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길

구원 : 2023. 7. 21. 09:43

인생의 길

연구 범위2:1~10, 5:145:175:6딤후 1:7

기억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2:4, 5).

 

I. 길을 걷고 있는 인생

인생은 길을 걷는 존재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길이 많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다. 오늘날 다행이도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여 처음 가는 길도 쉽게 갈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 내비게이션도 우리를 바로 인도하는가? 여러 해 전 수원에 있는 교회를 찾아 핸드폰 길 안내를 이용하여 쭉 따라가는데 어느 지점에서는 아주 낯선 풍경이 전개된다. 알고 보니 기계가 안내하는 길은 음습한 길이었다.

인생의 목표는 참 길 찾기에 있다. 그러나 참 길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도덕적, 영적 세계에서는 더욱 길 찾기가 쉽지 않다. 단테는 35세 나이에 서사시 <신곡> 지옥편 첫 말은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인생길에 절반(35)을 지나 어두운 숲속에 있음을 알았으나 어긋난 길에 서 있었다.”

(옛 번역: “한뉘 나그넷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고 헤매던 나 컴컴한 숲 속에 서 있었노라.”) “...참다운 내 던져버린 바로 그 즈음/그토록 잠은 깊었던 탓이어라.”

 

우리는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잠시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갈림길에 섰을 때마다 나는 울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빗나간 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혹스럽기 한이 없다. 누군가가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에베소 제2장에는 인생을 걷는 존재, 따라가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1) “행하여”“행하게”(2, 10) 헬라어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 peripateo-)의 번역어이다. 그 뜻은 문자적으로 걸어 돌아다니다”, 비유적으로 살다”, “살아가다.”이다. 신약의 용례 대부분(바울과 요한이 주로 사용함)에서 이 단어는 은유적으로 삶의 행동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2) 따르고” “따랐으니” (κατά)(2). 인생은 누군가를 , 또는 무엇인가를 따르는 존재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둠과 악령을 따르고 있다.

 

II. 죄악의 길, 죄 가운데 죽은 인간 (1-3)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은 죄의 길을 따르는 (κατά) 여정에 있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고, 사탄을 따르는 자들이다. 인간은 죽음의 증상인 악과 증오 속에서 죽어가는 존재이다.

바울은 수신자들의 과거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들을 지배했던 두 가지 외부 세력들을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이 세상 풍조"(2:2), 인간의 삶을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왜곡시킨 에베소 사회 전반의 관습과 행동이다. 두 번째 외부 세력은 이전에 그들을 지배했던 사탄의 세력이다.

"공중"(또는 "하늘")은 악한 힘을 포함한 초자연적 힘의 위치로 인식되기 때문에(1:33:106:12 비교) 사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2:2)이다. 또한 그는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2:2)이기에 지상에서도 활동한다.

허물(παράπτωμα, parapto-ma)'곁에 떨어짐', '진리나 정도에서 벗어남,‘ 또는 이탈,‘ ‘실수, 잘못, 오해, 실책, 범죄, 잘못'을 의미한다. ‘허물은 문자적으로 정로’(正路)에서 떨어지다라는 의미로 부주의하여 진리에서 떠나는 것이나 잘못된 경향성을 가리킨다.(ἁμαρτία, hamartia)는 잘못(mistake), ‘는 문자적으로 과녁에서 벗어나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생의 법도를 벗어난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허물과 죄 이 둘은 결국 동의어이다(Barth, Lincoln, Foulkes).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에피뒤미아, ἐπιθυμίαις τς σαρκς)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육체의 욕심‘(ἐπιθυμίαις τς σαρκς)은 영적, 도덕적인 '나쁜 욕망'(evil desire), 혹은 '정욕'(lust)이다. 이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인간은 죽음의 병균에 침입당한 존재,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죄의 삯이 죽음이기 때문이다(6:23).

이 세상(κόσμος, kosmos) 풍조(αἰῶνα, aiona)를 따르고” ‘아이오나는 이 세대의 타락한 인간 존재의 측면을 의미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인간의 참된 행복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는 초자연적인 악의 세력으로 악의 영들’(6:12), 사탄’(8:33, 22:3)을 의미한다.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에 이런 악한 영의 통치(統治)하에 살았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한때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2:3)이었다고 말한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다른 표현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이 진노가 임한다(5:6). 본질상 진노의 자녀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과 등진 인간은 본질상진노의 대상이다. ‘본질상은 태어나면서부터 있던 천성적인 것을 나타낸다(Bruce, Lincoln).

또한 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구절은 다른 무서운 현실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우리 안에 깊은 문제가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한두 가지 나쁜 습관을 극복하거나 현재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허물과 죄"(2:1)를 극복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죄와 싸우는 것만 아니라, 죄된 본성과 싸워야 한다. 창조주로부터 단절된 인간은 더 이상 생명을 분여 받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한 인간은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자기 파멸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탄의 명령(2:2)과 우리 자신의 타고난 죄악된 욕망(2:3)을 따라 자기 파괴적이고 죄악된 행동의 유형에 사로잡혀 있다. 신자들도 한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naturally 자선적benevolent이 아닌 상태로 기우려져 있고, 탐욕적이요 탐심이 많으며, 자아를 위하여 살아간다. 사단은 사람들의 모든 재물을 이기적이요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함으로 얻게 될 유익을 제시하고자 언제나 준비하고 있다.”(5증언, 381-382).

사람의 본성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 곧 인간이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Ed 29).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죄된 불순종의 내적 타고난 성향을 물려주었다(5BC 1128).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책(guilt)과 사형 선고(the sentence of death)밖엔 없다”(CG 475; Letter 68, 1899).

바울이 본문에서 과거 시제를 사용했다고 하여도, 신자들이 타고난 악에 대해 기울어진 성향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이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그들이 회심 전에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일상에서 허물과 죄를 일삼았으며(2:1), 사탄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신자들의 회심 이전 생애의 슬픈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바울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한때 "죽은 자"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5:14 비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때 그들의 곤경은 매우 현실적이고 끔찍했다(2:135:136:23 비교).

 

바울은 편지의 상당 부분(4:17~5:21)을 할애하여 죄의 본성에 뿌리를 둔 죄악된 행위가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위협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4:22~24)은 신자는 더 이상 "옛 사람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외적인 힘만 아니라 내적인 것,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2:31:14, 15벧전 1:14 비교) 그것에 의해서 지배받는다.

생명을 잃은 현실도 충분히 고통스럽지만, 마지막 날에 일어날 심판은 더 무서운 일이다. 인간은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2:3)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아래 서 있다.

 

III. 구원의 길/ 생명의 길

1.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명의 여정 순례(2:4-7)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2:4).

하나님으로부터 독립(independence) 선언한 인간 존재는 제한된 자원과 제한된 시간의 틀 속에서 하나님, 이웃, 및 진정한 자아로부터 소외당하여 허우적거리며 살아가야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인간이 독립을 포기하고 하나님에 의존하는 존재(dependence)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날 때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시간에 연결된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왔다. 하나님께서는 더없이 큰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 2:4의 한글 번역에는 그러나(δὲ)”가 빠져 있다.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은이라는 단 두 단어로 편지의 수신자들이 겪었던 과거의 슬픔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통해 새롭고 희망으로 가득찬 현실을 살게 된 신자의 삶으로 전환시키고 있다(2:410).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허물과 죄, 그리고 육의 에피뒤미아 길에서 죽음의 행진을 하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났다. 그리스도의 삶에 일어난 부활, 승천, 높여짐은 우주를 변하게 했고, 신자들의 현실을 바꾸어 그들을 지배하던 악의 권세를 이기게 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5-6). 신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하늘에 앉음에 참여할까? 이러한 참여는 언제 이루어지는가? 우리의 죽음, 부활, 및 승천이 그의 죽으심, 부활, 및 승천에 내포되어 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을 강조하여 그리스도로 가득한 서신이라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2:5, 6에서 세 가지 함께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 주제를 확장하여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통해 신자들이 메시아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중요한 구속사적 사건에 참여한다는 놀라운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 사건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났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다(1):45). 예수께서 선호하신 인자칭호는 다니엘 7:13에서 신적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인자 같은 이가 심판의 보좌에 좌정하고 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2:5) 여기서 바울은 복합동사 함께 살리셨고(συζωοποιέω suzo-opoieo-)를 사용고 있다. 이는 구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오는 것임을 나타낸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두 이루어진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영적 죽음으로부터 일으킴을 받는다(참조: 6:11 비교).

 

신자들은

(1)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συζωοποιέω, co-resurrected with Christ)

(2)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며(συζωοποιέω, co-raised up with Christ)

(3)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음(συγκαθίζω sugkathizo, co-seated with Christ).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승천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 복합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다스리며 함께 후사가 되고,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 그분의 영광에 참예한다(참조 롬 6:3~8; 8:17; 2:20).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한다는 것이다(고후 5:17). 더나가서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우주의 보좌에 "앉음"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높임을 받는다. 구원은 교훈이나 권고가 아니라,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활기찬 생명에 다가감으로 이뤄진다.

바울이 얼마나 능력있는 말씀을 전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19~23을 되살펴 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 승천, 하늘에 앉으심을 통해서 한때 신자들의 삶을 지배했던 모든 악과 영적 권세로부터 승리를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활동하며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이 악의 권세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 높임의 능력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우주가 변화되었고 현실이 달라졌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다.

신자들은 이 중대사의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 승천, 하늘에 앉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는 마귀가 지배하는 삶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풍요와 능력의 삶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 것이다(딤후 1:7). 그리스도인은 메시아의 왕국의 미래를 앞당겨 맛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2. 구원의 길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개인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더 큰 목적을 위한 것으로 온 우주가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1;3-4) 그 경륜의 영원한 결과(2:7)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은혜는 구원의 경륜"의 필수 요소가 된다.

학위 수여식은 뜻 깊은 축하의 시간이다. 졸업은 인생이나 경력의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성취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그 분의 은혜의 학교에서 결코 졸업이 없다는 것은 복음의 심오한 진리에 속한다. 우리가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겼다 해도 크신 은혜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때는 없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고, 현재 우리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높여짐에 함께 참여하는 자로 간주하신다(2:4~6).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은혜 충만한 과거, 자비로 가득한 현재에서 끝나지 않는다. 태고의 신성한 평화의 의논에 뿌리를 둔(1:4) 하나님의 경륜은 미래 영원히 계속 펼쳐져 있다.

여기에는 모든 "다가오는 시대"(2:7)가 포함된다. 영원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과거와 현재에 행하신 하나님의 행동과 동일한 원리, 즉 은혜의 원리에 기초한다.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나타내시기를 고대하신다(2:7).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신자들이 어떤 필요라도 충족시키기 위해 끌어올 수 있는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보물이나 재산(1:73:8 비교)으로 생각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관대하심은 한량없고 영원하며 우주적인 그분의 은혜에 대한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나타내시려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가 주어진 것은 이 세상의 인간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작은 세계는 우주의 교과서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목적 즉 구속하시는 사랑의 신비는 천사들도 또한 살피기를 원하는주제로서 무궁한 시대를 통하여 그들의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구속(救贖)받은 자들이나 타락하지 않은 자들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들의 과학과 노래를 찾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는 영광은 자아 희생적(自我犧牲的) 사랑의 영광임이 드러날 것이다"(소망, 19, 20).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개인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더 큰 목적을 위한 것으로 온 우주가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IV. 하나님의 작품으로서의 길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ατογάρ σμεν ποίημα.” “만드신 바poiema의 역어로 영어의 poem 어원이 된다. 인간은 감동적인 하나님의 作品이며 라는 것이다.

창조 당시의 작품으로서 인간의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 구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시다. 헤셀은 하나님의 꿈에 인간이 동참하기를 바라신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함께 품고 해산의 고통을 겪는 존재세계를 구원하고 땅과 하늘을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꿈그 분의 참된 형상그 분의 지혜정의와 사랑을 그 분의 꿈을 함께 꾸는 존재이다라고 하였다그의 이 갈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들추어 낸 말이다.

2:1~3에서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의 구원이 그들의 착한 행동이나 훌륭한 자질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기록한다. 서신이 시작될 때의 이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 안에는 생명이나 가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2:1). 죄에 완전히 정복당했고(2:1), 사탄의 권세, 자신의 정욕, 정신적 미혹에 이끌려 그들은 인생의 주도권을 상실했다(2:2, 3).

에베소 신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저 영적 생명이나 미덕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형편에 처할 수 있다. 그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참 하나님을 대적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2:3)이었다.

그들의 구원은 그 자신의 자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 그 대상의 어떤 가치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을 대신하여(2:4) 행하시며, 그들을 영적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신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그들은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따르는 놀라운 여정을 경험한다. 완전한 영적 죽음과 가혹한 노예 생활의 심연에서 부활하여 "하늘"로 옮겨져 그리스도와 함께 우주의 보좌에 앉게 된다(2:5, 6). 이것은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신성한 개입이지만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토록 그들을 향한 그분의 은혜를 나타내기 원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참된 지속력과 영속성을 가지고 있다(2:7).

2:1~10까지의 결론(2:8~10)에서 바울은 신자의 구원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어떤 인간도 그것이 일어나게 했다고 자랑할 수 없다(2:8, 9).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 있는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표본이며, 오직 그분의 은혜를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드신“(2:10) 그분의 걸작품이 되어가야 한다. 신자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의 모델로 우뚝우뚝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여야 한다.

이 놀라운 여정에 참여하여 하늘까지 올라가는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의 자질과 관계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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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