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단상

인간 : 2025. 2. 12. 19:43

원죄 단상

원죄란 엘렌 화잇에서 볼 수 있듯이 아담의 첫 죄를 두고 사용할 수 있는 말이나 그 표현 자체가 지닌 역사적 함의의 다양성 때문에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 사용을 기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대신 인간의 죄성이나 타락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담은 창조주의 무한 자원의 공급으로부터 자기를 제한 내지 차단시켰다. 그는 피조적, 의존적(dependent)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선언(independent)을 하였다. 그리하여 원죄란 자기를 하나님과 그 분의 무한자원으로부터 자기를 닫아 버리는 것이다. 그의 이 독자적 행위가 죽음의 홍수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재난, , 불안, 증오, 투쟁이라는 죽음의 그림자들에 휩쓸려 살게 되었다. 죄는 (nothing)의 원리가 된 것이다.

구원은 인생 앞에 놓인 무의 원리인 죽음의 그림자인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dl 해방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선행은혜를 주시고 있다.

 

웨슬리(John Wesley)는 아르미니우스에 의하여 강조된 은혜를 선행은혜(preventing grace)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선행은혜는 인간의 노력과 결정에 선행하는 은혜이다. 선행은혜는 죄인이 돌아서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이 죄를 깨닫게 하고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신 은혜이다.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프로테스탄트의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론(the total depravity)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이중 예정론의 올무를 피하였다. 그는 전적 타락성이 첫 조상의 타락으로 인하여 온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의 권능의 도움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성화를 포함한 구원의 전 역사(役事)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런 주장은 영혼의 생명 없는 능력을 일깨우고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preventing' 또는 'prevenient' 은혜로 일컬어졌다.

웨슬리(John Wesley)는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준 본성의 타락이란 원죄가 영아에게도 이어지는 점을 인정한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와 달리 영아도 중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칼뱅주의와 달리 인간의 자연적 부패 상태(natural depravity)를 말하면서도 생명의 시발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또한 역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의 은혜 개념을 선행 은혜(preventing grace, prevenient grace) 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이 은혜는 인간이 부르심의 기다림 없이 임하는 은혜이다. Olson은 이 선행 은혜를 회심 전 회개와 믿음이 가능하도록 하는 깨우치고, 부르시고, 비쳐주시며 권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의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선행은혜로 온다.

 

인간은 이 선행하는 은혜를 통하여 복음적 신인협동이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조화를 이룩하는 것이 복음적 신인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이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협동(synergism)’에 해당하는 헬라어 ‘synergos'함께 일하는(working together)'의 뜻이다. 웨슬리는 아르미니안으로 선행 은혜로 자유의지의 회복을 말하고, 자유의지의 응답을 회개의 과정에서 강조하며, 선행 은혜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성령이 사랑과 선행을 요구할 때 응답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선행은혜가 없이 심판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暴君化시키는 사단의 논리로 전락시킨다. 선행은혜가 있어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선택의 자유를 배척하는 전적타락논자들은 조사심판을 배척한다.

통상적으로 칼뱅주의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 응답을 무시하고, 성령의 역사에 대한 노예 의지적 요소만을 강조한다는 비평을 한다. 한 마디로 아르미니안은 자유의지로써 자신의 구원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고, 칼뱅주의자란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기여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에게 하늘의 선물을 얻게 하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이라도 하기를 기뻐할 것이다. 저들은 세상을 저들이 살기에 더욱 좋게 만들기 위하여 저희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정신은 참으로 회개한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생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나가자마자 그 마음 가운데 예수라 하는 생각이 날 것이며 사람을 구원하고 성결케 하는 진리를 그 마음 가운데 감추어 둘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 듯하고 그의 내재적 신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우리 속에 충만해질 것 같으면 우리는 잠잠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을진대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빌립이 구주를 처음 만나 보았을 때와 같이 다른 사람을 구주께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점과 내세의 보이지 않는 실재를 그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정로, 78-79).

 

엘렌 화잇은 회심자의 선한 행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값없이 받은 구원의 선물에 대한 사랑의 반응으로 보고 있. 인간 품성형성에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하나의 요인인 의지는 타락 시에 사단의 장악 하에 들어갔다.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를 바쳐야 한다(5T 515).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를 바친 후 하나님으로부터 의지를 받아야 한다(MB 62). 이런 시각은 웨슬리의 선재 은총론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우리가 빠진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자신이 힘으로 피해 나올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악한데 우리가 그것을 고칠 수 없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14: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교육과 수양과 의지력(意志力)의 연단과 인간의 노력은 각각 상당한 분한(分限)을 가졌으나 이것들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무력한 것이다. 이것들이 혹 행위의 외모적 단정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動機)를 깨끗케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성결하여지려면 먼저 마음 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니 곧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 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한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정로, 18).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의지가 그대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품성에 있어서 그처럼 요긴한 요소를 이루는 이 의지는 타락으로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사단은 언제나 그 자신이 기뻐하는 뜻을 따라 역사함으로 사람의 완전한 멸망과 불행을 도모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희생은,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을 주셔서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그분의 정부의 원칙을 하나도 깨뜨리지 않고 그분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게 한다. “그대 자신을 나에게 바쳐라. 그 의지를 내게 달라. 나는 그것을 사단의 지배에서 빼앗아 내가 소유하겠다. 그렇게 될 때 나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그대 안에서 역사할 수 있다.” ”(5증언, 515).

 

인간은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께 먼저 바치고 새로운 의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의 활용을 통해서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또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것을 그분과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보훈, 62).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