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패러독스

구원 : 2023. 10. 29. 22:15

은혜의 패러독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I. 패러독스란?

이 세상에나 그리스도교의 진리에는 역설적 진리가 있다. 역설(paradox)이란 그리스 단어 ‘paradoxos’에서 온 말로 para(여격과 함께 ‘~곁에,’ 목적격과 함께 ‘나란히’)와 dokein(‘~으로 보인다,’ ‘생각하다,’ 의견)의 합성어로 곁에 나란히 있는 사상이나 의견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 구조에 있어서나 상식적으로는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들어 있지만, 그 표현 내용에 있어서 진실성이나 가능성을 담고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패러독스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놀라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 연구는 어떤 점에서 패러독스로 끌려 들어가는 길입니다. 패러독스란 역설적이거나 이율배반적이거나 변증법적 모순과 긴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에 특히 민감했던 사람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는다는 고백을 해 왔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제3의 신앙의 비약을 말한 것은 인간 실존 역설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에 특히 민감했던 사람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한 테르툴리아누스, 마르틴 루터. 키에르케고르 등입니다. 

스코틀랜드의 St. Andrews University 조직신학 교수 베일리(Donald M. Bailie)는 역설적 기독론 사상을 펼쳤습니다. 베일리는 새롭거나 독창적인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론에 관한 교리가 역설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인식되어 온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여한 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역설을 성경의 중심적인 패러독스로 보면서 그것을 기독론적 역설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신앙의 패러독스로 확장하여 설명하여가고 있는 점에 있습니다. 즉, 그는 성육신의 역설과 다른 역설들의 유기적 연계관계를 설정 창조 교리, 섭리의 역설, 성육신의 역설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 역설들을 은혜의 역설로 풀면서 진리와 삶의 중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패러독스.

창조 사건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패러독스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창조되었다(creatio ex nihilo)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없음에서 삼라만상이, 온 우주가, 생명과, 인간이 나왔습니다. 원인이 될 수 없는데서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는 논리로나, 이성으로 수긍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에서 물질계 즉, 이 나왔다고 하는 불자들의 (空卽是色, 色卽是空) 사상은 어느 면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한 역설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분명히 아무 것도 없는데 거기서 어떤 것이 생겼습니다. 이 세계가 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은 패러독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을 믿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신비한 사랑의 뜻과 은혜를 통하여서입니다.

 

. 하나님의 섭리와 품성의 패러독스.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내 여러 민족의 조상으로 택하였습니다(17:4).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은소수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이었습니다(7:7-8).

재림교회는 처음 출발 시 신자들의 수효가 얼마나 적었으면 자기들을 작은 양 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적은 수를 오늘날 세계적인 교회로 발전시키셨습니다. 지금은 세 천사의 기치를 들고 있는 신도들이 2천만이 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적은데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크게 자랐습니다. 하나의 조약돌 같은 존재가 큰 바위 같이 커졌고 거기 이끼가 끼여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안에 살고 있습니다.

악의 세력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상호 충돌적인 것으로 보아 공의하면 사랑이 결여되거나 약화되고, 사랑하면 공의가 무너지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 불가능론(율법폐기론)을 주장하여 왔습니다. 개신교 윤리에서 하나를 개인윤리로, 다른 하나를 사회윤리로 보는 이원론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역설적인 이 둘은 신비로운 조화가 가능한 쌍둥이 자매인 것입니다(4T 209).

 

. 성육신의 신비스러운 패러독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융합되어 있습니다. 이 일을 두고 바울은 미스터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 양성결합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니케아(Nicea) 회의로부터 갈게돈(Chalcedon) 회의에 이르기까지 숱한 회의가 있었으며 머리를 싸매고 이 문제를 해명하는 선언서, 신조, 신경들을 내놓았습니다만, 그리스도 교회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호 대립되는 형국이 되어 있습니다.

지나간 수 십 년 간 재림교회 내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에 관하여 첨예한 대립을 하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신 성육신 그 자체는 패러독스입니다. 이 신비한 패러독스를 합리적으로 (reasonable) 이해하는 일에 불일치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있지 않나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무죄한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은혜의 패러독스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죄가 없다고 하면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성육신의 패러독스는 속죄의 패러독스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우리도 죽었다는 것은 패러독스에 속합니다(고후 5:14).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게 하심이라”(고후 5:15). 절대적인 요구를 하신 분이 그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가 죽으셨는데 내가 살게 되었다는 것이 속죄입니다. 이 얼마나 큰 패러독스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원리가 얼마나 엄청난 삶의 원리가 되었던 지를 잘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은혜의 패러독스가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V. 구원의 패러독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으킨 사건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입니다(3:20-21). 직설법으로 나타난 이 구원 사건을 명령법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2-24; 참고 엡 2:8-10).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구원사건에 있어서 명령법의 표현양식에는 인간이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요구하시는 명령은 또 하나의 패러독스입니다.

삶의 현장이란 경험계에는 원인과 결과의 연속적인 고리가 지배합니다. 평면적, 수평적인 시각으로 보면 원인 결과라는 자연법칙이 지배하지만, 수직적인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초자연적인 섭리가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뿌리를 내리는 토양은 은혜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우선성과 무조건성은 맥맥히 반복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명령으로 언약의 조건성으로 나온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면서도 개인적인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적 협동론의 패러독스를 신봉합니다. 은혜에 반응이라는 책임이 수반되는 은혜(Responsible Grace)가 강조됩니다.

19세기 찬송 시가 이를 간결하게 묘사합니다. 영국 여류 시인 Harriet AuberOur blest Redeemer ere He breathed 제목의 찬송 시 제5절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얻은 모든 미덕,

우리가 얻은 모든 승리

또 거룩한 생각이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

(And every virtue we possess,

And every conquest won,

And every thought of holiness

Are His alone.)

 

VI. 은혜의 복합적 의미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신약성서에 은혜(charis)’라는 말이 150회 나오는데 이 중 100회는 바울이, 25회는 바울의 동역자 누가가 사용하였습니다(5/6). 은혜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용서하시는 자비를 뜻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구원하시는 활동적이고 활기차게 변화시키시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을 지향하여 삶의 여러 장면에서 이 활동적이고 활기찬 ,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권능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령으로 채워진 사랑의 가슴은 욕망을 통제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눈에는 구원의 패러독스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 나의 존재와 삶에 수반된 몇 패러독스

나의 존재 그리고 여기까지 이른 나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인도하심이 선재하여 왔습니다. 흘러가는 크로노스 시간을 의미가 있는 카이로스로 만들어 가는 일은 자기 힘으로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이 태어난 나 같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시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게 할 수 있는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입니다. 나를 오늘까지 순례의 길을 걷게 하신 일은 하나님의 카이로스 선택이었습니다.

나는 배속에서부터 신앙하지도 않았습니다. 청소년기에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도 모르고 살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여 살아 있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그대로 입니다. 내가 만일 타 교단에 속하였다면 어떻게 예언의 신을 알며, 건강기별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안식일의 오묘를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어둠 속에서 헤맬 때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분은 나를 구원하였습니다. 순종하면 축복하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길에는 고난도, 질고도 따릅니다. 그것은 개인적 죄의 결과로 올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믿음의 길에서 은혜의 구원 다음에 원치 않는 것이 가시처럼 찌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고 하였습니다. 나의 걸어 온 길에 수반된 은혜의 역설이라는 고통을 바울의 말씀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더 깊은 믿음과 더 깊은 거룩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 호소

우리의 삶은 하늘이 보이신 것을 지키면서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순례자의 여정과 같습니다. 자기에게 밀려오는 상황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로 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수많은 과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과 노력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행 은혜가 아니면 헛발질에 불과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좋은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결실들에 속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 노력을 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로 나가게 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삶의 문제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권능으로 섭리적으로 해결되어 갑니다. 없는 것에서 있음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패러독스는 나를 구원하시고자 성육신의 은혜의 패러독스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영광과 욕됨이 따르고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 동시에 부쳐질 수 있는 역설 가운데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한량없는 사랑의 은혜로 우리를 채우셔서 이를 극복하여 가게 하십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어야 하고 무명한 자 같으나 하나님의 유명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죽는 자 같으나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징계를 받는 자 같 문제가 우리에게 있지만 거기 빠져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마들어 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순례자들을 그 분께서는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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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