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금영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의 상호관계에 대한 그리스도교계에서의 이해에는 혼선이 존재하여 왔다. 고대 그리스철학의 부동의 원동자라는 신관(神觀)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 신학조류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현대신학의 기류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배척하는 특성이 강하다. 소위 사랑의 신학(The agapeic theology)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배척하거나 약화시키는 사상이 오늘 이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이런 흐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진노 개념은 신학적으로 난해한 이슈가 되어 왔다. 하나님의 진노 사상을 약화시키거나 배척하는 사상 유형들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재림신도로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구축하는 일에 초점을 두기로 한다.
I. 성경 상의 하나님의 진노 메시지 개요
많은 성경 기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 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진노 사상은 성경에 보편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에 따르면 구약성경에는 20개 이상의 단어가 하나님의 진노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하님의 진노에 관한 문구가 580회가 넘는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 즉, 일반적인 죄(욥 21:20), 우상숭배(출 32:8-10), 피 흘림(겔 16:38), 간음(23:27), 과부와 고아 학대(출 22:22-24), 폭력(겔 8:17-18), 탐욕과 위선(렘 6:11-13)과 같은 특수한 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 메시지를 이어가고 있다. 침례자요한의 메시지(마 3:7)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마 22:7)는 진노 메시지와 연계되어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 개념은 복음 기별의 기초적 용어로 등장한다. 요한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고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주 악한 자들이 받을 보응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요컨대, 신약성경에서 복음(Good news)의 선포는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를 수반하고 있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4:5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예수께서는 회개치 않는 자들을 가차없이 징벌하신다 (마 18:34, 35; 22:7; 눅 12:46; 19:27)고 선포하셨다.
다른 사도들 역시 이 하나님의 진노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과 동시에 소멸하시는 불로서 하나님을 제시한다(롬 12:19; 히 10:30).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 4:12). 사도들은 “하나님의 진노”(롬 1;18; 엡 5:6; 골 3:6), “어린양의 진노”(계 6:16)라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심판 및 재앙과 연관하여 이 진노나 분노 사상을 13회에 걸쳐 제시함으로 일관적으로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 이슈가 이 처럼 성경 전체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사실은 동 이슈가 성경에서 우발적으로 또는 주변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II. 인격적 사역론과 비인격적 사역론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는 시각은 인격적 사역론과 비인격적 사역론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A. 인격적 사역론
인격적 사역론은 하나님의 진노를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인격적 활동 사역이라고 본다. 이는 전통적인 시각이다. 이 인격적 사역론은 하나님의 사랑의 돌봄이라는 중요한 구속활동을 주재하시는 분이라는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심판자이시지만, 그 이상으로 구속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복음에서 진노를 배제시킨 것은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약화시키거나 거세시킨 하나님의 사랑은 정당하게 이해될 수 없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케 하신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인간의 분노가 비이성적이고 예측 불허하며 자제력이 결여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하나님의 진노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인본주의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인격적 사역으로 이성적이고 예측가능하며 일관적이고 제어와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인격이 죄에 대한 반응이 진노로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함의 불붙는 듯한 반응이다.
B. 비인격적 자연적 결과론
하나님의 진노를 비인격적 자연적 결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죄인이 자기가 뿌리는 대로 거둔다는 시각에서 풀이한다. 이는 죄인의 자기 파멸론이라는 일종의 기계론적인 시각이다. 진노를 비인격적인 것으로 본 신약학자 C. D. Dodd가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도덕적 우주에서 어떤 원인에 대한 특정의 결과 발생이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진노는 인간의 죄의 결과가 된다. 진노는 인간의 자유 선택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의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그 단초를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에서 찾는다. 재림교회 내에서는 A. Graham Maxwell이 이런 시각에 근접하고 있다.
비인격적론적 진노 사상은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죄의 자기 파멸적 결과를 초래케 하는 영적, 도덕적, 유전적, 보편적 법칙을 세워 두셨다고 보는 점에 그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러나 죄 그 자체의 자기파멸이라는 기계론적 시각은 성경에 나와 있는 악인에 대한 심판 모두를 설명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죄의 결과를 모두 비인격화시켜 이해하는 일은 하나님의 인격적 사역을 도외시킬 뿐만 아니라 공의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를 그 저변에 깔고 있다.
III. 사랑과 공의의 관계
A. 사랑
사랑은 주로 개인윤리의 핵심으로 거론되어 왔다. 사랑은 인격적 윤리의 지반이 된다. 전통적 그리스도교 윤리는 이 사랑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사회윤리에서 사랑을 배제시키면 사회가 경직되거나 인정미가 없는 사회로 전락 된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사랑으로 통치하시고 있는 점은 사랑을 개인 윤리의 범주에 가두어 둘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사랑은 감정이나 정서와는 다른 전 존재로서의 인격적, 역동적 태도이다. 정서나 감정적 차원에서 사랑을 본다면 정서나 감정이 지닌 충동성, 순간성, 산발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건전한 어머니의 사랑은 항상 정서적일 수는 없다. 사랑을 인격적 태도로 볼 때 합리성과 지속성을 기대할 수 있다. 오히려 감정은 인격적 태도의 결과로 보는 것이 더욱 안정적 사랑을 추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포용, 장악할 수 있는 영원한 원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인 올바른 법칙에 지배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올바른 목적을 지향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의 표준이 된다.
“의는 거룩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요한일서 4장 16절)시다. 의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시편 119편 172절)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로마서 13장 10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랑이며, 사랑은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의를 얻게 된다”(MB 1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의 감정과 사상과 목적과 행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SC 61).
B. 공의
공의는 주로 사회 윤리의 핵심이 된다. 공의는 사회 질서와 제도 윤리의 기초가 된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은 불의한 사회에서 정의 구현을 강조하였다. 공의가 서지 않는다면 안정적이고 조화스런 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 사랑이 결여된 자연인이라도 정의 개념을 강조하거나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산술적, 평균적 정의 이외에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는 분배적 정의의 범주론은 일반적으로 수용되어 왔다.
구약성경에서는 정의 개념이 항상 하나님의 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works)이 완전(perfect)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just) 진실무망하신(faithfulness)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신 32:4). 이 본문에서 “공평하며”의 문자적 의미는 “의로우신 분(saddiq)"이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의롭게 심판하신다고 한다(시 9:4-5; 119:7). 이 점에 대하여서는 엘렌 화잇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의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품성은 우리의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믿음이 진실된 여부를 보여 준다”(실물, 312).
의는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에 표현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표준에 따라 정의된다”(SC 61).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의와 심판하시는 의라는 이중 구조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불순종에 대한 사형선고를 요청한다.
C. 사랑과 정의(공의)의 관계
전통적으로는 사랑과 정의를 분리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는 개인 윤리의 기조로, 다른 하나는 사회 윤리의 기조로 본다. 마르틴 루터, Emil Brunner가 이런 대표적 시각을 지녔다. 그러나 Paul Tillich는 사랑과 정의를 분리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동일시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사랑은 소외되었던 존재를 하나로 결합하는 힘으로, 정의를 동 결합을 가능케 하는 형식으로 본다. R. Niebuhr는 사회윤리의 결정적 원칙은 사랑이 아닌 정의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Brunner의 이원론적 시각을 비판하면서 사랑의 목표 아래 정의를 구현하여야 하는 것을 강조한다. 니버는 사랑이 곧 정의의 완성이라는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한다. Joseph Fletcher의 상황윤리는 사랑과 정의를 등식적으로 이해하여 문제성을 안고 있다.
엘렌 화잇은 공의와 사랑은 쌍둥이 자매관계로 본다. 공의와 사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야 한다(5T 559). 그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합시키거나 분리시키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율법과 연계시키고 있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 못지않게 그분의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진리와 공의로부터 자비를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하나님의 계획에는 이것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전자는 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시 85:10)다"(DA 762).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공의는 이 사랑의 다른 측면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그 분의 거룩함과 거룩한 율법의 죄에 대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죄에 대한 반응이며 혐오인 것이다. 그의 진노는 죄에 대한 혐오이며 악과 싸우시는 거룩하신 모습을 보여주신다.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측면에 있는 공의의 요청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엡 2;3). 우리는 진노의 대상, 즉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진노를 담당케 하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한 순간에 불과하다(시 30:5). 하나님의 진노를 배척하는 것은 그의 완전한 통치권을 약화시키거나 배척하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공의는 사랑의 강인한 국면이 된다. 참된 사랑과 공의는 서로 연합되어 있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공의는 범죄에 대한 상응한 처벌을 요청한다. 공의가 동력을 일으키는 모터라면, 사랑은 그 방향타가 될 것이다. 사랑이 비전이라면, 공의는 그에 대한 지시가 된다. 사랑은 공의의 실행을 요청하고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도록 한다. 사랑은 공의를 풍요하게 한다. 이런 기조에서만 사랑과 정의를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라는 이원론으로 접근하는 한계점이 극복되는 것이다.
성경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심판, 및 하나님의 보응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상호간 역동적 상관관계를 지닌 것으로 나오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과 반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랑의 발전이며 그 자연적 열매가 된다. 사랑의 강도가 클수록, 죄에 대한 분노도 커지고 진노의 강도도 커진다. 이는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으로 돌보는 피조물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기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반대어는 진노가 아니고 무관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이 멸망해 갈 것을 두고 팔짱끼고 가만히 서 있는 분이 아니다. 그의 진노는 죄에 대한 그의 사랑의 반응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과 반대, 모순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은 타락한 개신교 신학의 소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적의한 형벌이며 심판이다. 진노는 죄의 죄됨을 반대하는 공의의 법에 대한 반응이다. 진노는 이 심판을 통하여 자기의 의로우심과 공의로우심을 온 우주에 드러내시는 행위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공의에 맞게 죄 문제를 처리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전개되어 온 대쟁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죄 그 자체의 자기 소멸론으로만 보는 시각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닌 단견에 불과하다. 죄인이 자멸하였다하여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는 것이 아니고 응분의 결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고후 5:10; 롬 2:6). 죄인은 심판정에서 자기 행위에 대한 설명을 하여야 한다 (롬 14:10-12; 행 24:25). 사랑도 공의도 인격적인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과 공의를 완전히 조화롭게 구현할 수 없지만, 그리고 루스벨은 사랑과 공의의 충돌론을 전개하여 반역을 부추겨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죄인을 구원하신 십자가는 이 사랑과 공의 완전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구속의 경륜의 완결은 사랑과 공의의 완전 조화의 대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산단 사이의 대쟁투는 이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쟁투의 초기에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은 순종할 수 없으며, 공의가 자비와 조화되지 않으므로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는 죄인이 용서받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모든 죄는 반 드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만일 하나님이 죄의 형벌을 면제해 준다면 그분은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사단은 주장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그 분의 뜻을 대항할 때 사단은 기뻐 날뛴다. 사람은 율법을 순종할 수 없으므로 용서받을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고 그는 선언한다. 사단은 자기가 반역한 후에 하늘에서 추방당했 기 때문에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에서 영원히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죄인들에게 은혜를 나타내고 계심으로 그분은 공의로우실 수 없 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한 공의(정의)와 무한한 자비의 조화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 공의는 사랑의 구성 요인이어서 양자를 분리하는 일은 양자를 모두 파괴시키는 것이 된다.
IV. 두 종류의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면서 이를 간접적 심판으로 보는 시각과 직접적 심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A. 하나님의 간접적 심판행위
하나님의 간접적인 심판행위는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의 철수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진술을 두고서 혹자는 죄의 기계론적 자멸론을 구축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이론(The God-does-not-kill-sinners theory)을 전개한다. 그들은 이 주장의 근거로 엘렌 화잇의 실물교훈과 각 시대의 대쟁투 등에 나오는 다음 진술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진술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의 철수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간접적인 집행심판의 일종이다. 여기서는 죄의 자기 파멸론 근거로 제시한 몇 개의 진술들을 들어보며 그 진상이 무엇인지를 밝혀본다.
1.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시키지 아니하신다. 멸망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 될 것이다. 양심의 경고를 무시하는 자는 불신(不信)의 씨를 심는 자이다. 그 씨는 정확하게 불신을 수확하게 될 것이다”(COL 84).
이 진술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 선택을 무시하고 전단적으로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위 진술문은 인간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책임이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visiting)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위 인용문에 나오는 ‘갚되’는 파카드 (דקפ)라는 히브리어로 ‘처벌하다,’ ‘참석하다,’ ‘방문하다,’ ‘소집하다,’ ‘지정하다,’ ‘주목하다’ 등의 뜻을 지녔다. 파카드를 좋은 뜻, 즉 호의적 방문으로만 고집하여 그 의미를 고정시키는 시각은 편향된 자세에 불과하다. 다른 의미, 적대적 방문(보복과 징벌)으로도 사용되고 있다(사 10:12; 렘5:9; 9:24; 11:22). 따라서 파카드를 문맥에 따라 적의하게 번역을 하여야 하고 그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 한근 개역본은 “갚되”라고 하여 바르게 번역한 것이다. 물론 둘째 계명에서 파카드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처벌을 시사하고 있지 않지만, 부모의 부도덕한 행실로 인하여 자녀의 육체와 정신에 질병과도 같은 악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은 자명하다. 간접적으로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유전법칙이나 도덕법칙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뿌린 죄악이 자녀들에게 도덕적, 영적으로 무서운 결과가 야기된다는 법칙을 정하여 두었다.
흠정역이 “파카드”를 두고 “visit"라는 어휘로 번역한 것에서 원래 지닌 당대의 의미를 무시한 채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된 오늘날 일반화된 ”방문하다“라는 의미로만 이해한다면 그 본래의 의미가 충분히 드러난 것이 아니다. 어휘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른 뜻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 재 번역을 하여야 한다. 약 400년 전 영어 어휘 의미와 오늘의 의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단어들이 많기 때문이다.
‘파카드’를 두고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하고 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 자녀 들이 부모의 비행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나 그들이 부모의 죄 에 동참하지 않는 한 부모의 죄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자녀들 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른다. 유전과 부모들의 모본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아버지가 저지 른 죄를 짓는다.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을 지 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전승물로 내려간다. 이 무서운 사실이 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부조, 306).
“유전과 부모들의 모본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짓는다.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을 지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전승물로 내려간다”(PP 306).
“우리는 하나님을 죄인을 벌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죄인이 자기 스스로 벌을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죄인 자신의 행동들이 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연속적인 환경들을 촉발시킨다. 범죄의 모든 행위는 죄인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며 품성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가 더욱 쉽게 또다시 죄를 짓게 만든다. 죄를 짓기로 선택함으로 인간은 저들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며 축복의 통로에서 저들 자신을 차단시키며, 그 분명한 결과는 패망과 사망이다”(1기별, 235).
위 둘째 계명에 나오는 내용 해설이나 “죄인 자신의 행동들이 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연속적인 환경들을 촉발시킨다”에서 화잇은 유전법칙과 부모의 잘못된 모본이 자기와 자손들에게 끼는 영향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흠정역이 채택한 어휘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자기에게 반역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과 보호막을 철수하시므로 죄인들이 사단의 파멸 세력권아래 볼모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개인적으로는 사울에게서 그리고 집단적으로는 외세의 침공을 받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역사에서 나타난다.
“옛날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불의로 말미암아 넘어진다. 죄의 생애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과 조화되지 못하고, 그들의 본성이 악으로 타락되어 버렸으므로 예수님의 강림하시는 영광이 그들에게는 소멸시키는 불이 될 것이다”(GC 37).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평안과 안전에 대하여 그리스도께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을 사단의 지배에 완전히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억제하시는 능력이다. 불순종하고 배은망덕한 자일지라도 악한 자의 잔인하고 사악한 세력을 막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감사하여야 할 큰 이유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그와 같은 견제(牽制)는 제거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에 대한 판결을 집행하시는 분으로 죄인 앞에 서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거절하는 자들을 버려 두시사 그들 스스로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신다. 모든 진리의 빛을 거절한 것, 모든 경고를 멸시하고 유의하지 아니한 것, 온갖 정욕에 빠진 것,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 등은 틀림없이 뿌린 대로 수확을 거두게 될 씨이다. 하나님의 신은 완고하게 거절하는 죄인에게서 마침내 떠나신다. 그렇게 될 때, 영혼의 악한 정욕을 제어할 능력이 없어지고 사단의 원한과 적의(敵意)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은혜를 소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자비의 호소를 거스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두렵고도 엄숙한 경고이다”(쟁투, 36).
AD 70년 예루살렘 파멸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거두시는 결과 오는 악의 자기 파멸론은 단순한 인과론적 기계론이 아닌, 인간의 선택의 결과 도래한 하나님의 철수에 따른 자멸론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철수는 곧 집행 심판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계론적 자멸론은 은혜의 기간동안 일어나는 현상이지 사단의 제어력이 종결된 다음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역대상 10:14에서 사울의 죽음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처럼 묘사되었지만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니”(대상 10:4)에서 보듯 자기가 뿌린 죄악의 씨를 자기가 거둔 것에 불과하다. 성경은 이런 자연적 보응으로서의 간접적 심판행위에 관한 사상을 지지하고 있다(잠 22:8; 호 10:13; 갈 6:7-9; 욥 4:8).
이상에서 살펴 본 이외에도 하나님의 보호막이 철수된 사례들이 있다.
1. 욥--은혜의 기간 중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제의를 제한된 범위 내에서 허용하므로 사단의 참소의 실체가 드러나는 일종의 대쟁투적 이슈가 담겨 있다. “하나님의 불”(욥 1:16)은 종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단이 일으킨 것이다. 은혜의 기간 중에는 사단이 활동하고 있다.
2. 국법질서--하나님의 율법, 즉, 도덕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이런 금지는 형법에서 처벌에 관한 사항을 위임하여 규정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각 나라의 국법인 형사법에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원천이 된다. 그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생명을 주실 수 있고, 동시에 국가의 사법적 질서를 통하여 그 생명을 취하게 하실 수도 있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롬 3:5-6). 그러나 인간은 도덕법을 만드신 분의 뜻에 거슬려 하나님의 율법을 오용하여서는 안 된다.
3. 예수의 죽으심--예수께서는 자원하시어 자기의 생명을 인간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자 내 놓으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
“우리의 대리자요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 모두의 죄가 놓여졌다.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분은 범죄자로 헤아림을 받으셨다. 아담의 모든 자손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눌렀다. 불법으로 인하여 생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 곧 그분의 무서운 진노가 당신의 아들의 영혼을 전율하게 만들었다”(소망, 753).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조건으로 우리를 위한 대치물과 담보로서 이 희생을 받아들이셨다”(1기별, 215).
“그리스도께서,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죄는, 무죄하고 순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전가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격이 없지만 모든 불의에서 깨끗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입혀주신 의를 입고 주 앞에 서 있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화잇주석, 슥 3:4,5).
예수께서 짊어지신 것(전가된 것)은 죄의 형벌이다. 죄는 불법이다(요일 3:4).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케 하며 사망의 처벌이라는 법적인 결과를 당하여야 한다(롬 6:23). 인간은 이 법적 요구, 즉 보응적 공의를 충족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율법은 의, 즉 의로운 생애, 완전한 품성을 요구하지만 인류는 그 요구에 미칠 수 없다. 인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계발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그분의 생명은 사람들의 생명을 대신하신다”(소망, 762).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공의, 거룩하심, 및 진리를 희생하고 죄를 용서하실 수 없으시다”(MS 29, 1906).
“인간의 대속자와 보증이 되는 분에게 보응적 공의를 부과하시는 권능은 죄된 세상에 임하는 엄청난 진노의 무게 아래 고난당하시는 분을 지탱시키고 떠받드는 권능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 선언된 그 죽음을 받으시고 계셨다.”(MS 35, 1895).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는 불변적이다
B. 하나님의 직접적 심판 행위
성경은 분명하게 사랑과 용서의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진노하시며 죄인을 징벌하여 왔고 또 멸망시킬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출 20:5; 34:6, 7; 신 7:9, 10). 특히 이사야는 이 점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사 13:9; 26:21; 28:21).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 여리고 성의 파멸 등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적 파멸 행위에 속한다.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의 보수(報讎)를 하나님의 품성의 현저한 특징으로 제시하는 일을 주저하고 있지 않다 (신 32: 41-43; 시 94:1; 사 1:24; 겔 7:8, 9; 미 5:15; 나 1:2). 그리스도의 재림 시 살아 있는 악인들은 멸망당하고 천년기 끝 삼림 시에는 사망의 부활을 하여 성을 공격하는 모든 악인들이 심판의 집행심판을 당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보복의 여호와(Yahweh Gemulah)라는 칭호도 지니셨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렘 51:56). 이 보복의 여호와는 바벨론의 파멸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은 경건치 않는 자, 교만한 자, 악한 자들을 보복하신다(사 3:11; 시 28:4; 94:2 등). 보복의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신다(옵 15; 계 22:12). 룻기에 나오는 ‘구속자(redeemer)’라는 뜻하는 gō'ēl은 '친족,’ '보복자(revenger, avenger)' 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고엘’은 압제 받거나 빈곤한 친족을 구출하고 탈리오의 법(lex talionis)에 따라 보응하는 의무를 진다.
화잇은 성경에 나오는 보수하시는 메시지를 그대로 수용 확인하고 있다. 1876년 홍수 전 악인들의 멸망에 대하여 하나님이 책임 여하에 대한 이슈를 두고 재림교회 내에서 상반된 견해가 제기되고 있으나 화잇은 7쪽 짜리 원고 “노아의 시대(The Days of Noah)"에서 “하나님께서 이 광대한 세계를 침몰시키셨다”고 하였다. 또 그는 여리고 파멸에 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여리고를 향해서 발해졌다. 그것은 요새였다. 그러나 주님의 군대의 사령관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하늘 군대를 이끄시고 그 도시를 공격하셨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육중한 성벽을 붙들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은혜의 시기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 거룩한 천사들에 의하여 나타났던 것과 똑같은 파괴력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악한 천사들에 의해서도 발휘될 것이다. 파괴력은 이제 준비되어 있다. 각 곳에 폐허 상태를 가져오기 위하여 하나님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다.” “예수께서 성소를 떠나실 때 마지막 7재앙이 부어질 것이 보였다. 천사가 말하기를 악인의 멸망이나 죽음을 야기시킨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이다”라고 한다.
그러면 이미 앞에서 살펴 본 Christ's Object Lessons의 84쪽과 The Great Controversy Between Christ and Satan 의 37쪽에 나오는 외양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는 진술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두 진술들의 내적 문맥을 살펴보면 멸망시키는 분이 하나님이냐에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께 살인의 죄책이 있느냐 여부에 있다. 화잇이 논증하고자 하는 점은 하나님께 죄책이 없으시다 라는 점에 집중되고 있다. 살인죄가 되려면 희생자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생명의 길을 값없이 제공하셨다. 인간이 이 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사망의 길을 택한다면 그 책임은 해당 인간에게 있다. 그는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다. 원인-결과의 천연계의 원리처럼 “각 사람의 영원한 운명도 이와 같은 식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명을 받은 거룩한 천사들이 파멸하는 권세를 하나님이 허락하는 때 악한 천사도 행사할 것이다”라는 진술 다음에는 하나님의 천사의 도륙 사건(출 12장), 여호와께서 다윗의 범죄 결과 한 천사를 파견하여 7000명을 도륙한 사건(대상 21:14)이 나오고 있다.
그것이 이루어진 후에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를 거두게 된다. 사단과 그와 연합한 모든 자들은 반역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과 조화될 수 없는 곳에 자기 자신을 둠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에게 삼키는 불이 될 것이다. 사랑이신 그분의 영광이 그들을 멸할 것이다.
결국 악인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 편의 독재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품성 문제가 기본적인 문제로 부각되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미디안 사람들의 유혹에 빠졌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여 이스라엘 가담자들과 미디안 유혹자들에게 진멸령 내리셨다. 그 유혹자들도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다(민 31:13-18). 하나님의 공의의 이 진멸령을 두고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백성들은 신속히 내리는 형벌로 인하여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었다. 무서운 염병이 진중에 퍼져 수만명이 삽시간에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에게 이 배도에 가담한 두목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신속히 집행되었다. ..두목들이 그처럼 혹독한 처벌을 받는 것을 보게 하심으로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며 저들에 대한 당신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깊이 깨닫게 하셨다”(부조, 454-455).
“많은 사람들이 주께서 자기 백성들로 다른 나라와 싸우려고 하시는 것을 보고 주님을 잔인한 분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의 자비스러운 품성에 배치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땅에 거하게 하시는 분은 그의 손으로 하신 모든 것 위에 무한대의 통치권을 갖고 계신다...인간은 조물주에게‘왜 당신은 그렇게 행하느냐/’고 말할 권리가 없다....그분은 자기 백성을 진노의 기구로 삼으셔서...나라들을 벌하신다.”(4SGa 5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 여호와께서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고 …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출 34:6, 7)으신다. 여호와께서는 복수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시지만 그러나 당신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는, 지상의 거민들을 완전한 타락과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형벌을 집행하실 수밖에 없으시다. 구원받아야 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죄에 굳어진 자들을 끊어 버려야만 하셨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나 1:3). 여호와께서는 정의를 위하여 짓밟힌 당신의 율법의 권위를 무섭게 옹호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어쩔 수 없어서 형벌을 집행하실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당신의 형벌을 초래한 죄가 얼마나 크고, 범죄자를 기다리고 있는 보응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증거한다”(부조, 628).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 죄인의 용서의 길을 마련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화목 제물로 희생된 것은 동시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회개치 않은 자의 죄를 보응 심판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현대신학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을 띄고 있다. 이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0-11)는 말씀을 무시하고 보응 개념을 비인격화시켜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기 악함의 자기파멸적 인과 응보 결과(롬 1:24-28; 시 81:12; 행 7:42)나 적군 또는 악인의 사역 현상으로 본다(렘 33:4, 5).
V. 의분 (Righteous Indignation)
인간의 분노는 자제력이 결핍되기 십상이며 감정의 지배를 받는 기질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이런 분노와는 상이한 특징을 지녔다. 적법한 의롭고 거룩한 분노가 발현되는 일은 사회를 지탱하는 본질적인 힘이 된다. 불의한 사태를 보고 몸을 도사리고 조용하게 지나치는 사람은 자기 파괴적이다. 이와는 달리 의분을 발현하여 불의를 대항하고 개입하는 일은 한 사회를 살려내는 소망스러운 정서의 분출이다 (참조, 삿 9:30; 삼하 12:5; 느. 5:6; 출 32:19; 행 17:16). 선을 사랑하는 것은 곧 선을 유린하는 불법과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히 1:9). 그러므로 이미 지적한 대로 분노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런 시각에서 시랑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의 메시지도 과감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사랑의 반대어는 진노가 아니고 냉담이나 무관심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냉담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둘째 계명은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친밀하고 신성한 관계가 결혼 관계의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우상숭배는 영적 간음으로서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질투라고 표현된 것은 적합한 말이다. ‘질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강렬하게 돌보시는 분, 즉, ‘열심이 있는(zealous)’또는 '정열적인(impassioned)'이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가 빗나가면 분노하며 징계하듯,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자녀가 최상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어 징계하신다(히12:4-11).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하신다. 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악과 상극이 된다. 이는 생명을 주는 산소가 어떤 해로운 박테리아에게 독이 되는 이치와 같다. 하나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파멸하실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하여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을 방치할 수 있느냐고 응답적 반문을 할 수 있다(시 73; 79:10; 94:1-7; 합 1, 2; 계 6:10).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그 노가 계속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시 30:5; 사 54:7, 8; 시 78:38; 사 12:1; 호 11:9; 14:1; 미 7:18). 하나님의 진노를 신인 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 시각에서 풀거나 당대문화적 배경으로 축소시킨 시각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 죄인을 파멸시키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일종의 외과수술과도 같다. 인도주의적 감상주의에 경도된 현대신학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왜곡하는 것은 성경과 거리가 멀다.
VI. 징벌적 보응
‘이는 이로’와도 같은 동해보복법(lex talionis)은 보응을 받는 악인을 개선, 변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그 악행에 상응한 형벌과 고통을 주어 사회의 공의와 질서를 도모함에 있다. 자기에게 상해를 가한 소년을 죽인 라멕은 가인을 위하여 7배정도 보응하게 하였지만, 자기를 위하여는 “칠십칠 배”(창 4:24)로 보응한다는 형평에 어긋난 잔혹한 사적 보복을 제어, 규제하는 것이 lex talionis의 취지이다. 이것이 공의의 원리이다. 이는 물리학의 역학 법칙에서처럼 어떤 작용에 상응하는 반작용이 수반되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것이다. 죄 값은 사망이다. 죄에 대한 반작용은 사망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보훈에서(마 5:38-48) 탈리오법을 폐지시킨 것이 아니다. Joachim Jeremias, David Martyn Lloyd-Jones, Arthur W. Pink 등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탈리오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마 7:1, 2). 탈리오법은 개인이 자의적으로 하는 보복을 막는 일종의 사법적 재판질서에 속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히 10:30)에서 보듯 보복하는 일은 하나님과 그 대리 기관인 국가의 권한에 속한 일이다(히 10:30; 살후 1:6; 롬 13:4).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공변된 보응(a just recompence of reward)”(히 2:2)과 “불의의 보응”(골 3:25)을 하신다. 요한계시록에서 제단 아래 있는 영혼의 호소에 대하여(6:9-11), 19:2은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응답한다. 그리고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계 16:1)한다.
VII. 끝맺는 말
하나님의 진노 사상은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 있다. 복음 선지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노 메시지는 복음 메시지와 함께 이중구조로 나오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죄를 중차대한 문제로 보고 계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상충적인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죄이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전개되고 있는 대쟁투적 차원에서 죄악과 투쟁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비쳐주고 있으며 구속의 경륜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아우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조는 자비와 공의가 충돌된다는 루스벨 반역 기치의 아류에 속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창출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엡 2:3). 공의는 징벌과 죽음을 요청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죽음에의 존재를 그리스도의 구속적 화목제물을 통하여 진노에서 구원하여 주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8-10).
하나님의 공의를 거부하는 사상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약화 내지 결손내는 일에 해당된다. 이는 창조세계를 파멸시키는 악의 세력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굴복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이 각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결단을 중대하게 보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선택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선택을 뒤집어 엎는 일을 하시지 않고 그 선택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도록 하신다(참조, 롬 1:18).
하나님의 진노는 죄책이 주관적인 감정 이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죄는 속상(expiation)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사는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하나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0) | 2012.02.15 |
---|---|
죽은 자의 종교, 산자의 종교 (0) | 2012.02.08 |
하늘의 명 외과의사 (0) | 2012.01.17 |
삼위일체(The Trinity)교리에 대한 이해 (0) | 2011.12.08 |
신정론 (0) | 2011.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