힘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성경주석은 회심전설과 회심후설 양측의 주장을 살펴본 후에 “이 구절에서 바울의 주요 목적은 구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죄에 대항하여 벌이는 진지한 투쟁을 위해 깨어 있는 사람과 율법 그리고 복음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의 기별은 비록 율법이 그러한 투쟁을 촉발시키고 격렬하게 만들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승리와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성경주석 11권, 667).
이 말씀을 어떻게 보든지 우리는 죄와 씨름하는 이 사람이 여전히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바울의 모든 약속은 무의미하게 된다. 마태복음 5장에서 드러났듯이 죄는 종종 행위가 일어나기 이전에 시작된다. 사람은 죄와 관련된 것을 생각만 해도 율법을 어기게 된다. 실제로 이런 사실은 고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 사람은 곤경에 빠져있으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율법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저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을 꾸준히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롬 7:24~8:2).
V. 율법의 마침(롬 9:30~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마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telos”인 바 “마침,” “끝”과 “목적” “목표”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녔다. “telos”를 목표와 목적의 의미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혹시 “마침”이라고 번역하더라도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완성”으로 보아 율법의 목표 의미로 부각시키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롬 10:4 본문을 두고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많은 사람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쓸모없게 만드셨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율법의 지속적인 타당성을 논의하는 로마서와 다른 신약 저서의 내용과도 어긋난다
이 주제를 심도 있게 연구한 R. Badenas의 박사 논문 Christ the End of the Law 는 Telos가 명사 속격을 수반하는 경우 “끝”이 아닌 “목적,” “목표”의 뜻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구약제사법 및 도덕법의 절정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신 의가 율법이 지향하는 목표, 목적이며 율법의 진정한 의도가 된다. 같은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문맥상 언약과 율법의 의미)이 폐하여 진 것 같지 않도다”(롬 9:6;cf. 3:31)에 비추어 보아 또 마 5:17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이 해석이 타당하다. 구약성경의 초점은 그리스도이다. 를 고양 및 증거한다.
먼저 넓은 문맥 롬 9:30~10:4을 살펴보자. 바울은 구원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율법을 의지하여 의를 얻으려는 것은 부딪힐 돌에 부딪혀서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결과에 이르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고 율법의 목표와 완성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시어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여타 로마서의 기별과 마찬가지로 이 말씀에서 바울의 목적은 참된 의의 기원을 드러내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지목하는 역할을 하지만 사람을 의롭게 할 능력은 없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의 역설을 소개한다. 의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방 민족들은 그것을 얻은 반면, 의로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이스라엘 백성은 의를 얻지 못했다. 바울은 의에서 유대인을 배제시키려는 것도 모든 비유대인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율법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죄인에게 의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이 진실하게 의를 갈망했지만 그들의 탐색은 소용이 없었다(롬 10:2).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지만 그들 방식대로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목표로 삼았지만 그것을 구원의 근원되시는 분과 혼돈하였다. 율법은 선하지만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죄악을 밝히고 의에 대한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그것이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목표’라고 설명한 이유이다. 그분은 율법을 끝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의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완성’이시다.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 회개한 죄인은 구원을 위해 그분을 주목한다. 율법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롬 10:4).
본문이 지닌 또 다른 의미는 예수께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주신 그 생명,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은 이 율법의 정죄에서 건져내시고 생명의 능력으로 율법이 삶과 인격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그의 생활방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목적이시다. 이제는 조문에 매여서 율법을 지키는 의미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내용이 그의 생명의 생리가 되었기 때문에 지켜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구원받아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생활을 정리하여 간단히 적어보면 바로 십계명이 된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어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VI. 몽학선생 - 엄격한 교사(갈 3:19~24)
바울은 로마서와 보조를 맞추어 갈라디아서에서도 율법이 죄를 정의하되 사람을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명시한다(갈 3:19, 21).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3,24].
A. 1888년 전후 재림교회 내의 몽학선생의 정체에 관련된 신학적 해석 두 입장
1. Butler 해석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율법 개념을 의문률로 보는 논리를 추구하고 있다. 유대주의 율법교사들과 그 제자들은 의문률 준수를 고집하고 할례를 고수할 것을 가르쳤다. 이로 인하여 복음의 대원칙에 혼선이 생겼다. 할례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을 이교도와 구별케 하는 트레이드마크 역할을 한다(분리의 표징론). 유대주의 교사들은 이 의식을 잘 지켰더라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로 축복을 받았을 것으로 가르쳤다. 도덕률은 전 인류를 기속하고 의문률은 특별한 백성을 기속한다. 버틀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다르다고 한 주장으로 웨고너의 동일론을 비판하였다. 로마서는 도덕률적 차원에서 구원의 경륜, 칭의와 연계시켜 풀이하고 있으나, 갈라디아서는 유대인 이방인 모두 도덕률에 순복하여야 하나 유대주의 교사들이 다른 복음 즉 할례 등 의문률의 준수를 강조하여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율법이 할례와 관련된 기별을 보여주고 있다(1:6; 3:1;4:9, 11; 5:2, 3; 6:2). 당대에 일어나고 있던 행위(practice)가 주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단 지도자로서 전통적 해석에 따르므로 혼선이 없어야 한다. 교회의 연합을 강조하였다. 웨고너는 율법폐기론자에 속한다.
2. 엘렌 화잇의 기별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함이라”(갈 3:24).
"이 성경에서 성령께서는 사도를 통하여 특별히 도덕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게 해주며,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통한 용서와 평강을 위해 그리스도께 피하게 한다.“ 6SDABC 1110.
"마음이 갈바리의 십자가로 향할 때, 온전치 못한 우리의 눈에 수치스런 십자가위에 계신 그리스도가 보인다. 왜 그가 돌아 가셧나? 죄의 결과로 인한 것이다. 그때에 죄의 특성을 보도록 눈이 열린다. 율법이 깨어 졌으나 그것은 범죄자를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형벌을 일으키는 우리의 몽학선생이다. 치료제가 어디에 있는가?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는데 그분은 그의 의를 타락하고 죄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그리하여 사람을 그분의 의로우신 품성가운데서 그분의 아버지께 드리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 달리신 분이시다.“ 상동
"나는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관한여 질문을 받는다. 어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 선생인가?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의문의 율법과 십계명의 도덕법들 다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유대인 제도의 기초이셨다. 아벨의 죽음은 그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인 것과 희생 제물로 표상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구원받기를 거절한 가인의 죄의 결과였다.
가인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해 흘려질 그리스도의 피를 표상하는 피뿌림을 거절하였다. 이 모든 제도는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며 그리스도는 모든 제도의 기초가 되셨다. 이것이 죄된 인류가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이끄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그의 사업의 시작이었다. 성소
와 관련된 모든 봉사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재에 관해 계속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이 봉사는 하나님의 왕국의 법인 그분의 율법에 대한 사랑을 각 사람의 마음속에 창조하도록 계획되었다. 희생 제물은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의 실물교훈이 되어야 하였는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희생가운데서 그분께서는 인류가 지은 죄를 그 자신이 지시고 무흠한 자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 상동 1109.
요약하면 갈라디아서의 율법은 도덕률과 의문률 둘 다를 의미하지만 특별히 도덕률을 지칭한다. 구약시대에 도덕률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인 의문의 율법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 도덕률은 동일한 임무를 계속적으로 수행한다. 그 임무란 전에는 표상으로 나타났으나 이제는 실현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그의 대속적 희생으로 죄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다음의 주제 즉 두 율법으로 인도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성경절에서 성령께서는 사도를 통하여 특별히 도덕률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원고 23a, 1896).
B. 몽학선생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엄격한 원칙을 제시하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까지 지켜 주는 초등교사와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번역에 따라 율법은 ‘초등교사’, ‘작업 감독’, ‘가정교사’, ‘관리인’ 등 여러 명칭으로 비유된다. 그리스 원어는 부자의 아들을 훈육하기 위해 고용된 종을 가리킨다.
아들의 수양은 가정교사의 책임이었다.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가정교사는 주인의 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필요하면 어떤 일이든 행할 권한이 있었으며 심지어 체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어른이 되면, 가정교사는 더 이상 그를 지도할 권한이 없었다.
율법은 또한 가정교사로서 “믿음이 오기 전에” 신자를 지켜주는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갈 3:23).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과 목적이 되심을 보게 된다.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이점을 명확히 한다(24절).
가정교사는 그 가정에서 맡은 자녀가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는 역할을 한다. 그처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도록 교육한다. 자녀가 장성하여 스스로 바른 길을 따라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면 가정교사는 자기 임무를 다 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아들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아도 그동안 가르친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율법과 믿음은 이와 같은 관계에 있다.
비록 가정교사는 성인이 된 아들을 더 이상 지도할 권한이 없지만 아들이 그동안 배운 교훈들을 통해 그가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성숙에 도달한 사람처럼 더 이상 정죄하는 율법의 권능 아래에 있지 않지만,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율법의 원칙에 맞게 자기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 십계명의 율법은 금제(禁制)의 면에서보다도 자비의 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율법의 금제성(禁制性)은 순종에 따르는 행복의 확실한 보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일 때에 율법은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줄 품성의 순결성을 이루도록 역사할 것이다. 순종하는 이들에게 율법은 보호의 장벽이 된다. 우리는 이 율법 안에서 인간에게 의의 불변의 원칙을 나타내시고 범죄의 열매인 악에서 인간을 보호하시려고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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