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황 프란치스코 1세의 등장을 보면서
새 교황 프란치스코 1세로 선출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 추기경(76)은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출신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58년 예수회에 입문해 수도사의 길을 걸었으며, 1969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아르헨티나와 독일에서 공부하고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 2001년 추기경에 임명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언행이 연일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프란치스코란 이름은 13세기 초에 로마 가톨릭의 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수도회) 설립으로 세속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 운동을 이끈 교회개혁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이탈리아어: San Francesco d'Assisi, 1182년~1226년 10월 3일) 수도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은 평소에 청빈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 왔다고 한다. 대주교 직에 오른 뒤에도 운전기사를 따로 두지 않고 버스나 지하철로 출퇴근 하고, 비행기도 이코노미를 이용하는 인물로 평이 나 있다. 사는 곳도 대주교 관저가 아닌 성당 옆 건물의 방 한칸짜리 아파트였다고 한다. 추기경복도 전임자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아 입었고 음식도 본인이 직접 요리해서 먹었다고 한다. 몇 신부가 돈을 모아 교황 선출을 위한 로마 회의에 참석하러 떠나는 그의 낡은 구두를 새 구두로 바꿔줬다는 얘기도 들려 온다. 폐수술을 받아 수십년 동안 한 쪽 폐로만 생활해왔다고도 하여 동정이 간다. 이런 인물평을 보노라면 하나하나가 비록 작지만 은은하게 빛난다. 그리고 머리가 숙여진다.
새 교황은 신학적인 측면에선 보수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자기 城에 같혀서 군림하지 않고 고달픈 삶의 현장을 찾는 일을 하여 왔다. 얼마전 성(聖)목요일을 맞아 새 교황은 라테란 성당에서의 거창한 미사 같은 것을 집례하기보다는 로마 북쪽의 한 소년원을 찾아 소년 소녀 재소자들발에 입을 맞추며 세족례를 하는 모습이 크게 보도됐다. 재소자들에게 ‘희망을 도둑맞지 말라’고 일깨우는 모습은 감동으로 이어진다(Fox News에서).
교황이 숙소로 사용하는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미사를 볼 때 교황청에서 일하는 청소부, 상점과 식당의 직원 등 일반인이 번갈아가며 함께 미사에 참여한다고 한다. 또 교황은 미사가 끝나면 일반 신자들의 맨 뒤에 와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 한다는 것을 읽으면 과거의 군림하는 교황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낮아진 모습이다. 교황의 전용 의자도 단순한 디자인으로 바뀌었고, 전용차는 메르세데스벤츠에서 폴크스바겐으로 교체됐다는 뒷 이야기도 들린다.
스스로를 '교황'이라 일컫지 않고 '로마 주교'라 부르는 겸손에 "추기경들이 새 지도자를 찾기 위해 거의 세상 끝(아르헨티나)까지 갔다"는 유머를 말하는 소탈한 모습들이 새롭게 보인다. 준비된 리무진 차량을 물리치고 셔틀버스로 방금까지 동료였던 추기경들과 숙소에 돌아가 함께 저녁을 들며 "하느님께서 (나를 뽑은) 당신들을 용서해주시기를…" 하는 기막힌 건배사(乾杯辭)를 던진 청빈(淸貧)과 겸손의 상징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은 당장 가톨릭 교회의 새 출발을 지향한 의지의 발로로 보인다. 교리 문제엔 보수적이면서도 가난과 불평등 문제 해결에는 누구보다 적극적 목소리를 내온 새 교황이 걸어온 길은 가톨릭 내부의 보수·진보 간 갈등을 상당 부분 누그러뜨릴 전망도 나오고 있다.
프란시스 1세는 취임하면서 교회의 세속화를 질타하였다. “우리가 십자가 없이 길을 가고, 십자가 없이 건축을 하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여 주교도, 사제도, 추기경도, 교황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그는 수많은 신도들이 로마로 향하는 여정에 오르려는 것을 만류하여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하며 그 여비로 가난한 자들을 보살펴 달라고 하였다.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수많은 신도들 발 앞에 엎드린 그를 보고 그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어느 겸손한 개신교회 지도자와 강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가톨릭교회를 빈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로 세워가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선포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고백하는 일을 강조한 것을 보면서 그는 그리스도인답게 처신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오히려 부끄러워진다.
누군가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이 예비하신 히든카드 같다”고 말했다. 그의 등장은 복마전 같은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교황청과 사제의 성추문 등으로 위기의 시대를 맞은 가톨릭교회를 일깨우는 진정한 사도적 계승자를 맞은 것 같다. 이런 청빈과 겸손의 씸벌 같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은 온 세상에 큰 즐거움과 감동을 주었다.
재림교회는 역사주의 해석기법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황권을 적 그리스도로 보는 시각을 이어받아 종말론적으로까지 확대 해석하여왔다. 특히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의 종말론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풀이하여왔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시키는 남은 자손의 등장을 예고하였다. 요한계시록 13장과 17장은 그리스도교계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교회를 박해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황 프란치스코1세가 지나간날 어둠의 역사를 빚어낸 교황권의 대열에 서서 요한계시록 제13장의 예언을 이룰 장본인이 될 것인가?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이 베드로를 통한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이라는 교권계승권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교의 정통 적자라고 자부하여 왔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교회들에는 이런 사도적 게승이 결여되었다고 비평하여 왔다.
그러면 진정한 사도적 계승이란 무엇인가?
“오랫동안 그리스도교계를 소란스럽게 해온 사도적 계승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의 자손됨은 이름이나 혈통으로써가 아니라 성품의 같음으로만 판명된다. 그러므로 사도직의 계승은 교권의 전달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요 영적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도들의 정신으로 움직여 행동하는 생애,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를 믿고 가르치는 것, 이것이 참된 사도직을 계승한 증거이다. 이것이 사람들을 복음의 첫 교사들의 계승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DA 467).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도적 계승이란 사도들과 같은 정신으로 살면서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를 믿고 가르치는 것에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프란치스코1세는 현재까지 사도들의 정신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 온 점에서 사도적 계승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을 가르치냐는 기다려 보아야 한다. 사도적 계승에서 사도적 삶이 사도적 진리에 선행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도적 교리에 집착, 강조하면서 사도적 삶을 등진 신앙인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 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사도적 삶과 진리가 어우러진 144,000 명 남은 백성들이 되어야 주어진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새 교황이 청빈과 겸손한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지만, 전승과 교황의 교도권의 권위를 성경과 동등한, 또는 그 이상의 권위를 지녔다고 보는 로마가톨릭의 본래의 입장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 소위 교권계승이라는 사도적 계승에 토대를 둔 ‘오직 교회 (sola ecclesia)’라고 보는지도 주목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를 지배하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원리란 성경만이 그리스도인 구원 신앙과 실천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궁극적인 권위가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새 교황이 자신을 성경의 권위 아래에 묶을 수 있을까? 로마가톨릭교회는 거룩한 전승이 기록된 책과 기록되지 않은 전승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또한 동 전승은 사도적 계승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보수적 입장에서는 성경과 전승에 각각 부분적으로 신적 계시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 왔으나 새로운 시각에서는 성경은 명시적으로 전체적 진리를, 전승은 암묵적으로 전체적인 계시체계를 지녔다고 본다.
사도적 전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고전 11:2; 살후 2:15) 사도들이 잠든 이후에는 기록된 성경이야말로 그 전승을 사도적 전승인지 여부를 판단할 유일한 기준이 된다. 성경에는 사도적 전승이 체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 이외의 전승 자료는 그 불완전성과 권위성에 문제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전승을 추가하는 방식은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훼손하기 마련이다. 성경이 교회에 의하여 보완될 때만 완전하다(perfectio implicita Scripturae Sacrae)는 RC의 입장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성, 명료성, 효력성, 충분성(ACES)의 원리를 제창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신구약 성경 그 자체 안에 하나님 말씀이 됨을 스스로 입증(自證)하는 autopistos (self-authenticating)한 것으로, 그리고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the internal testimony of the Holy Spirit)로 보았다. 성경의 확실성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이 아닌 성령의 내적 증거에 있다. 또한 개혁자들은 Vox Scriptura, vox Dei (the voice of scripture is the voice of God)의 입장을 취하였다.
위대한 시인은 자기가 시인임을 입증하지 않는다. 시인의 시가 스스로 그 위대성을 입증한다. 또한 천재는 스스로 입증되는 것과 같다. 성경은 인간의 혼을 밝히는 빛을 담고 있다. 성경 없이는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가 무의미하여진다. 성경은 영을 담고 있는 영원한 책이다. 성경은 말로 나타난 성스러움이다(holiness in words).
성경은 성령께서 선언하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서만이 교회를 통치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교회는 성경을 통하여서 존재하게 되었지 성경이 교회를 통하여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성경 그 자체로는 하나님 백성의 권위로서 불충분하다고 한다. 그래서 전승과 교회의 가르치는 권위를 성경에 첨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착된 쇠사슬과도 같은 것을 새 교황이 깨트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시대에 개혁자들이 전승을 배척하는 성경관에 대하여 저주를 선언하였고(‘anathematized') 참혹한 박해를 지휘하였다. 우리는 지나간 시대의 이 어두운 역사의 큰 그림자를 새 교황이 어떻게 볼 것인지도 주목하고 싶다.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미지회 여성안수 연구위원회 보고서 요약 (0) | 2013.10.17 |
---|---|
북미지회의 여성 목회자 안수연구위원들의 연구보고서를 읽으면서 (0) | 2013.10.17 |
추락하는 대총회의 권위 (0) | 2012.08.24 |
은유적 표현들이 시사하는 교회상 (0) | 2012.03.21 |
다른 사람을 보는 눈 (0) | 2012.03.21 |